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름다운 신부 (17)화 (17/97)

「황태자 전하를 따라 엘바 동부에 있는 농장에 간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아문은 말을 돌리기로 했다. 잠시 모습을 보였던 화제를 다시 끌고 왔다.

「농장 외부에 일꾼들의 숙소를 모아 작은 마을을 만들어 둔 구조가 아니라, 여느 대저택 못지않게 큰 별장 뒤편에 일꾼들의 숙소가 딸린 곳이었어요. 그 별장 후원에서 벌이던 파티가 참 시끄러웠습니다.」

「내가 일했던 곳도 그랬어. 주인어른의 별장에서 파티도 많이 열렸고…….」

「제국의 연회에도 금세 익숙해지시겠군요.」

아문은 말했다. 다분히 의도적으로, 조금쯤은 충동적으로 내뱉은 소리였다.

아무리 이름뿐인 황태자비라고 한들, 케이든을 언제까지고 별궁에만 처박아 둘 순 없었다. 아사드는 케이든을 여기저기로 끌고 다닐 생각이었다. 적어도 남들한테 무시당하지 않을 정도로는 얼굴을 보여 주려 했다.

황제는 자신의 시간을 뺏는 이들을, 치근대는 인간들을 극도로 싫어했다. 그건, 상대가 가족이어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찾아가 귀찮게 굴면 네 마음대로 하라며 케이든의 일에서 대강 손을 뗄 거다.

그래도 안 된다면? 제가 따로 연회를 열면 됐다. 만찬이고 모임이고 상관없이 뭐든 열고 또 열 작정이었다.

아사드는 제 선택이 멍청하다는 걸 알았다. 고개를 저을 만한 결론을 냈다는 것도 알았다. 그런데 어쩌겠는가. 그러고 싶은 것을.

하지만 케이든의 반응이 영 떨떠름했다. 갑갑하던 머릿속이 밝아져 기분이 좋아진 저와는 달랐다.

“아니야.”

“…….”

“익숙해지긴커녕, 아니, 난 그런 곳엔 못 가.”

「이제 가셔야 합니다.」

“안 돼.”

「왜요?」

「황태자님이 창피해하실 일은 만들면 안 되니까. 그리고 아문 너도, 다른 사람들한테 그런 소리 하지 마. 그러다 혼나게 되면 어떡해.」

「대체 누가, 저를 혼내겠습니까.」

케이든은 정말 걱정이 많은 남자였다. 제가 남을 혼내면 혼냈지, 남에게 혼날 일이 뭐가 있겠는가. 황태자비가 연회에 참석할 거란 소리를 듣고 투덜대는 놈이 있다면, 그 용기를 기특히 여겨 사막 한가운데에 매장해 주리라.

「예전에, 농장에서 일할 때…… 잠깐, 파티가 열린 홀에 들어간 적이 있었어. 접대원 노릇을 할 남자가 부족하다고 해서.」

망설이던 케이든이 입 안을 맴돌던 말을 꺼내 놨다. 과거의 기억을 더듬는 그의 낯빛이 창백했다.

「오래 머무른 것도 아니었는데, 정말 잠깐이었는데…… 나한테 손님 상대하는 일을 시켰다고, 집사님이 도련님께 정말 크게 혼나셨어. 다들 놀랄 정도로…….」

순간, 아문은 그가 하려던 말을 잊었다. 편히 턱을 괴고 있던 자세 역시 흐트러진 지 오래였다.

「그게 왜 혼날 일이 되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제 왕국어 실력이 부족해 제대로 알아듣질 못한 건가요?」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했다. 그 당시를 회상하는 것만으로 우울해진 케이든의 얼굴만 봐도 그랬다. 저 남자는 도대체 어떤 세상에서 살다 온 거란 말인가.

「접대원 일은 보통 잘생기고 예쁜 친구들이 하잖아. 그런데 그런 역할을 나 같은 것한테 맡겼으니…… 주최자의 격을 떨어트렸다고 생각하신 거 아닐까.」

어색하게나마 웃으며 케이든은 말을 이어 갔다.

「그다음부턴, 파티나 무도회가 있는 날엔 방에 숨어 있어야 했어.」

「방에 숨었다고요?」

「……응.」

「설마, 사람들한테 얼굴 내보이지 말라고 그런 겁니까?」

흥분한 아문의 물음에 케이든은 입을 열지 않았다. 대신 고개만 끄덕였다. 곧, 민망함이 케이든의 귀 끝을 붉게 물들였다.

당혹스러웠다. 어디서 너 같은 게 사람들 앞에 얼굴을 들이미냐고, 도련님이란 작자가 정말 난동이라도 떨었다는 소린가? 케이든이 건넨 이야기가 말도 안 되게만 느껴졌다.

케이든과의 대화가 이어질수록 아문의 머릿속은 출구 없는 미궁처럼 변해 갔다.

이상하단 생각밖엔 나질 않았다.

주최자의 격? 제 신부의 얼굴은 파티의 격을 올리면 올렸지, 떨어트릴 얼굴이 아니었다. 그걸 왜 숨겨 둔단 말인가.

얼굴로 격을 운운한다면, 당장 이 헬리오의 황족들 대부분이 가면을 써야 했다. 제국의 격을 떨어트리지 않게 말이다. 제 신부가 살던 저 북부 엘바의 왕족이며 귀족들도 마찬가지였다.

「본인이 못생겼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문은 케이든에게 물었다.

대놓고 던진 질문은 한낱 시종이 모시는 황태자비에게 건네기엔 다소 부적절한 내용이었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뭐 어쩌겠는가, 내가 사실 저 남자의 배우자인데.

케이든의 두 뺨이 그의 귀처럼 붉게 달아올랐다. 짜증이나 분노가 아니라 창피함 때문이었다.

슬그머니 시선을 내린 케이든은 다시,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문 같은 어린 애새끼한테 놀림을 당해도 어쩔 수 없다는 듯 고분고분한 얼굴이었다.

「거울도 안 보고 사십니까?」

아문은 물었다.

“거울을 안 보고 사세요?”

그리고 언어를 바꿔 같은 물음을 한 번 더 건넸다. 속이 답답해서 자꾸만 말을 토해 내게 됐다.

“보는데…….”

싱거운 답이 돌아왔다.

아문은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답답함을 느꼈다. 이런 답답함을 느껴 본 건 태어나 처음이었다.

사방이 벽에 가로막혀도 이런 기분은 안 들겠다 싶었다. 벽이라면 부숴 버릴 수라도 있지, 저건……. 아문의 낯으로 아사드는 괴로워했다.

의아한 건 케이든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문의 물음이 품은 진짜 뜻을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헬리오에서, 케이든은 좋으나 싫으나 매일 거울을 봐야 했다. 거울에 비친 비루한 남자와 어쩔 수 없이 눈을 마주쳤다. 오른뺨 아래에, 목과 어깨 위에 남아 있는 붉은 흉터를 꾸역꾸역 확인하게 됐다.

“케이든 님께선…….”

말을 흐렸던 아문은 케이든이 저를 올려다보길 기다렸다. 그와 제 시선이 맞은 걸 확인한 후에야 다시 입을 열었다.

“잘생기셨습니다.”

그 말 한 마디가 침묵을 가져왔다. 아주 긴 침묵이었다.

「잘생기셨다고요.」

조급해진 아문은 다시 한번 말을 꺼냈다. 왕국어를 써서였다.

눈을 크게 떴던 케이든이 슬그머니 손을 들어 그의 얼굴을 가렸다. 웃음이 터져서였다. 그것만으로는 소용이 없어 고개를 아래로 푹 내릴 수밖에 없었다.

「왜, 왜 그렇게 웃으십니까.」

웃음을 참느라 애쓰는 케이든을 향해 아문은 외쳤다. 당황해 말을 더듬기까지 했다.

“미안해.”

다시 웃음이 크게 터질까, 차마 아문과 눈을 맞추지는 못하고 케이든은 말을 이었다.

“아문 네가, 얼굴이 새빨개져선 잘생겼다고 하는데…… 그게 너무 애쓰는 것처럼 보여서…….”

“…….”

“그, 그래도 네가 거짓말을 했다고 생각하진 않아. 정말이야.”

케이든이 황급히 말을 더했다.

“거짓말이라고 생각하시는 거 다 보입니다.”

순식간에 불퉁해진 아문이 중얼거렸다. 아니, 도대체 어떻게 살아왔길래 사람 말을 귓전으로도 듣질 않고 믿지도 않지? 자꾸 속으로 투덜거리게 됐다.

“리헤트에게도 물어보세요. 분명, 저와 똑같은 답을 내놓을 겁니다.”

기다렸다는 듯이 줄줄 찬사를 읊을걸. 그런 리헤트를 앞에 두고선 어떤 얼굴을 할지 보자고. 아문은 속으로 이를 갈았다.

“아냐. 아문 네가 날 좋게 생각해 주는 거, 정말 잘 알고 있어. 웃어서 미안해. 괜히 놀렸다.”

토라진 게 분명해 보이는 아문에게 케이든은 사과를 건넸다. 자상한 미소가 함께였다.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 올린 게 아니라, 자연스레 지어 보인 웃음이었다.

“제 마음을 어떻게 아십니까? 제 말도 믿지 않으시는 분이.”

“아문 네 눈빛만 봐도 알지.”

케이든과 마주 앉은 아문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계속 툴툴댈 것만 같았던 입술은 미약하게나마 호선을 그렸다. 눈빛을 보면 알아? 저는 평생 입에도 담지 않을 낯간지러운 소리를 잘도 내놓는구나 싶었다.

「전하께선, 연회니 만찬 따위에 홀로 참석하는 게 부끄러우신 모양이십니다. 떠들썩하게 혼인식을 올린 분이 반려자 없이 홀로 연회에 발을 들이다니. 창피할 수밖에 없죠.」

어쩔 수 없다는 듯 삐죽 웃어 보인 아문이 말을 이어 나갔다.

「피마의 사령관이자 황태자 전하의 외삼촌 되시는 자한 님께선 1년에 두 번, 딱 보름씩을 수도인 아크에 머물다 가십니다. 아마…… 그때 열리는 연회가 케이든 님께서 처음 참석하시는 연회가 될 겁니다.」

“…….”

「2개월가량이 남았네요. 마음의 준비를 하실 시간은 충분합니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아문이 곧장 덧붙였다.

「우리 헬리오 사람들은 엘바의 귀족들처럼 괴상한 춤 같은 건 추지 않으니, 춤을 배울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하지만 내가 연회에 참석하면…….」

「저 개인의 의견을 말씀드린 게 아니라, 황태자 전하의 뜻을 전해 드린 겁니다.」

아문은 강조해 말했다. 웃고 있을 땐 언제고 금세 얼굴이 어두워진 케이든을 보니 확실히 해 둬야 할 것 같았다. 황태자비라는 자가 저렇게 자신감이 없어서야. 여전히 갈 길이 멀었다.

「많은 걸 새로이 경험하실 겁니다. 궁 안팎에서 열리는 연회만이 아니라, 쓸데없는 모임들과 만찬회, 온갖 축제들…….」

안색이 나빠진 케이든을 위해 아문은 대충 말을 줄였다. 저러다 기절이라도 할까 걱정돼서 그랬다.

「걱정되십니까?」

「……아문. 나는 자신이 없어.」

「…….」

「사람들이랑 말 한마디도 제대로 나누지 못할 거야. 내가, 전하를 화나게 할 게 분명해.」

우물쭈물하던 케이든이 솔직한 마음을 드러냈다.

「제국어 같은 건 못하셔도 상관없습니다. 황태자 전하께서 제국어를 잘하시니까요. 그분만 믿으세요.」

「제국어 문제가 아닌 거 알면서.」

정말이지, 제 신부는 모든 게 어설프기만 했다. 그를 알면 알수록 더욱 그렇게 느껴졌다. 나이를 어떻게 먹은 건가 싶었다.

그나마도 마음이 넓은 제 옆에 와서 다행이었다. 도련님이란 미친 작자와 다를 바 없는 괴물 같은 놈과 혼인을 치렀으면 어쩔 뻔했는가. 타라 신이 저 남자를 살렸다고 봐도 무방했다.

「제가 일전에 말씀드렸던 걸 생각해 보세요. 케이든 님은 황태자 전하의 하나뿐인 반려이십니다. 여기 헬리오엔 케이든 님을 업신여길 사람도, 우습게 여길 사람도 없어요.」

손을 뻗은 아문이 테이블 위에 올라와 있던 케이든의 손등 위에 제 손을 얹었다.

「전하께서.」

갑작스러운 접촉에 놀라 뒤로 빠지려는 손을 단단히 붙들고, 아문은 말을 이어 갔다.

“전하께서 케이든 님을 지켜 주실 겁니다.”

“…….”

“감히, 그 누구도, 당신을 함부로 대할 수 없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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