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짜 허가를 받아 해치를 지나는 마음 편한 선택지도 있지만…… 운이 나빠 일이 꼬이면 저보단 케이든 님이 곤란해지실 테니, 아는 사람이 몇 없는 비밀 통로를 이용했습니다.〉
케이든의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매만져 주며 아문은 말을 이었었다.
〈저도 비밀 통로를 자주 쓰진 않습니다. 어두운 길을 오가며 범법 행위를 저지르지도 않고요. 그저 남들보단 조금 익숙한 정돕니다.〉
남들은 그런 공간의 존재조차 모를 것 같은데. 차마 그런 말은 하지 못하고 케이든은 아문에게 고개만 끄덕여 줬었다.
“아문, 너는 모험가 같아. 아니다. 이미 모험가지.”
아문을 따라 걸음을 옮기며 케이든은 입을 열었다. 두 밤이 지나면 사라질 신기루 같은 곳에 오기 위해 길을 헤맬 때 하지 못했던 말을 늦게나마 건넨 거였다.
“……이제 아셨습니까.”
그렇게 말하는 아문의 입가에 솔직한 웃음이 묻어나 있었다. 조금은 우쭐대는 것 같기도 했다.
아문은 귀엽다. 케이든은 속으로 또 생각했다. 귀여움받고 싶어 하지 않을 아문에겐 비밀이었다.
케이든은 별천지처럼 느껴지는 시장의 풍경을 바쁘게 눈에 담았다. 내벽과 외벽 사이를 채우고 있는 민가를 구경할 때도 즐거웠지만, 이 활기 넘치는 거대한 시장을 앞에 두고는 심장이 떨렸다. 동네 번화가에 서는 작은 시장도 제대로 구경해 본 적 없던 남자가 제국의 수도에 선 거대한 시장의 모든 것에 시선을 뺏기는 일은 당연했다.
「길 잃기 싫으면 더 꽉 잡으세요.」
저를 붙든 아문의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응. 짧게 답한 케이든도 그런 아문의 손을 더 단단히 붙잡았다.
아문 역시 아사드처럼 손이 뜨거웠다. 두 사람이, 외모나 분위기만 닮은 게 아닌 모양이었다.
총천연색의 천들이 향신료 내음을 품은 바람을 맞아 춤을 추듯 몸을 꼬고, 호객꾼들이 연주하는 악기 소리가 무용수를 위한 악사의 노래처럼 변해 흔들리는 천 사이로 퍼져 나갔다.
그 이국적인 풍경 속에서, 케이든은 문득 보석이며 장신구 따위를 파는 가판대에 눈길을 줬다. 정확히는, 서로에게 사랑의 말을 속삭이고 있는 연인들에게 시선을 뺏긴 거였다.
사람이 많은 시장이었다. 길 위에 선 연인을 보는 게 특별할 일은 아녔다. 하지만 팔찌며 목걸이 따위를 서로에게 대어 보는 두 연인의 모습이 유독 케이든의 눈길을 끌었다.
평범한 차림새의 남자들은 케이든의 머릿속에 아로새겨진 이상적인 연인의 모습을 닮아 있었다. 언제나와 같은 일상을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특별히 보내는 중인 연인들은, 형형색색의 화려한 풍경 속에서도 그들만의 아름다움으로 반짝였다. 그들의 입가에 머무는 웃음이 따뜻하게 느껴졌다.
“뭘 그리 보십니까?”
걸음을 멈춰 세우기까지 하며 아문은 케이든에게 물었다. 그의 시선 역시 금세 케이든이 바라보던 가판에 닿았다. 남자 하나가 제 애인의 손목에 팔찌를 대어 보는 모습이 아문의 눈에 들어왔다.
“그냥……. 헬리오 사람들은 장신구를 많이들 좋아하는 것 같아서. 그게 신기하네.”
케이든은 황급히 말을 둘러댔다. 사랑을 속삭이는 연인들을 봤다고 실토하고 싶지 않았다. 얼마나 음흉해 보이겠는가. 아문에게 이상한 사람으로 여겨지기는 싫었다.
가만히 선 아문의 손을 잡아끈 케이든이 먼저 걸음을 옮겼다. 아문은 앞을 향해 가는 케이든의 뒤를 순순히 따라 줬다. 케이든의 빈 손목에 시선이 붙박인 채였다.
케이든이 다시 아문과 말을 섞게 된 건, 약간의 시간이 더 흐른 뒤였다.
그림이나 조각 따위의 예술품만을 취급하는 상단이 늘어선 새로운 구역의 초입이 등장했다.
그 앞에 가판도 세워 두지 않은 상태로 닫혀 있는 빈 천막 옆에서, 아문은 걸음을 멈췄다. 케이든을 천막 앞에 세웠다.
「예술품을 취급하는 상단은 호위를 많이 씁니다. 이 시장에서 가장 안전한 장소를 굳이 꼽아 본다면, 아마 예술품 구역이 될 거예요. 케이든 님이 서 계신 곳이죠.」
겉옷을 뒤져 무언가를 꺼낸 아문이 그것을 케이든의 손에 쥐여 줬다. 안이 비칠 정도로 얇고 투명한 천으로 만들어진 주머니 안에 자그마한 사탕이 한가득 들어 있었다. 색이 다른 사탕들이 한데 모여 내뿜는 단내가 코를 간질였다.
「잠시만 자리를 비우겠습니다. 금방 돌아올 테니까, 여기서 기다리고 계세요. 심심할 때 사탕이나 꺼내 드시면서요.」
“……알았어.”
케이든은 아문에게 한발 늦은 답을 내놨다.
「여기에 케이든 님만 남겨 두고 혼자 가 버릴 일은 없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10분, 아니, 5분만 기다리시면 됩니다.」
제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한 아문의 말이 괜히 민망하게 느껴졌다. 입을 다문 케이든은 떠나려는 이를 향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잠시 미간을 찌푸렸던 아문이 결심했다는 듯 케이든에게서 등을 돌렸다.
홀로 남은 케이든은 아문이 천막 근처에 있던 몸집이 큰 남자와 말을 나누는 것을, 급한 걸음을 걸어 길을 되돌아가는 것을 한참이나 바라봤다. 아문의 뒷모습이 인파 속에 파묻혀 더는 보이지 않게 될 때까지.
케이든은 고개를 내려 자신의 손에 들린 사탕 주머니를 봤다. 하얗고 붉은, 파랗고 노란 사탕들은 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서로 엉겨 붙지도 녹지도 않고 원래의 예쁜 모양을 유지하고 있었다.
「어린애가…… 애들이 먹는 걸 들고 다니네.」
케이든은 중얼거렸다. 이 또한 아문이 들으면 땅에서 발이 떨어질 정도로 흥분할 소리였다. 자존심이 상해서 말이다.
‘아문의 간식을 뺏어 먹을 순 없지.’
빙그레 미소 지은 케이든은 냄새까지 달콤한 사탕 주머니를 조심히 제 허리춤에 매달았다. 아문의 말처럼 얌전히 자리를 지키고 서서 그를 기다리기로 했다.
예술품 구역은 고가의 물건을 다루는 상단이 많아서인지 옷감과 장신구가 널려 있던 이전 구역처럼 활기차고 떠들썩한 느낌은 없었다. 마주 본 천막 사이의 길을 지나는 사람이 아주 많았음에도 그랬다.
하나 그저 고요하지만은 않았다. 차분한 분위기가 퍼진 길 위에도 약간의 수선스러움이 섞이기 시작했다. 아문이 케이든에게 약속한 5분여가 막 지났을 때였다.
급작스러운 소란이 사람들의 눈과 귀를 잡아끌었다. 가만히 서서 아문을 기다리던 케이든 역시 다른 이들을 따라 시선을 돌려 봤다.
자리 두 개를 독차지하고 있는 상단의 넓은 천막 아래에 모인 남자들 쪽으로 케이든의 눈길이 닿았다. 그들이 차분한 고요 속에 떨어진 작은 소란의 주인공인 모양이었다.
막 천막 안에 들어선 눈치인 젊은 남자들은 상단의 주인과 친근한 관계인 듯싶었다. 큰 목소리로 떠들며 포옹을 하는 모습이 어색하지 않았다.
남자들은 여름을 나는 엘바의 귀족들처럼 보였다. 차림새만이 아니라 외모 역시 그랬다. 익숙한 차림새를 한 남자들의 외관을, 케이든은 무심코 살폈다. 고작 몇 개월을 사막에서 지냈다고, 벌써 북부의 옷차림이 어색하게 느껴졌다.
그렇다고 모르는 사람들을 빤히 보면 안 되지. 머쓱해진 케이든은 남자들에게서 황급히 시선을 떼려 했다.
“…….”
하지만 별안간 몸이 굳어 버렸다.
저기, 남자들 사이에…… 제가 아는 사람이 있었다. 시선을 끄는 예쁜 얼굴을 가진 서먼 백작가의 도련님. 알렉스 쿠퍼. 그새 더 자란 키를 빼면 1년 전과 다를 바 없는 모습을 한 남자가.
입을 다문 케이든이 뒤로 걸음을 물렀다. 그러다 누군가와 부딪친 듯해 황급히 사과를 건넸다. 하나 저와 부딪친 상대방의 표정이 어떤지, 그 사람이 뭐라고 하는지는 볼 수도 들을 수도 없었다.
누군가 주위의 풍경을 손에 쥐고 구겨 버리기라도 한 것처럼 케이든의 시야가 엉망이 됐다. 그런데도, 저기, 저 앞에 있는 남자만은 너무나 선명하게 보였다.
그리고.
“아…….”
케이든은 탄식했다.
알렉스와 눈이 마주쳤다. 케이든이 알렉스를 발견했듯 알렉스 역시 케이든을 발견해 버렸다.
남자가, 자신이 모셨던 도련님이 제 존재를 알아챘음을 케이든은 금세 깨달았다. 알렉스의 눈동자 속에 제가 담겨 버렸다는 걸 느꼈다.
알렉스는 케이든을 향해 완전히 몸을 틀었다.
「……케이든!」
이름을 불렀다.
케이든은 돌처럼 굳어 버린 다리에 힘을 줬다. 도망쳐야 했다.
최대한 멀리 도망가야 한다는 생각이, 새하얗게 변했던 케이든의 머릿속을 순식간에 메웠다. 다른 생각이 비집고 들어올 구석 따윈 없었다.
뒤를 돈 케이든은 뛰기 시작했다.
목적지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았다. 그는 오직 앞만 보고 뛰었다. 부딪친 사람들에게 이전처럼 짧은 사과 한마디조차 건네지 못했다.
아문이 기다리고 있으라고 했는데. 조금만 기다리라고 했는데. 속으로 몇 번이고 반복해 생각하면서도 뜀박질을 멈출 수가 없었다.
케이든의 다리를 움직이게 하는 건, 과거의 기억이었다. 케이든이 가진 공포가 그를 달아나게 했다.
뒤를 돌아봤던 케이든은 그를 쫓던 남자가 인파에 가로막힌 틈을 타 몸을 낮췄다. 몸을 옹송그리고 바닥을 기다시피 하며 몸을 움직였다. 사람들에게 치이고 밟히며 흙먼지를 뒤집어썼다.
숨을 참은 케이든은 주인이 없어 덮개를 내려 둔 빈 천막 안으로 숨어들었다. 손으로 땅을 짚고 개처럼 걸어 가장 구석진 어둠 속에 자신의 몸을 던졌다.
벌레같이 몸을 굽히고 앉아, 케이든은 천막의 입구를 쏘아봤다. 그는 생채기가 난 손을 들어 제 입을 틀어막았다. 천막 밖으로 숨소리가 새어 나갈까 봐 무서워 손이 벌벌 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