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스가 이름을 불렀는데, 도망쳤다. 이름을 불렀는데, 답을 하지 않고 도망쳐 버렸다.
……그러면 안 됐던 걸까?
큰일이 날 거다. 이제 일도 안 하니까, 온몸의 뼈가 다 부러질 때까지 맞지 않을까? 아니, 아니지. 부러지는 정도가 아닐 거다. 분명, 지하에 가둬 놓고 내보내 주지 않을 거다.
케이든의 머릿속을 가득 메우던 생각들이 서서히 색을 잃기 시작했다. 후회를 손아귀에 쥔 두려움이 케이든을 흔들었다.
〈케이든. 아버지가 죽으면, 너는 다시 내 것이 될 거야. 그때야말로…… 내가, 네 진짜 주인이 되는 거지.〉
시간이 흘러 흐릿해진 목소리가 귓전을 맴돌았다.
무서웠다. 서먼 백작이 저를 내보내며 빚을 다 없애 줬는데도, 그걸 잊지 않았는데도, 평생 갚아 내지 못할 빚이 남은 사람처럼 겁을 먹게 됐다.
저를 가려 줄 어둠 속에 몸을 욱여넣으며, 케이든은 벌벌 떨었다. 눈을 감아도 아른거리는 남자의 낯이 두려워 두 손에 얼굴을 묻어 버렸다.
밤보다 까만 세상이, 금세 케이든을 에워쌌다.
* * *
닫힌 천막 너머로 짙은 주홍빛이 아른거리기 시작했다. 노을의 색이었다.
어둠 속으로 도피했던 케이든을 깨운 건, 천막 입구에 길게 늘어진 천 너머로 설핏 보이는 누군가의 인영이었다.
자신을 찾아온 그림자의 주인이 누군지 케이든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아문…….”
빛을 바라보기 위해 눈을 깜빡이던 케이든은 그도 모르게 아문의 이름을 불러 봤다. 고작 이름 하나를 입에 담았을 뿐인데, 그를 들쑤시던 두려움이 순식간에 부서져 그림자 너머로 흩어졌다.
케이든은 아문이 자신을 찾아와 줬다는 사실만으로도 이루 말할 수 없는 안도를 느꼈다.
아문이 제 안도를 안다면 기분 나빠할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에게 전 그저 고용주가 떠맡긴, 조금 더 신경 써 줘야 하는 짐 정도일 테니까. 하지만 케이든에게 있어 아문은, 단순한 시종이 아니었다. 친구였다. 지금 이곳에서…… 제 편을 들어 줄 유일한 사람이었다.
바닥까지 내려와 있던 덮개를 반쯤 걷은 아문이 몸을 숙여 천막 안으로 들어섰다. 땀에 젖은 아문의 뒤로 노을 진 시장의 풍경이 반쯤 모습을 내보였다간 순식간에 사라졌다. 아문이 걷었던 천막 덮개를 내린 탓이었다.
주인 없는 천막 안엔 다시금 어둠이 내려앉았다.
어둠을 닮은 고요 속에서 아문은 숨을 몰아쉬었다. 한동안 호흡하는 걸 잊었던 사람처럼 거칠게 숨을 토해 냈다. 하지만 금세 천막 구석에 몸을 숨기고 있는 제 신부에게로, 어쩔 줄 몰라 하고 있는 남자에게로 걸음을 옮겼다.
아문은 케이든의 앞에 말없이 주저앉았다. 끝없이 이어질 것만 같은 적막이, 맞닿은 시선 사이를 맴돌았다.
“케이든 님을 두고 완전히 자리를 비우기 전에…… 근처 상단을 지키고 있던 남자에게 가 돈을 쥐여 줬습니다. 케이든 님을, 당신을 지켜보라고 했어요.”
“…….”
“도움이 필요한 것처럼 보이면 가서 돕고, 이상한 시비에 휘말린다면 시비를 건 놈의 얼굴을 바닥에 갈아 버리라고 말했습니다.”
제가 언제 가쁜 숨을 내쉬었냐는 듯 침착해진 모습으로 아문은 말했다.
“그런데…….”
“…….”
「돈을 준 보람도 없게 됐죠. 그 사람은 케이든 님을 돕지도 쫓지도 않았어요. 그저 멍청히 서서는, 돌아온 제게 네 애인이 갑자기 사라졌다는 말이나 하더군요. 네가 싫어서 떠난 것 아니냐는 개 같은 소리를 지껄이기에 멱살을 잡고 흔들어 보니, 케이든 님이 뭔가를 보고 도망쳤다고 솔직히 고백했어요. 사람이 많아 쫓아가기 힘들었다는 변명과 함께였습니다.」
“…….”
「……케이든 님. 제가 없는 사이에, 곤란한 일을 겪으셨습니까?」
아문의 물음에 케이든은 고개를 저었다.
차마 입 밖으로 말이 나가질 않았다. 저 때문에 고생했을 아문에게 케이든은 무거운 미안함을 느꼈다.
그러나 끝내, 아문에게 진실을 전하진 못했다.
순전히 제 착각이었을지도 모를 마주침을 숨기며 자신이 품은 두려움도 함께 숨기려 했다. 케이든이라는 사람이 지나온 10년에 가까운 시간이 고스란히 담긴 두려움을 감추려 들었다.
아문은 아무것도 모를 것이다. 제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있다면, 저를 이렇게 걱정해줄 리 없으니까. 확실했다.
“미안해, 아문. 네 사탕을 잃어버렸어.”
케이든은 아문에게 자신의 잘못을 전했다. 바보처럼 도망을 치다 아문의 것을 잃어버렸다는 걸 알렸다. 그가 시장의 예술품 구역에서 겪은 일을 말하는 대신이었다.
케이든은 제 추접스러운 과거를 수면에 올리고 싶지 않았다. 아문이 조금도 알게 하고 싶지 않았다.
“사탕을 잃어버린 것보다, 절 잃어버린 게 더 큰일이라고 생각하는데요.”
아문을 똑바로 마주 보기 힘들었다. 저보다 어린 그에게 도움을 바라고 말까 봐 케이든은 겁이 났다. 말도 안 될 일이었다.
“정말 미안해.”
“…….”
“말도 없이 사라져서는 이런 데 숨어 있기나 하고……. 한심하게 굴어서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창백해진 낯으로 케이든은 아문의 눈치를 살폈다.
괜한 말썽을 부려 아문이 땀을 뻘뻘 흘리게 만든 것부터가 문제였다. 제가 사라진다면 가장 곤란해질 사람은 아문이었다. 그런 당연한 사실 하나 생각하지 못하고 멋대로 자리를 비워 버린 자신이 진심으로 한심하게 느껴졌다.
케이든의 말이 더듬더듬 이어졌다.
“곤란한 일은 없었어. 그냥, 내가 바보같이 군 거야. 네가 그 자리에 있으라고 당부해 줬는데 그걸 무시한 거잖아. 사람들한테 휩쓸려서 길을 잃어버렸어.”
어린애도 믿지 않을 거짓말이었다. 상단의 호위가 전했다는 이야기와도 거리가 멀었다. 하지만 지금의 케이든에겐 최선일 거짓말이었다.
“천막 안에 몸을 숨기신 이유는요?”
“길 잃은 것도 정신이 없는데…… 사람이 너무 많으니까 당황스러워서. 머리가 어지러워져서 잠깐 몸을 피한 것뿐이야. 괜찮아지면 금방 나가려고 했어.”
케이든은 억지로 웃어 보였다.
별안간 당혹스러운 일을 겪은 아문도, 아문의 보고를 전해 들을 아사드도, 이해할 수 없는 짓을 저지른 저를 더 한심하게 보겠지. 그래도 저를 역겹게 여기는 것보단 한심하게 여기는 편이 나았다.
“저기요, 안에 사람 있어요? 거기 있으면 안 되는데.”
내려 둔 천막 덮개를 툭툭 치며 누군가 말을 던졌다. 금방이라도 덮개를 걷어 올릴 듯이 몸을 굽히면서였다.
역시. 들어오면 안 되는 곳이었구나. 놀란 케이든이 급히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하지만 그가 몸을 일으키는 것보다 아문이 자리를 박차고 나간 게 먼저였다.
입구로 간 아문은 아래로 내려 둔 천막의 덮개를 걷었다. 그리고 바깥에 있던 남자를 향해 곧장 말을 던졌다.
“꺼져.”
그게 다였다.
말을 잃은 남자를 뒤로하고 아문은 다시 덮개를 내렸다. 아문이 케이든을 향해 저벅저벅 걸음을 옮기는 것과 동시에 남자 역시 자리를 떴다. 떠나는 남자가 내뱉은 욕설이 어두운 천막 안으로 흘러들어 왔다.
남자의 말이 맞았다. 당장 이곳에서 나가야 했다. 속으론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케이든은 아문이 제 앞에 털썩 앉는 모습을 말없이 바라봤다. 아직 밖을 나서는 게 무서워 그랬다.
「왜 제게 거짓말을 하시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무릎을 세우고 앉은 아문이 말했다. 천막에 몸을 숨긴 케이든이 내뱉은 모든 말을 그는 거짓말이라고 단언했다. 확신에 차 있는 아문에게 케이든은 변명을 더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아랫사람 된 도리로 일단은 모른 척 넘어가 드리는 수밖에요.」
말을 마친 아문은 케이든을 빤히 바라봤다. 그러다 자신의 짧은 머리칼을 신경질적으로 쓸어 보기도, 손바닥 위에 얼굴을 파묻어 보기도 했다. 무언가를 말하려다가 그대로 입을 다물기도 여러 번이었다. 케이든이 다시 미안하다 사과를 건네자 눈을 질끈 감으며 화를 삭이기도 했다.
“케이든 님은…… 어렵습니다.”
“…….”
“너무 어려운 사람이에요. 어렵다는 말을 입에 담게 될 줄은 몰랐는데, 이런 날이 오네요.”
아문의 입가에 가벼운 웃음이 걸렸다. 어딘가 허탈함이 느껴지는 웃음이었다. 긴장이 풀어진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앞으로 어떤 문제를 맞닥뜨리건, 그게 케이든 님보단 쉽게 느껴질 것 같습니다. 남은 평생이요.”
저를 찾느라 고생했을 게 분명한 아문에게 다시금 미안함을 느끼면서도, 케이든은 속없이 아문을 따라 웃었다. 웃어야 덜 맞는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깊숙이 새겨져 있기에 나온, 반사적인 행동이었다.
그래도 아문의 기분이 조금이나마 누그러진 눈치였다. 천막 밖에 있던 사람에게 차갑게 화를 냈던 것처럼 제게 그러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와중에도 그런 생각을 했다. 한심하게.
다시, 침묵이 찾아왔다.
아문과 함께 있다는 사실이 주는 안도와 고요 속에서, 케이든은 그가 이 천막 안에 다다르기 전에 겪었던 일을 지워 내고자 노력했다.
어쩌면…… 정말, 저 혼자 헛것을 봤을지도 몰랐다. 그저 알렉스를 닮은 남자를 보고 놀란 거다. 그러다 거짓말처럼 길을 잃어버린 것이다.
제가 마주친 남자는, 알렉스가 아닐 것이다. 케이든은 그렇게 믿고 싶었다.
「……손 좀 줘 보세요.」
대뜸 알 수 없는 말을 건넨 아문이 케이든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케이든이 별다른 반응을 하지 않고 멀뚱히 보고 있기만 하자 재촉하듯 까딱이기까지 했다.
당황한 케이든은 아문을 향해 왼쪽 손을 내밀었다. 아문은 기다렸다는 듯 케이든을 붙잡고 그의 옷소매를 한 번 더 접어 걷어 올렸다.
흠. 드러난 손목을 빤히 보던 아문이 자신의 허리춤에 매달려 있던 주머니를 잡아 뺐다. 얌전히 손을 내민 채로, 케이든은 아문이 그 안에서 무언가를 끄집어내는 일을 끝마치길 기다렸다.
아문이 말 한마디 하지 않고 꺼내 든 건, 얇은 줄 한가운데에 푸른색 보석을 매달아 둔 팔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