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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신부 (16)화 (16/97)

아사드 메케리우스는 뒤를 돌아보며 과거를 곱씹는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오늘 낮에 들었던 육촌 형제들의 헛소리를, 어머니 헤세트의 말을 자꾸 떠올리게 됐다.

그 애를 황비로 맞을 작정도 아니면서 괜한 짓 하지 말라는 어머니의 말이 틀린 건 아니었다. 지금, 시종의 모습으로 케이든과 마주 앉아 있는 상황 역시 케이든이 시끄럽지 않게 황태자비 자리에서 물러나길 바라며 부리는 수작의 일환이니까.

그래도, 이건…….

고개를 숙인 아문이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도대체 무엇 때문인지 모를 반발심이 끓어올라 속이 아플 지경이었다.

“아문.”

바보 같은 남자가 제 가짜 이름을 불렀다. 케이든을 앞에 둔 채로 정신을 놓고 있었다니, 창피한 일이었다.

아사드는 자신이 아문의 모습을 한 상태라는 걸 잘 알면서도 케이든에게 곧장 답을 주지 않았다. 그저 슬쩍 고개만 들어 제게 말을 건 이와 시선을 맞췄다.

“안색이 안 좋아. 들어가서 쉴래?”

퍽 다정한 목소리로 케이든은 물었다. 저를 보는 두 눈에 걱정이 한가득 담겨 있었다.

아사드는 야외 만찬에서 참 많은 눈을 마주했었다. 머리에 똥만 든 멍청이들의 썩은 내 나는 눈깔과 음흉한 속내를 숨겨 둔 자들의 뱀 같은 눈, 씹을 거리만 찾아다니는 이들의 호기심 어린 눈과 적대감이 느껴지는 칼날 같은 눈, 그리고 보석처럼 아름답고 냉엄한 황제의 눈…….

하지만 아사드가 마주한 눈들 속에, 지금 제 앞에 앉은 남자의 것과 같은 눈은 없었다.

자신의 감정을 가감 없이 드러내는 따뜻한 눈. 인간적이라고 해야 할지, 모자란다고 해야 할지 알 수가 없는 눈을 아사드는 보지 못했다.

케이든의 빤한 시선을 마주하고 있자니,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로 마음이 편해졌다. 이유 없이 웃음이 나왔다. 아무래도, 저 남자의 바보 같음이 옮은 모양이었다.

〈그 애를 어찌 생각해야 할지 헷갈린다면, 뭐, 희락기를 보내기 위해 고용한 오메가 정도로 생각하렴.〉

케이든은 페로몬이 느껴지질 않는 이상한 오메가였다. 멀끔한 얼굴을 빼면 매력적인 구석이라곤 손톱만큼도 없었다. 소심해 말도 제대로 못 하는 데다, 하나부터 열까지 모자란 것밖에 없는 한심한 남자였다.

하지만 그래도, 아사드는 케이든을 그런 식으로 취급하고 싶진 않았다. 희락기를 위해 고용한 오메가라니. 그럴 순 없었다.

희락기 같은 거야, 어떻게 해서든 잠재우면 되는 문제가 아니겠는가. 정신이 하나도 없다는 첫 희락기만 무사히 지나면 되겠지.

전장에선 피를 흘리며 사흘 밤낮을 더 버텨야 했다. 고작 이틀간의 희락기를 정신력으로 버텨 내지 못하는 인간이 되고 싶지 않았다.

케이든은 저와 신탁을 우회할 거래를 할 사람이었다. 좋은 대접을 해 줘야 했다. 언젠가 황태자비 자리에서 물러나게 될 그를, 당장의 성욕을 푸는 일에 이용하기도 싫었다. 짐승도 염치가 있으면 그런 짓을 하지 않을 터였다.

‘……내 신부를 다른 사람이 우습게 보는 것도 싫어. 말도 안 되는 일이지.’

그런 생각을 하자니, 정오의 만찬에서 만났던 육촌 형제들의 역한 얼굴이 다시 떠올랐다. 역시. 연못에 내던지는 정도로 끝내선 안 됐다. 마법 덕에 시원해진 곳에서 수영을 한 셈이니 즐겁기만 했을 거다.

혀를 뽑아 버려야 마땅한 일이었다. 하나 그런 잔인한 형벌을 내릴 순 없다. 대신, 이를 뽑는 정도라면 괜찮지 않을까? 아니, 당장 모습을 바꾸고 찾아가서…….

“아문. 안색이 점점 더 안 좋아지는 것 같아.”

케이든의 목소리가 다시 아문을 두드렸다.

“제가…… 넋을 놓고 있었군요. 죄송합니다.”

정신을 차린 아문이 빙그레 웃어 보였다. 케이든의 눈가에 서렸던 걱정과 불안이 조금이나마 옅어지는 게 느껴졌다.

“아냐, 아문 네가 왜 사과를 해.”

“오늘 수업은, 아무래도 이쯤에서 끝내야 할 듯싶습니다.”

“응. 나는 괜찮아.”

제 신부에게서 괜찮다는 말을 뺏으면 어떻게 될까. 아무런 말도 못 하는 건 아닐까? 아사드의 마음속에 유치한 심술이 솟았다.

「선생 노릇은 못 해도 케이든 님의 말벗이 되어 드릴 순 있으니까요. 오늘은 말벗으로서 함께하겠습니다.」

「아냐, 이만 들어가서 쉬어. 내가 마음이 쓰여서 그래.」

“쉬더라도 케이든 님의 곁에서 쉬겠습니다. 이렇게 제국어도 들려 드리면서요.”

새초롬한 얼굴로 아문은 말했다.

침대에 누워도, 책을 펴도, 하다못해 연무장에서 검을 휘두르면서도 같은 생각만 하고 또 하게 될 게 분명했다. 그럴 바엔 지금처럼 케이든을 앞에 두는 편이 나았다. 제 기분을 이상한 모양으로 꼬고 있는 주범을 말이다.

고요는 꽤 평화로운 모습으로 아사드와 케이든 사이에 놓였다. 아사드를 툭, 툭 건드리던 답답증이 조금씩 힘을 잃어 갔다.

“케이든 님은…….”

“…….”

“이렇게, 별궁에서만 시간을 보내는 게 지루하지 않으십니까?”

급작스러운 물음을 받아 든 케이든은 의아하다는 듯 가만히 눈만 깜빡였다. 뭘 해도 빠릿빠릿하게 움직일 것처럼 생겨선, 굼뜬 구석이 있다. 그게 우스우면서도 재미있어 헛웃음이 나왔다.

“왜 그런 걸 묻는지 모르겠어. 난…… 지루하다는 생각 같은 건 해 본 적이 없어. 네가 매일 나를 찾아와 주는데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겠어.”

케이든의 입가에 멋쩍어하는 웃음이 떠올랐다.

“그리고 별궁에서만 시간을 보내는 것도 아냐. 네가 나를 데리고 나가 주잖아. 별궁 밖이 어떤지 보여 주는걸.”

“…….”

“전하께서도 자주 얼굴을 비쳐 주셔. 나는, 정말 지루할 틈이 없어.”

입을 다문 아문과 시선을 맞추며 케이든은 느릿하게 말을 이어 나갔다.

“가끔은 리헤트도 나를 보러 와 줘. 침실을 빠져나가서 함께 정원을 구경하기도 하고, 같이 별궁 이곳저곳을 돌아봐 주기도 해.”

리헤트와 케이든의 사이가 제법 괜찮은 모양이었다. 케이든에게 호감이 있는 리헤트가 허튼 마음을 먹을까 걱정하진 않았다. 아사드가 아닌 아문이 아는 리헤트는, 그저 잘난 얼굴을 구경하는 걸 좋아하는 베타 여자였으니 말이다.

“그 애를 보면 내 친구가 생각나서 좋아.”

“친구요?”

“응. 엠마라는…… 리헤트처럼 밝은 친구야.”

엠마. 아문은 그 이름을 입 안에서 굴려 봤다. 혼인 전에 넘겨받았던 케이든의 인적 사항을 이제야 다시 훑어보다 마주했던 지루한 이름이었다. 그 여자가, 농장에서 쫓겨난 케이든에게 새로운 일자리를 소개해 줬다고 했었다.

“엠마라는 분과는 일터에서 만나셨습니까?”

“응, 18살쯤에.”

“그렇군요.”

짧은 침묵 뒤, 아사드는 다시 입을 열었다. 케이든의 마음을 부드럽게 풀어 줄 왕국어와 함께 느릿하게 말을 끌었다.

「어쩌다…… 두 분이 우정을 나누게 되셨는지 궁금합니다. 일터에서 친구를 만들어 본 경험이 없는지라, 괜한 궁금증이 나네요.」

사실, 친구 얘긴 관심도 없었다. 가장 알고 싶은 건 케이든이 오랜 시간 지냈던 농장에서의 일이었다.

대충 보고 치워 뒀던 자료를 다시 뒤적여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이라고 해도, 특별할 게 없었다. 엘바 외곽에 동떨어져 있는 거대한 농장의 실질적 주인은 케이든이 도련님이라 부르던 쓰레기라는 것. 그 도련님의 부모인 백작 부부가, 케이든을 착취할 땐 언제고 별안간 빚을 없애 줬다는 것. 그리고 쫓아냈다는 것. 그게 다였다.

케이든에게 다짜고짜 옛일을 캐물을 순 없었다. 물어봤자 제대로 된 답을 듣지 못할 테고. 쓸데없는 상처나 주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그러니 일단은, 주변 이야기 먼저 차근히 들어 보는 것도 좋겠지.

“어쩌다 보니 친해졌어. 그게, 나 혼자…….”

“…….”

「나 혼자 다니는 게 불쌍해 보였는지 그 애가 몰래 말을 걸어 줬거든. 나보다 먼저 일을 그만둘 때까지 계속 친하게 지내 줬어.」

「혼자 다니셨습니까?」

「다들 날 싫어해서…….」

아문의 물음에 반쪽짜리 답을 내놓은 케이든이 멋쩍게 웃어 보였다.

다들 날 싫어해서. 의아하기 그지없는 소리였다.

저 남자가 바보 같긴 했다. 하지만 어디 가서 미움을 살 만한 성격은 아니었다. 농장 주인인지 관리인인지의 인성을 빼닮은 것들이 한데 모여서, 순진하고 착한 사람 하나를 따돌린 게 분명했다.

“저, 그런데 아문…….”

“네. 말씀하세요.”

긴히 할 말이 있는 사람처럼 조심히 아문을 부르긴 했지만, 케이든은 쉽게 말을 이어 나가질 못했다. 온전한 말을 꺼내길 망설이는 듯 보였다.

“아냐. 다음에 말할게.”

“알겠습니다.”

민망해하는 케이든에게 아문은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어차피 매일 보는 사이가 아닌가. 말 한마디 더 듣겠다고 사람을 닦달할 필욘 없었다. 말이야, 하고 싶을 때 하는 게 제일이니까.

“……왜 말을 하다 말지 싶어서 짜증 나지 않아?”

“다음에 말씀해 주신다고 했으니까요. 그때 들으면 됩니다.”

“고마워.”

얼떨떨한 얼굴을 한 케이든의 메마른 손이 흉터가 남은 뺨 아래를 쓸었다. 저 이상한 버릇을 보는 것도 이제는 제법 익숙해졌다.

‘저 손에 흉터가 많다는 사실도 알게 됐고.’

신부의 손에는 오래된 자상이며 화상 따위의 자잘한 흉터가 많았다. 일을 하다 얻은 상흔들이 대다수일 거다.

하지만 그 사이사이엔 사람이 사람에게 낸 것이 분명한 상처가 숨어 있었다. 어떤 의도가 느껴지는 똑같은 모양의 흉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따돌림을 당했던 것과 연관이 있는 걸까.’

뭐…… 제가 알 바는 아니었다. 그게 저와 무슨 상관인가 싶었다. 날이 더워서 그런가. 꼭 불길을 맞닥뜨린 사람처럼 숨이 거칠어지는 게 짜증 날 따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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