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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신부 (21)화 (21/97)

아문이 말 한마디 하지 않고 꺼내 든 건, 얇은 줄 한가운데에 푸른색 보석을 매달아 둔 팔찌였다. 아문은 그것을 다짜고짜 케이든의 빈 손목에 걸었다. 케이든이 놀랄 틈도 없이 재빠른 손길이었다.

「이걸 사려고…… 잠시 자리를 비웠던 겁니다.」

말을 이어 나가면서도 아문은 계속해 케이든의 낯을 살폈다. 케이든의 반응을 보는 일에 온 신경을 쏟았다.

「헬리오 사람이 선물하는 팔찌를 조심하셔야 해요. 상대에게 자신의 소유욕을 표현하는 짓이니까, 다른 사람이 주는 건 호의로라도 절대, 절대로 받으시면 안 됩니다.」

“…….”

「뭐, 제가 드린 건 괜찮습니다. 저는 그런 저질스럽고 못된, 이상한 생각 같은 건 추호도 하질 않고…….」

두서없이 늘어지던 아문의 말이 별안간 뚝 끊겼다. 하지만 금방이라도 다시 이야기를 계속할 사람처럼 입을 벌리고 케이든을 바라봤다.

케이든이 울고 있었다.

소리도 없이 뚝뚝 흘러내린 눈물방울이 케이든의 손목에 감긴 팔찌 위로 떨어졌다.

“황태자비님.”

당황한 아문이 황급히 자세를 고쳐 잡았다. 몸을 굽히자 순식간에 두 사람 사이의 거리가 가까워졌다.

“부담스러워서 그러십니까? 이거 비싼 물건 아닙니다. 아까 보셨던, 그 가판에서 산 거예요. 말도 안 되게 평범한 팔찌인데…… 정말 별것 아닙니다.”

“…….”

“아니면, 마음에 들지 않아 그러십니까?”

순간 말문이 막혔던 아문이 뒤이어 언어를 바꿨다.

「마음에 차지 않는다면, 버리셔도 됩니다. 당장 이 자리에서 내팽개치셔도 돼요. 천막 밖에 던지셔도 말을 더할 생각 없습니다.」

허공을 헤매던 아문의 두 손이 불현듯 케이든의 뺨에 닿았다. 제 신부의 창백한 얼굴 위에 번진 이름 모를 슬픔이 아문의, 아사드의 숨을 턱 막히게 했다.

아문은 케이든에게 말을 쏟아 내는 걸 멈췄다. 대신, 소리 없이 흐르는 눈물을 제 손끝으로 조심히 닦아 주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울지 마세요.」

아문은 케이든에게 속삭였다. 당혹감에 발갛게 달아올랐던 아문의 얼굴이 원래의 색을 되찾아 가고 있었다.

눈물로 흐려진 케이든의 두 눈이 그 속에 아문을 담았다. 케이든은 자신이 왜 우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케이든은 혼란스러웠다.

알렉스를 마주쳤을 때처럼 무섭지도, 몸이 아프지도 않았다. 이렇게 마음이 따뜻해졌는데, 이렇게 기쁜데. 왜 눈물이 나는 건지 이해가 안 됐다. 저부터가 스스로의 마음을 알지 못하니, 아문에게 제대로 된 답을 줄 수도 없었다.

오른팔을 든 케이든이 접히지 않은 옷소매에 대충 눈물을 닦아 냈다.

“고마워, 아문.”

이전의 아문이 그랬듯 케이든의 말속에도 다급함이 묻어났다.

“이런 선물을 받아 본 게…… 아니, 누가 나한테 이런 걸 준 게 처음이라,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어. 고맙다는 말밖엔 생각이 안 나. 제국어로도 왕국어로도, 그래.”

“…….”

“소중히 여길게. 내가, 죽을 때까지 함께할게.”

아문과 눈을 맞추며 케이든은 말했다. 남자의 어두운 보라색 눈이 눈물을 머금어 반짝이고 있었다.

“……죽을 때까지 간직하진 않으셔도 됩니다. 그럴 줄 알았으면 이런 팔찌보다 더 좋은 걸 드렸죠.”

“아니야. 나한테, 이것보다 좋은 건 없을 거야. 장담해.”

“…….”

“죽어서도 팔찌랑 같이 묻힐게. 묻히지 못하면, 같이 불에 탈게.”

“과격하십니다.”

아문은 헛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잠시 뒤엔 조금 불퉁한 얼굴이 됐다. 할 말이 있는 눈치였다.

「그런데 케이든 님께 선물을 드린 사람이 제가 처음은 아닐 것 같습니다. 이 팔찌보다 먼저 예물을 받으셨으니까요.」

「그건…… 내 몫이 아니니까. 나 말고 다른 분이 받아야 할 선물을 내가 눈치 없이 가로챘을 뿐이야. 갑자기 전하의 반려자 자리에 앉게 됐잖아.」

「…….」

「하지만 이건 달라. 네가 날 생각해서 선물해 준 거니까.」

말을 마친 케이든이 황급히 겉옷 주머니를 뒤적였다. 옷을 갈아입은 그에게 아문이 챙겨 줬던 손수건을 꺼내기 위함이었다.

손수건의 부드러운 질감을 확인한 케이든이 자신의 눈물을 훔쳐 줬던 아문의 손을 제 쪽으로 끌어왔다. 케이든은 그가 쥔 보송보송한 천으로 아문의 손에 남은 물기를, 눈물을 닦아 냈다.

“내가 가진 게 많은 사람이면 좋았을 텐데.”

“…….”

“이렇게 친절한 너한테, 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서 미안해.”

케이든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텅 빈 천막의 어둠 속에 퍼졌다.

아문은 제 손을 닦아 주는 남자의 손등에 아로새겨진, 오늘따라 유난히 거슬리는 상처들을 바라봤다.

“……아무것도 주지 않으셔도 됩니다.”

다시 케이든과 눈을 맞추며 아문은 말을 이었다.

「아무것도 받지 못해도 상관없어요. 그깟 팔찌 선물은 앞으로 천 번, 만 번도 더 해 드릴 수 있습니다.」

어딘가 결연해 보이기까지 하는 아문에게서 손을 무른 케이든이 슬며시 웃었다. 아문의 장난스러운 농담이 그저 고맙게만 느껴졌다.

아문과 함께 있는 천막 안이 조금도 어둡게 느껴지지 않았다. 저 밖으로 나서는 것 역시, 더는 무섭지 않았다.

* * *

새벽녘의 달빛이 발코니 구석에 쭈그려 앉은 남자의 발치를 맴돌았다.

케이든은 제 맨발을 비추는 하얀 빛을 멍하니 바라봤다. 상처도 굳은살도 많은 발이 흰 달빛을 받는 게 민망해 재빨리 긴 가운 자락 아래에 자신의 발을 숨겼다.

케이든은 꿈을 꿨다. 아니, 꿈의 거죽을 쓴 과거의 기억이 갑작스레 그를 찾아왔었다.

그 계절도 떠오르지 않는 어느 날에, 알렉스는 여느 때처럼 케이든에게 갈급히 입을 맞춰 왔었다.

케이든은 그런 남자에게, 자신이 모시는 이에게 물음 하나를 건넸다. 아주 오랜 시간 마음속에 품어 왔던 의문이었다. 하지만 말을 내뱉는 스스로도 헛소리라고 생각하는 기묘한 뜻을 품은 질문이었다.

〈……저를 사랑하십니까?〉

〈…….〉

〈그래서, 저를 미워하십니까?〉

그저 케이든은 이유를 찾고 싶었다. 아니, 저 남자가 제게 이러는 이유를 억지로라도 만들고 싶었다.

모자란 저도 사람을 때리고 욕하고, 비웃고, 아프게 깔아뭉개는 게 사랑이 아님은 알았다. 자신의 즐거움을 위해 다른 사람의 타고난 형질마저 바꿔 버리는 사랑 같은 건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 역시 알았다.

그러면서도, 이 모든 일이 벌어진 원인이 있길 바라며 물은 거였다. 케이든은 자신의 고통에 아무 이유도 없다는 것을 믿고 싶지 않았다. 이 끔찍한 시간에 뭐라도 이름이 붙여지길 바랐다.

당연하게도. 제대로 된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툭, 툭, 케이든의 뺨을 가볍게 친 알렉스는 멍청한 소리를 하는 그를 비웃었다.

〈그런 말은 어디서 배웠어? 글도 제대로 못 읽는 게 책을 본 건 아닐 테고. 하나뿐인 친구께서 이상한 얘기라도 해 준 거야? 아니면, 간밤에 꿈이라도 꿨어?〉

케이든의 목깃을 잡아끌어 흔들며 그는 말을 이었다.

〈나는 너를 사랑하지도 미워하지도 않아.〉

〈…….〉

〈케이든. 사랑은, 사람과 사람이 하는 거야.〉

미천한 것에게 진귀한 가르침을 내려 주겠다는 듯 알렉스는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너는 사람이 아니라 벌레 새끼잖아. 건방지게 사랑 같은 소리를 입에 올리면 안 되지.〉

〈…….〉

〈너를 사람이라고 생각했으면 나는 이러지 못해. 기분 좋을 때 몸 좀 섞는다고, 그게 사랑이 돼? 너 하나 마음껏 데리고 노는 게 사랑이야?〉

일을 하다 말고 별안간 불려 온 케이든을 욕실로 끌고 가며 그는 말을 이었다.

〈케이든, 너는 벌레야. 내 마음대로 날개를 떼어 내고 다리를 떼어 내도 나한테 뭐라고 할 사람 하나 없는 벌레 새끼. 뭐라고 하긴커녕, 자기네 대신 벌레를 잡아 준다고 환영할 테지.〉

물이 채워지고 있는 욕조에 처박히면서 케이든은 고개만 끄덕여야 했었다.

〈너처럼 못생긴 걸 누가 좋아해 줄까.〉

그 생생한 목소리가 귀를 찌르는 순간을 마지막으로, 케이든은 잠에서 깨어났다. 그리고 도망치듯 침실을 빠져나왔다.

케이든은 옷자락 아래에 숨긴 발 대신 그의 손목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문이 준 팔찌가 끊어지기라도 할까, 정말 조심히 손가락 끝으로 쓸어 봤다.

참 어색하고 낯선 물건이었다.

아문은 이 팔찌가 아주 평범한 것이라고 말했었다. 하지만 케이든에겐 조금도 평범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이런 건, 저처럼 가난한 이들은 구경도 못 해 볼 물건이었다. 두 손을 부지런히 움직여야 하는 노동자이기까지 했으니, 손이며 팔에 닿는 장신구가 더욱 어렵게 다가왔다.

그래도…… 케이든은 아문의 선물이 좋았다.

케이든은 제 손목을 붙잡아 주고 있는 팔찌를 가만히 들여다봤다. 팔찌 끝에 간신히 매달린 자그마한 푸른색 보석이 케이든의 눈에는 밤하늘에 뜬 커다란 달보다 아름다워 보였다.

흰 달빛을 받아 더 예쁘게 반짝이는 푸른 보석을 조심히 쓰다듬어 보고 있자니, 꿈속에 찾아왔던 옛 기억도 가물가물하게 흐려져 갔다.

조금씩, 조금씩 마음이 가라앉았다.

케이든은 헬리오가, 이곳 사막이 좋았다. 아문에게 선물받은 팔찌를 볼 때처럼 낯섦을 느끼면서도 동시에 따뜻한 애정을 품게 됐다.

북부의 엘바와 멀리 떨어져 있는 헬리오의 수도에는 케이든을 아는 사람이 없었다. 제 이름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 속에서, 저는 알렉스에게 몸을 파는 못생긴 남자나 기분 나쁜 벌레가 아니었다. 이곳 사람들은 저를 언제든 때려 죽여도 되는 무언가가 아니라, 같은 사람으로 봐 줬다.

갑자기 나타난 반려자를 탐탁지 않아 하던 아사드마저 이제 제게 이루 말할 수 없는 친절을 베풀어 주고 있었다. 그건, 그가 절 같은 사람으로 여기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케이든은 자신이 언젠간 궁에서 쫓겨나게 될 걸 알았다. 그때까지만이라도, 제 비밀을 지키고 싶었다. 제가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숨기고 싶었다.

‘계속, 나를…… 사람으로 생각해 주면 좋겠어.’

아름다운 푸른빛에 입을 맞추며 케이든은 생각했다. 자신을 이곳에 데려와 준 신에게 건넨 자그마한 소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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