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반지를 안 끼고 다녀?〉
〈……반지요?〉
〈혼인 반지.〉
여상한 낯으로 아사드는 답했었다.
케이든은 자연스레 아사드가 말한 혼인 반지를 생각하게 됐다.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기가 죽을 만큼 화려하던 반지를 떠올리자 괜스레 속이 차가워졌었다.
제가 아닌 다른 신부를 위해 준비됐었을 혼인 반지는, 정말 휘황찬란하고…… 무거웠다.
보는 눈이 없는 저도 그것의 값어치가 제 몸값의 몇천 배, 아니 몇백만 배는 더 나갈 거란 사실 정돈 예상할 수 있었다. 그런 반지를 어찌 끼고 다니겠는가. 실수로 흠을 낼까, 잃어버리기라도 할까 두려웠다.
어차피, 아사드도 혼인식을 치를 동안에만 싫은 걸 꾹 참고 억지로 반지를 꼈을 테고…….
무심코 아사드의 왼손을 봤던 케이든의 생각이 뚝 끊겼다. 아사드의 왼손 약지에 함께 끼워진 두 개의 반지 중, 유독 화려하게 생긴 쪽이 시선을 잡아끌어서였다. 왜 저걸 이제야 봤을까 싶었다.
〈나는 혼인 반지를 뺀 적이 없어. 지금껏 혼인 반지 한 번 낀 적 없는 당신과는 다르지.〉
〈…….〉
〈남편의 의무를 다하려고 노력했다고 해야 하나.〉
혼인 반지를 끼는 행위가 왜 남편의 의무인가 의아한 것과는 별개로, 케이든은 아사드에게 미안함을 느꼈었다.
아사드가 내도록 혼인 반지를 끼고 있었단 사실을 진작 알았다면, 이렇게 약지를 비워 두지 않았을 거다. 적어도 아사드와 함께일 땐 반지를 꼈겠지.
〈죄송합니다…….〉
〈됐어.〉
케이든에게서 손을 뗀 아사드는 곧장 그가 테이블 구석에 올려 뒀던 자그마한 보석함을 열었다.
까만 보석함 안에 숨어 있던 장신구는, 테가 얇은 반지 하나였다. 혼인 반지처럼 이루 말할 수 없이 화려한 생김새를 가진 게 아니라, 꽤 얌전한 모습을 한 것이었다. 아사드의 약지에 끼워진 두 개의 반지 중 다른 하나와 똑같은…… 반지였다.
〈다른 건 몰라도, 반지를 선물하는 건 내가 해야지. 부부 사이의 사적인 일까지 아문에게 맡길 순 없잖아.〉
아사드는 케이든의 왼손을 다시 한 번 붙들었다. 얼빠진 얼굴을 한 남자의 약지에 자신이 가져온 반지를 무심히 끼워 줬다.
〈뭐, 이전의 혼인 반지가 당신이랑 안 어울리긴 했어. 하지만 이 정도면…… 괜찮은 것 같은데.〉
고개를 든 아사드는 케이든과 눈을 맞췄다. 놀라 반쯤 입을 벌리고 있던 케이든은 당황해 고개를 떨궈야 했다.
별안간 선물받게 된 반지는 그 생김새만이 얌전할 뿐, 혼인 반지 못지않게 반짝였다. 황송할 정도의 반짝임이었다. 그런데도, 왜인지 혼인 반지처럼 어렵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내가 당신을 위해 고른 거야. 괜찮지 않을 리가 없지.〉
아사드가 나를 위해 고른 것이라. 그래서 어렵게 느껴지지 않는 걸까?
자신만만한 얼굴을 한 아사드를 조심히 올려다보며, 케이든은 그런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나한텐 어울리지 않아도 어쩔 수 없어. 나보단 당신에게 맞춰야 했으니.〉
씩 웃은 아사드가 케이든의 눈앞에 제 왼손을 흔들어 보였다. 약지에 자리한 두 개의 반지가 각기 다른 빛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모두 케이든과 나눠 낀 것이었다.
분위기가 가라앉은 혼인식에서 아사드와 반지를 교환하며, 케이든은 두려움만을 느꼈었다. 하지만 오늘은…… 가슴께에 묘한 일렁임이 번지는 걸 느꼈다. 아사드에게 붙잡혔던 손이 홧홧했었다.
케이든은 침묵했다. 머릿속이 빙글빙글 어지럽게 돌았다. 그러나 금세 정신을 차리고 아사드와 눈을 맞췄다.
〈앞으론, 절대 반지를 빼지 않겠습니다.〉
씻을 때만 빼고요. 쓸데없는 말까지 주절거려 가며 케이든은 아사드에게 긴 감사를 전했다. 반지만이 아니라, 아사드가 보내 줬던 또 다른 선물들을 다시 하나씩 입에 담으며 감사를 표했다. 뭐라고 두서없이 헛소리를 늘어놓은 건지 제대로 기억도 나질 않았다.
아사드는 그저 케이든의 이야기를 들어 주었다. 입가에 웃음을 띤 채로 케이든만을 바라봤었다.
케이든이 말을 마친 뒤에도 아사드는 입을 열지 않았다. 케이든 역시 더는 대화를 잇지 않았다.
꽤 오랫동안, 케이든은 제 손에 끼워진 반지를 눈에 담는 아사드를 훔쳐봤다. 그가 제게 써 주는 마음에 그 어떤 의미도 부여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였다.
“…….”
상념을 마친 케이든은 벌떡 몸을 일으켰다.
어딘가 멋쩍은 마음이 됐다. 이 늦은 밤에 아사드를 생각하자니, 왠지 죄를 짓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달빛이 발을 디딘 창가 쪽으로 케이든은 몸을 틀었다.
어두운 침실을 어슴푸레하게 밝히고 있는 은은한 빛 아래에서, 케이든은 괜스레 반지를 쓰다듬어 봤다. 아문에게 팔찌를 선물받았을 때와는 또 다른 기쁨을 가만히 어루만졌다.
아사드가 안겨 준 아름다운 반지는 제 투박한 손과는 조금도 어울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걸 알면서도, 손가락에서 빼낼 생각은 들지 않았다.
헬리오를 떠날 때가 되면 이 반지 역시 혼인 반지처럼 보석함 속으로 자리를 옮겨 가게 될 거다. 그래도 그 전까지는, 계속 함께해도 되겠지. 아사드가 남편의 의무를 말하며 반지를 빼지 않았으니 저 또한 따르면 됐다. 반려자의 의무라는 핑계를 대면서.
……그와 진짜 부부라도 된 것처럼.
「유치하게.」
작게 웃음을 터트린 케이든은 다시 침대에 누웠다. 몸을 돌려 달빛을 등졌다. 저 어스름한 흰 빛이 반지를 닳게 할 것도 아닌데, 조심하고 싶어졌다.
‘어쩌면…… 나 혼자만 보고 싶어서 이러는 걸지도 모르지.’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채로 케이든은 눈을 감았다. 얇은 테가 떠받들고 있는 보석이 어둠 속에서도 밝게 빛났다.
* * *
“아……. 피곤해.”
헤카는 앓는 소리와 함께 소파에 몸을 누였다. 사막의 꽃이란 별명을 가진 남자의 고운 얼굴 위에 피로가 묻어났다.
몸을 씻고 환의를 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고작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도 안 났다. 남은 하루를 내도록 누워서 보내야 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몸이 축축 처졌다.
너무나 피곤한 외출이었다.
오늘, 헤카는 너른 황궁 안쪽에 숨어 있는 별궁에 발을 들였다. 소문의 황태자비를 만나기 위함이었다.
헤카는 헬리오의 세 재상 중 하나인 쿠람의 차남이었다. 또한 그의 유일한 오메가 자식이기도 했다.
야망이 있는 쿠람은 제 아름다운 아들을 미래의 황비로 만들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 왔다. 헤카 역시 군말 없이 제 아버지의 뜻을 따라 줬기 때문에 쿠람의 노력도 끝내 결실을 얻었다. 그의 아들과 황태자가 혼인을 약속하게 된 거다. 정확히는 쿠람과 황제 사이의 약속이었지만 말이다.
그러니까, 헤카는 헬리오의 황태자비가 될 사람이었다. 별안간 침묵을 깬 신만 아니었다면 말이다.
신의 숨결 한 번에 걷고 있던 길이 뚝 끊겼다. 대뜸 목덜미가 잡혀 길 바깥으로 밀려났다고 봐도 좋았다.
아사드와의 혼인이 어그러진 후, 대략 열흘 정도를 헤카는 침대 위에 누워 현실을 부정하면서 보냈다.
하지만 보름째 되던 날엔 자리를 박차고 나섰다. 정신을 차린 거다. 비관에 빠져 아까운 시간을 흘려보내고 싶지 않았다. 자신은 어렸으니까. 놓쳐 버린 기회에 미련을 둔 채로 후회만 하기엔 남은 인생이 너무 아까웠다.
헤카는 파투 난 혼인을 아쉬워했다. 하나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신의 뜻이 그렇다는데, 한낱 인간이 뭘 어쩌겠는가.
물론, 헤카의 아버지인 쿠람은 제 아들처럼 덤덤하지 못했다. 제 아들의 자리를 뺏은 황태자비를 욕하며 매일 우는 소릴 했다.
그런 쿠람에게, 헤카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들을수록 낭만적이네 싶기만 했다. 가진 것 하나 없는 남자가, 헬리오의 황태자와 반려 신탁으로 엮이다니. 사람들이 좋아할 수밖에 없는 달콤한 이야기가 아닌가.
그러나 쿠람은 헤카와 생각이 달랐다. 역시나 말이다. 어느 날부터인가, 쿠람은 영 반응이 미적지근한 제 아들을 쿡쿡 찔러 대기 시작했다.
〈얘야, 황태자비를 만나 보렴. 신의 선택이 완전한지 아닌지를 네 눈으로 직접 판단해 봐. 그 불경한 판단에 따라 너는 물러설 수도, 더 나아갈 수도 있을 거야. 이 아버지는 그렇게 믿어.〉
수상한 모략이 느껴지는 말이었다.
쿠람의 떼쓰기는 계속해 이어졌다. 더 듣다간 귀에서 피가 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결국, 헤카는 아버지 쿠람의 뜻을 따라 황태자비를 만나 보기로 했다. 듣기 싫은 잔소리를 피하기 위해서였다. ……조금은 케이든이라는 사람이 궁금하기도 했었고 말이다.
그게 바로, 오늘의 일이었다.
만남은 쉽게 성사됐다. 아버지가 황비께 미리 수작을 부려 둔 덕이었다. 갑작스러운 신탁을 받아 연고도 없는 헬리오로 오게 된 황태자비가 적적하지는 않을까 마음이 쓰인다며, 그와 나이가 비슷한 제 아들을 소개해 주고 싶다는 이야길 해 놓은 거다.
황태자비는 별궁 서관의 1층 응접실에서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긴장한 낯을 한 황태자비의 곁을 곧 성인이 되려나 싶은 어린 남자 시종 하나가 지키고 서 있었다. 제가 황태자비를 해치기라도 할까 봐 눈에 불을 켜고 선 모습이 어처구니가 없었다.
헤카가 케이든을 본 건 오늘이 처음이었다. 황태자인 아사드의 혼인식엔 황제가 지정한 소수의 인원만이 참석할 자격을 얻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케이든이 지금껏 황실 안팎에서 열리는 그 어떤 연회나 모임 따위에, 하다못해 만찬 자리에도 모습 한 번 드러낸 적이 없기도 했고 말이다.
운 좋게 마주한 황태자비는 의외로…… 호감이 가는 미남자였다. 언뜻 차갑고 예민해 보이는 인상임에도 벽이 느껴지진 않았다. 아버지가 비웃던, 보기만 해도 답답하다던 남자의 옷차림도 나쁘지 않게 다가왔다. 어찌 됐건 그와는 잘 어울렸다.
소문대로 사람이 조금 어두워 보이긴 했다. 저는 모를 우울이었다. 지나치게 타인의 눈치를 보는 행동거지가 문제일지도 몰랐다. 정작 손님의 눈치를 봐야 할 시종은 저를 씹어 먹을 듯 노려보았는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