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기한부
팔짱을 낀 아문은 시종들의 충돌 아닌 충돌을 지켜보고 있었다. 벽에 등을 기대선 그의 모습이 사뭇 삐딱해 보였다.
아문은 평소의 그라면 듣는 척도 하지 않았을 유치한 대화를 귀에 담는 중이었다. 끊임없이, 또 동시에 쏟아지는 말소리에 귀가 다 간지러울 정도였다.
다들 어지간히 심심한 모양이라고 생각하며 진작 인사도 남기지 않고 시종방을 나섰어야 했다. 하지만 어쩌다 보니…… 시종방 한구석에 자리를 잡은 채 시종들의 대화를 엿듣게 됐다.
아사드는 아문의 모습으로 시종들 사이를 오가며 황실 안팎의 소문과 추문, 미담 따위를 귀담아듣고는 했다. 하지만 없는 시간을 억지로 만들어 낼 정도로 지대한 관심을 갖진 않았다.
하나 그 이야기의 주인공이 제 바보 같은 신부라면 말이 달라졌다.
아문은 눈치가 좋은 시종들이 제게도 어려운 케이든을 얼마나 파악하고 있는지 알고 싶었다. 물론, 저보다 그 남자를 더 잘 알지는 못하겠지만.
시종들 사이의 설전은 오늘 케이든의 산책 시중을 누가 들 것인가, 그 문제에서 출발했다. 리헤트는 당연히 내가 아니겠냐며 자신만만하게 웃어 보였다. 고개까지 저어 가며 웃는 그녀에게 다른 시종 몇이 반발을 했고 말이다.
‘리헤트가 가는 게 맞지.’
그 자세만큼이나 삐뚜름한 웃음을 입가에 걸며 아사드는 속으로 리헤트의 편을 들었다.
사유도 없이 시종들을 불러 모아선 종일 멍청히 서 있게 하지 않는 데다, 어지간한 일은 혼자서 해결하려 드는 케이든은 그네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당연했다. 성격 더럽고 까탈스러운 몇몇 황족의 시중을 드는 것보단 수더분하고 착한 제 신부를 돌보는 편이 훨씬 낫지 않겠는가.
“왜 그렇게들 황태자비님 밑에서 일하겠다고 난리인 거지? 난 그분의 인기를 이해할 수가 없다.”
아문처럼 팔짱을 낀 상태로 시종들과 말을 섞던 남자가 툭, 말을 내뱉었다.
‘저 남자는…… 아마, 케이든 또래였지.’
말을 꺼낸 남자 시종의 낯을 살피는 아문의 눈이 가늘어졌다.
“일하기 너무 편하니까 그렇지. 외출을 자주 하시는 것도 아니고, 별궁으로 매일 손님을 불러들이시는 것도 아니잖아. 자긴 원하는 게 없다면서 시종들을 자주 쉬게 해 주시고. 거기다, 이상하고 역겨운 심부름을 시키지도 않으시지. 이 악물고 모른 척해야 하는 일을 벌이시는 것도 아니고.”
“맞아. 얼마나 좋아. 거기다, 다정하시기까지 하잖아.”
시종 투란의 말 뒤로 다른 시종의 말 한마디가 메아리처럼 따라붙었다.
“그래, 투란 말이 맞다. 어차피 해야 하는 일이라면 몸과 마음을 편하게 해 주시는 분 밑에서 하는 게 좋은 법이지.”
나이가 있는 시종의 웃음 섞인 목소리를 들으며 아문은 고개를 끄덕였다. 미소와 함께였다.
“외관까지 훌륭하시다는 얘기는 왜 안 하지? 그게 진짜 중요한 건데.”
“그거야, 황태자비님은 전하의 신부니까. 내가 어떻게 그런 말을 입에 담니?”
틈을 타 말을 보탠 리헤트를 투란이 나무랐다.
“난 언니가 말하는 ‘그런 말’을 벌써 백 번은 더 입에 담았어. 그게 정말 죄를 짓는 일이라면, 나 진작 잡혀갔을걸?”
“나는 잘생겼는지 모르겠던데.”
뭐라는 거야. 아문은 별 같잖은 소리를 내뱉은 남자에게 시선을 옮겼다.
아까 전 팔짱을 끼고 이야기에 끼어들던 남자가 다시 입을 연 거였다. 리헤트의 짜증 어린 시선이 닿자, 남자는 좌우로 고개를 저어 보였다. 리헤트를 따라 한 거였다.
“하. 그거야, 네 눈이 발가락에 붙어 있으니까……. 저 위에 계신 분 얼굴을 제대로 보지 못해서 그런 거겠지?”
안타깝다는 듯 리헤트가 눈썹을 아래로 내렸다.
“와, 거기다 황태자비님이 너보다 키까지 반 뼘은 더 크시네. 어유, 뭐, 머리카락이 무슨 색인지 정도만 간신히 봤으려나. 너 솔직히 말해 봐. 황태자비님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르지? 그냥 피부색이랑 머리카락 색으로 대애충 저 사람이 황태자비님이다, 아니다, 유추하는 거잖아.”
“야, 무슨 말을 그렇게 해. 너무 과장하는 거 아냐?”
“황태자비님은 어? 무슨 한심한 생각을 하는지 얼굴에 다 드러나는, 자기 자신한테 도취된 사막 멍청이들이랑 다른 세상에 계신 분이야. 얼굴만 보기 좋은 게 아니라고. 알아?”
남자의 반발을 묵살한 리헤트가 말을 쏟아 냈다. 그녀와 시선을 맞대고 있던 남자의 귀가 빨개지거나 말거나, 그쪽엔 신경도 쓰질 않았다.
“베타 여자 눈에 오메가가 잘생겨 봤자지.”
저 새끼, 왜 저러지? 꼴값이네 싶었다.
근무지를 옮겨 버리라 시종장에게 언질을 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성실한 리헤트에게 시비를 걸어 그녀의 기분을 상하게 하고, 그러다 업무까지 방해하기 전에 치워야 했다.
“왜 이렇게 시비야? 너, 당분간 뒤통수 조심해라. 내가 조만간 돌항아리 하나 집어 들고 찾아간다.”
빨래가 잘못된 천처럼 얼굴을 찌그러트린 리헤트가 남자 시종을 흘겨봤다.
“그래. 황태자비님은 베타인 네가 홀랑 빠질 정도로 잘생긴 데다 성품까지 훌륭하시다. 그럼 뭐 하냐, 황태자 전하께 사랑받는 황태자비는 되질 못하는데.”
“너야말로 왜 말을 그따위로 할까?”
“네가 이렇게 열심히 편들어 주고 찬사를 내뱉고, 졸졸 따라다니면서 성심껏 모셔 봤자라고.”
“…….”
“그분 옆에선 권력? 명예? 아니, 하다못해 작은 보상 하나 못 얻을걸. 너는 황궁 시종장 될 기회라도 생길까 싶어서 줄 서는 거겠지만, 과연 황태자비님이 황비가 될 수 있을까?”
남자의 말이 활기차던 시종방의 분위기를 단번에 가라앉혔다. 차가운 침묵이 빠르게 퍼졌다.
아문의 모습으로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아사드는 참으로 다양한 인간 군상을 마주하게 됐다. 황태자의 자리만 지키고 있었다면 듣지 못했을 이야기들을 들었다. 겪지 못했을 일들 또한 여럿 겪었다. 황실을 향한 아주 원색적인 욕도 가볍게 넘길 수 있을 정도로 말이다.
모습을 바꾸고 엿들은 투정을 야비하게 걸고넘어질 생각은 없었다. 그런 적도 없었다. 하지만 황태자비를 씹어 대며 깐족거리는 놈을 보고 있자니, 자꾸만 마음이 엇나간 모양새로 변했다.
황족부터 시종까지. 아주 황궁 전체가 케이든을 동네북으로 아는구나 싶었다.
어찌 됐건 케이든은 신의 선택을 받은 사람이었다. 그런데도, 고작 아사드 메케리우스 한 사람이 사랑을 주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이렇게나 꼴이 우스워져 버렸다.
예정대로 헤카와 혼인을 했어도 그 사람과 저 사이에 사랑은 존재하지 않았을 터다. 하지만 지금처럼, 헤카와 저를 두고 부부 사이에 사랑이 안 보인다며 비웃었을 놈은 아무도 없었겠지. 황태자비는 황비가 되지 못할 거라는 소리를 하는 인간도 없었으리라.
그냥, 가진 것 없고 어수룩한 제 신부가 만만해서 저런 소리를 지껄이는 거다.
짜증 섞인 한숨과 함께 아문은 벽에서 등을 뗐다. 저놈의 면상을 실수인 척 주먹으로 쳐 버릴까 싶었다.
하지만 아문보다 먼저, 리헤트가 시종방의 침묵을 깼다.
“넌 눈치가 없어.”
“뭐?”
“눈치가 더럽게 없다고.”
리헤트는 웃고 있었다. 어딘가 자신만만해 보이는 웃음이었다.
“왜 황태자비님이 전하께 사랑받지 못해? 두 분 옆에 있어 보지도 못한 게 혓바닥만 길어. 너, 오늘 황태자비님 앞으로 아주 귀한 선물이 왕창 들어온 줄도 모르지? 다, 전하께서 보내신 거야.”
“…….”
“야, 아문. 이리 와. 너도 할 말 많잖아. 빨리 입 좀 열어 봐.”
“……뭘요?”
별안간 대화 속으로 끌려 들어온 아문이 조금 당황해 물었다.
“너는 황태자비님이 전하와 얼마나 자주 독대하시는지 알잖아. 네가 두 분을 나보다 더 가까이서 모시고 있으니까, 두 분 사이가 얼마나 돈독한지도 더 잘 알겠지.”
“……뭐, 네. 그렇죠. 저도 잘 압니다.”
“그렇지? 저 멍청이는 아무것도 모르면서, 이상한 헛소리 몇 마디 주워듣고 저런다니까.”
어딘가 묘한 눈빛을 한 리헤트가 아문을 빤히 바라봤다. 곧장 말 몇 마디가 덧붙었다.
“두 분이 얼마나 잘 어울리는데, 그걸 모르고 말이야. 아주, 역사에 길이 남을 그림처럼 아름답잖아. 안 그래?”
검날 정도는 아니어도 바늘 끝 정도는 되지 않을까 싶은, 꽤 뾰족한 구석이 있는 시선이었다. 왜 사람을 저런 눈으로 보는 걸까. 아문은 리헤트의 눈빛에 실린 뜻이 짐작조차 되질 않았다.
“아문,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역사에 길이 남을 그림처럼 잘 어울린다니. 그 괴상망측하고 괴이한 이야기를 들이밀며 너도 그렇게 생각하냐고 묻는다는 게, 그저 어처구니가 없었다.
“네. 그렇게 생각합니다.”
하나 결국 아문은 긍정의 답을 내놨다. 한숨과 함께였다. 원하는 답을 얻어 낼 때까지, 리헤트가 계속 저만 바라보고 있을 것 같아 그랬다.
“봐, 다른 사람도 아니고 아문까지 저렇게 말하잖아. 저 속 모를 애가 말이야.”
리헤트는 활짝 웃었다. 아문이 떨떠름한 얼굴을 하고 있거나 말거나, 어찌 됐든 긍정의 말을 내뱉었으니 괜찮다고 여기는 모양이었다.
남자 시종은 지기 싫다는 듯 몇 마디를 더 투덜거렸다. 하나 그에게 흥미를 잃은 채 비껴 나간 리헤트의 눈을 보고는 이전처럼 입을 다물어 버렸다.
도대체 왜 저러는 건가 싶었다. 찌질하긴. 근무지를 옮기기만 해선 안 됐다. 저것과 리헤트가 다신 얼굴 맞댈 일이 없게 만들어 줘야지. 아사드는 황궁의 시종들에게 더 나은 평화가 찾아오길 바랐다.
리헤트의 연설을 끝으로 대화의 화제가 바뀌었다. 그 뒤로 이어지는 여러 농담을 흘려들으며 아문은 방을 떠날 준비를 했다. 자꾸만 머릿속에 떠오르는 해괴한 말을 지워 내면서였다.
‘케이든 같은 남자와 내가 잘 어울린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