아사드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케이든을 앞에 두고 가만히 눈만 깜빡였다.
하나 평화로운 고요를 넘어 무거운 침묵이 찾아오기 전에, 다시 입을 열었다.
“제국어. 나쁘지 않네.”
다른 얘기였다.
“……다, 아문 덕분입니다.”
“선생에게 공을 돌리는 건가?”
“제가 많이 답답하게 굴었는데도 저를 포기하지 않고, 항상 상냥한 선생님입니다. 아문이 아니었으면 지…… 금보다도 훨씬, 부족했을 겁니다.”
“그래?”
기둥에서 몸을 뗀 아사드가 케이든을 향해 몸을 숙였다.
“반려를 앞에 두고 다른 남자를 칭찬하면 안 되는데.”
“그, 그런 게 아니라…….”
“뭐, 그 애를 당신에게 붙여 준 사람이 나잖아. 어찌 보면 내 칭찬을 들은 것과 다름없지.”
아사드는 웃고 있었다. 심지어 기분이 좋은 것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당혹감이 물러난 자리에 기분 좋은 안도감이 들어찼다. 안심한 케이든은 아사드를 따라 웃었다. 아주 어설프고 자그마한 미소였으나, 그가 아사드 앞에서 처음으로 짓게 된 편안한 표정이었다.
“이상하게도 웃는군. ……보기 싫다는 건 아니고.”
대충 눈이 그쳤음을 확인한 아사드가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자와 땅을 잇고 있는 낮은 계단을 힐끔 내려다보더니, 대뜸 케이든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왜 저러는 거지? 반쯤은 얼이 빠진 케이든이 슬금슬금 아사드를 따라 일어났다.
엘바에서도 이런 광경을 몇 번 봤다. 애들도 쉽게 오르고 내릴 낮은 계단에서 저러는 이유가 따로 있는 거냐며 의아해하는 제게, 엠마는 그게 바로 연인 간의 매너라고 알려 줬었다. 정신이 제대로 박힌 알파라면 응당 저래야 한다는 말을 더하면서 고개를 젓기까지 했었다.
하지만 지금 이걸…… 에스코트라고 해도 되는 걸까.
아사드의 뜻을 알 수는 없었다. 그런데도 케이든은 아사드가 저를 향해 내민 손이 멋쩍기만 했다. 제가 아사드에게 에스코트를 받을 만한 사람이 아니란 걸 알아서 더 그랬다.
그래도 케이든은 눈치껏 아사드의 손을 붙잡았다. 너무 어색한 경험인지라 쭈뼛대긴 했지만, 아사드를 따라 무사히 계단을 내려갔다.
케이든은 제 손을 놓는 걸 잊은 듯한 아사드와 함께 어지러운 열기 속으로 걸음을 옮겼다. 마법 때문에 차가워진 손을 잡고 있어서일까, 날카로운 햇살이 조금도 따갑게 느껴지지 않았다.
3. 선물
이마를 손에 괸 채로, 아문은 침묵하고 있었다.
아문에게 무어라 말을 걸려던 케이든은 여러 번의 망설임 끝에 결국 입을 다무는 쪽을 택했다. 깊은 생각에 빠진 아문을 깨우는 대신, 그가 스스로 깨어나길 기다리기로 한 거였다.
아문의 모습을 한 아사드의 정신은 반쯤 다른 곳에 가 있는 상태였다. 아사드는, 그가 정오에 참석했던 야외 만찬에서 겪었던 일을 계속해 곱씹는 중이었다.
비정기적으로 열리는 정오의 야외 만찬은 황실의 가족 모임과 다름없었다. 하지만 아사드는 그 시간을 가족 모임이라고 명명하지 않았다. 나랏돈으로 편하게 먹고사는 이들이 모여 같잖고 사소한 투정을 늘어놓으며 징징대는, 주제에 꼴값을 떠는 모임이라고 불렀다.
아사드는 그의 친척들을 싫어했다. 친한 척하는 인간들은 더 최악이었다. 나이를 먹은 것들이나 어린 것들이나 똑같이 짜증 났다.
예전엔, 멍청이들이 쏟아 내는 이야길 들어 주기도 했었다. 화를 참아 가며 말이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아사드는 제 친척들의 헛소리를 듣는 시늉도 하질 않았다. 매정하다 원망해도 상관없었다.
일은, 차가운 잔을 들고 의미 없이 연못가를 산책하던 중에 벌어졌다. 식사를 목전에 둔 때였다.
오후에 있을 제국어 수업을 생각하며 제 육촌 형제들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던 아사드에게, 별안간 물음 한 무더기가 쏟아졌었다. 호기심이 질척하게 묻어난 질문들이었다. 대부분, 비밀과 소문에 몸을 숨긴 채 모습을 드러내고 있지 않은 황태자비에 관한 거였다.
……다시 떠올리자니 더 개 같았다.
건네진 말들은 그 겉이 멀끔했지만, 그 안은 하나같이 저열하고 질이 낮았다. 아사드의 침묵을 자신들의 말에 동조한다는 뜻으로 받아들였는지 그 수위 역시 조금씩 올라갔었다.
해야 할 말과 하지 말아야 할 말을 구분하지 못하는 멍청한 인간들이야 어딜 가나 많았다. 하지만 그런 인간들 사이에 황가의 사람이 속하면 안 된다고, 아사드는 생각했다.
아쉽게도, 아사드의 육촌 형제들은 그 멍청한 인간들 중 하나였다. 옛 제국의 나쁜 관습이며 문란하고 추잡한 문화를 버리지 못한 엘바에 들락거리더니, 안 그래도 가볍던 대가리에 똥까지 차게 된 모양이었다.
혈연보다 실력을 중시하는 헬리오에서 훗날 변변찮은 직함도 얻지 못할 게 분명한 멍청이들은, 자신들의 초조함과 열등감을 황태자비를 이용해 음침하게 표출하려 들었다. 원래라면 아사드의 옆에 있어야 할 반려자가 보이질 않는 데다 아사드가 그가 반려 신탁이며 신부를 지긋지긋하게 생각한다는 소문이 도니, 황태자비를 저들 마음대로 씹어도 되는 존재라고 여기게 된 거다.
아사드는 인내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그는 곧장 발을 들었다. 멍청이 하나의 정강이를 찼다. 당황해 휘청이는 놈의 등을 친히 툭 쳐 주기까지 하자 그대로 쓰러져 연못에 빠져 버렸다.
당황한 다른 멍청이의 등에도 아사드의 손이 닿았다. 아사드는 긴장으로 굳은 제 친척의 등을 다정히 도닥여 줬다. 그리고 그대로 연못을 향해 밀어 버렸다. 처넣었다고 봐도 무방했다.
〈이런. 옷단이 너무 길어 발을 헛디딘 건가? 아니면, 더웠나 봐?〉
아사드는 다정한 목소리로 물었다.
답을 듣는 대신, 그는 연못에 빠진 이들을 향해 들고 있던 잔을 던졌다. 구경 온 사람의 손에 들려 있던 것도 하나 뺏어 한 번 더 던져 줬다. 단단한 유리잔이 그들의 이마를 때리는 소리가 경쾌했다.
〈아, 손이 미끄러졌네. 도와주려고 했는데.〉
그렇게 됐다며, 아사드는 두 사람에게 사과를 건넸다.
황태자의 육촌 형제들은 그들의 아버지가 헐레벌떡 달려올 때까지 연못 안에서 한참을 허우적대야 했다. 아사드가, 당황한 시종들이 그들을 끄집어내게 두지 않았으니까.
〈쟤네, 전하께서 자기 신부를 애지중지하는 걸 몰랐나 봐.〉
〈세상엔 겪어 봐야 알게 되는 것들이 있지.〉
문란하게 사는 것으론 연못에 빠진 놈들과 별다를 바 없는 쌍둥이들이 은근슬쩍 들러붙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이기도 했다. 여러모로 짜증만 나는 만찬이었다.
작은 소동을 지나며 날이 선 분위기 속에서 모임은 흐지부지 끝을 맺었다.
그 소동의 끝에서, 아사드는 황제 헤세트와 독대하게 됐다. 아사드가 원한 일이었다.
〈황태자비를 숨겨 두시는 이유가 뭡니까?〉
아사드는 무감한 낯을 한 헤세트에게 물었다. 황실의 행사에 황태자비를 부르는 건 황제와 황비의 소관이었으니 말이다.
지금껏 신경 써 본 적 없던 황태자비의 부재가 별안간 마음에 걸렸다. 저와는 어울리지 않는 참견이었다. 그런데도 내뱉은 말을 무를 생각은 들지 않았다.
〈숨겨 둬?〉
〈황실의 모든 일에서 배제당하고 있지 않습니까.〉
제 아들의 말을 들은 황제가 크게 웃었다.
〈그 표정이 꼭, 왜 내 물건을 엄마 마음대로 창고에 옮겨 뒀냐고 화내는 애 같구나. 10살짜리 애.〉
〈…….〉
〈그래. 밖으로 꺼내 준다고 치자. 그럼, 품에 안고 다니기라도 할 거니? 아껴 주며 대접해 줄 건가? 아니지. 그런 척을 할 거냐고 물어야겠군. 아사드 너는, 선황제께 교육을 잘 받았잖니. 사랑은 불에 탈 저주라는 사실을 잘 알지. 네 동생과 다르게 말이야.〉
느긋하게 말이 이어졌다.
〈조금 더 단순하게 생각해 봐. 황태자비가 너의 가장 가까운 곳에 선다면 어떻게 되겠니. 보기 싫어 감춰 둔 줄 알았던 짐이, 사실 황태자의 보물일지도 모른다는 헛소문이 퍼질 거야. 그런 이야기가 네게 도움이 될까? 넌 그 애를…… 황비로 맞을 생각이 없는데.〉
헤세트에게 반쯤 정곡을 찔린 채 아사드는 침묵했다. 아직 온전하지 못한 제 계획을 굳이 어머니에게 알릴 필요는 없었으니까.
도대체 제 어머니가 무슨 속셈인 건지 의뭉스럽기도 했다. 황태자비를 돌려보낼 생각도 행동도 하지 않으면서, 어머니 역시 그 사람을 황비로 만들 마음은 없다는 듯 말하고 있지 않은가.
〈아사드. 나는, 네가 얼굴을 바꾸고 황태자비에게 접근한 걸 알고 있단다. 좋은 뜻으로 다가가진 않았겠지. 내가 너를 위해 사람들에게서 그 애를 숨기듯, 너 역시 너를 위해 그 애를 속이고 있는 게 아니겠니.〉
〈…….〉
〈우리 둘의 마음이 이리 똑같은데, 어찌하여 투정을 부리려 드는지 모르겠구나.〉
헤세트는 손을 뻗어 아사드의 뺨을 다독였다. 남편이 자식들에게 보여 줬던 다정함을 따라 해 본 거였다.
〈네 신부가 불쌍해 보여 그러니? 하긴, 키우는 동물에게도 정이 드는 법이니. 그 상대가 사람이라면 더하겠지.〉
잠시 생각에 잠겼던 헤세트가 곧장 말 한마디를 덧붙였다.
〈아니면, 오메가와 함께 있으니 기분이 좋아?〉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세요.〉
미간을 찌푸린 아사드가 반박했다.
고작 타인의 형질과 페로몬 따위에 몸과 마음이 휘둘리는 자는 진정한 황제가 될 수 없다. 마음에 깊이 새겨진 오래된 가르침이었다. 어머니 역시 저와 같은 교육을 받았으니, 오메가 운운하는 물음은 저를 놀리는 것밖엔 되질 않았다.
〈중심을 잡고 편하게 생각해.〉
〈…….〉
〈엘바의 왕실에서는 희락기를, 그래, 그들 말로는 러트와 히트사이클을 무사히 보내기 위해 알파와 오메가를 고용한다고 하더구나. 사랑하는 사람을 거칠게 대할 수 없어서라는 우스운 핑계를 대면서 말이야. 그 애를 어찌 생각해야 할지 헷갈린다면, 뭐, 희락기를 보내기 위해 고용한 오메가 정도로 생각하렴.〉
그게 헤세트가 남긴 마지막 말이었다.
하. 아문의 모습을 하고, 아사드는 깊은 한숨을 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