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받지 못한다는 말이 진짜인가. 왜 저렇게 주눅 들어 있는지 모르겠네. 케이든에게 살갑게 인사를 건네며 헤카는 생각했었다.
하지만 저를 보는 남자의 눈에 화색이 돌자, 머릿속을 떠다니던 상념을 잊게 됐다. 케이든은 왕국어를 써서 말을 건넨 헤카를 반가워했다. 무어라 따로 기쁨을 표한 건 아닌데, 그냥, 느낌이 그랬다.
고향의 언어가 그리웠던 모양이지? 헤카는 계속해 왕국어를 사용하며 생글생글 웃어 보였다. 타인에게 호감을 사고자 할 때 짓는 표정이었다.
대화를 주도한 건 헤카였다. 말실수라도 할까 걱정하는 듯, 말수가 적은 남자를 붙들고 계속해 말을 이어 나갔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혼자 애를 쓰는 대화가 재미있을 리 없었다. 그런데도, 헤카는 황태자비와의 대화가 나쁘게 느껴지지 않았다.
황태자비가 쓰는 왕국어가 어딘가 낯간지럽게 들려서 그랬을지도 몰랐다. 그에겐, 다소 신경질적으로 들릴 수도 있는 딱딱한 언어를 부드럽게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지금껏 들어 온 왕국어와 황태자비의 입을 통해 듣는 왕국어가 꼭 다른 세상의 말처럼 다가왔다. 제 앞의 남자가 괜스레 다정다감하게 와 닿았다.
황태자비와의 대화는 재미없지만, 동시에 아주 재미있었다. 말재주가 없는 남자를 앞에 두었다는 사실이 너무 여실히 전해져 우스울 정도였는데, 그 어설픔도 어느 순간 즐거워졌었다.
정말 싫은 건…… 황태자비의 뒤를 지키고 서 있던 시종이었다.
헤카는 아문이라는 놈처럼 건방진 눈을 한 시종을 지금껏 본 적이 없었다. 아니, 시종에만 국한할 수도 없었다. 헤카는 절 그렇게 대하는 인간을 처음 봤다.
그것은 저를 무슨 적장의 사령관을 보듯이 바라봤었다. 무예엔 별다른 뜻이 없는 헤카로선 그런 시선을 받은 게 태어나 처음이었다. 이상한 반항심이 불처럼 일어났다.
어딘가 매몰차게 느껴지는 시종의 얼굴은 제가 황태자비를 향해 웃을 때마다 더욱 냉랭해졌었다. 그래서, 헤카는 더욱 화사하게 웃기로 했다. 저 어린 게 주제도 모르고 황태자비를 마음에 품었나? 그런 웃기는 생각이 들어 놀리고 싶었다.
헤카는 시종 남자애의 귓가에 대고, 너 그러다 지하 감옥에 잡혀 들어간다고 속삭여 주고 싶은 걸 정말 간신히 참아 내야 했다. 몇 살이라도 더 나이를 먹은 제가 봐줘야 하지 않겠는가.
무심코 응접실 발코니 너머로 보이는 정원에 시선을 줬다가 함께 산책 아닌 산책을 하게 되기도 했다. 그 유명한 빛의 정원이었다.
그런데…….
“망했지. 망했어.”
별궁에서 보낸 시간을 곱씹어 보던 헤카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창피한 순간이 떠올라서였다.
갑자기 튀어나온 벌레를 피하겠다고 뒷걸음질 치다 헛발을 짚은 그를, 황태자비가 붙잡아 줬었다. 제 허리를 받쳐 주는 손이 제법 단단한 데다 남자의 키가 저보다 크기까지 했고…… 그가 헬리오에선 찾아보기 어려운 유형의 미남자인지라…… 헤카는 순간 넋이 나가 버렸다.
건방진 시종이 곤란에 빠진 그를 돕는 척, 황태자비에게서 떼어 낸 덕분에 금세 정신은 차렸지만.
‘별궁을 나서기 직전엔…… 기회가 된다면 더 만나 뵙고 싶다고, 주절주절 헛소리를 늘어놨었지.’
같은 형질을 가진 사람끼리 잘 지내면 좋지 않겠느냐는 속 보이는 소리를 하면서였다. 아버지가 황비에게 가식적인 웃음과 함께 전했을 말과 다를 게 없었다.
창피하게도 긍정적인 답변까지 받게 됐다. 황태자비의 입장에선 어쩔 수 없었을 거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황비가, 당신 또래라며 소개해 준 사람을 어찌 홀대하겠는가. 새로운 인맥을 원치 않는 이에게 친구 하자고 조르는 사람처럼 보였을까 봐 걱정이 들었다.
그래도 별궁에 다녀온 일 자체를 후회하진 않았다.
도대체 뭘 하고 왔나 싶어 한심스럽고 피곤한 것과는 별개로 헤카는 케이든의 곁에서 즐거움을 느꼈다. 맛있는 간식 먹으며 대화를 나누고, 아름다운 정원을 거닐고, 이런저런 이야길 주고받으며 웃다가 집으로 돌아온 게 아닌가.
헤카는 황태자비가 마음에 들었다. 그렇게 인정을 하니 마음이 편안해졌다.
작은 한숨과 함께 늘어져 있던 상체를 일으켜 세운 순간, 때맞게 침실의 문이 열렸다. 저렇게 무작정 제 방에 들이닥칠 사람은 이 저택에 딱 한 명밖에 없었다. 아버지였다.
“우리 아들, 별궁 구경은 잘하고 왔니?”
“그럭저럭…….”
떫은 얼굴을 한 헤카가 말을 흐렸다.
“왜 그렇게 풀이 죽었어? 네가 있어야 할 곳에 다른 것이 있으니 속상했어?”
“아니.”
“너무 신경 쓰지 마.”
“신경 안 쓰는데.”
“얘야, 다 괜찮아질 거야.”
헤카의 옆에 찰싹 붙어 앉은 쿠람이 제 아들의 어깨를 다독이며 말을 이었다.
“어차피 3년 뒤면, 아니지, 이제 2년 반만 더 지나면 그 별궁이 너의 것이 될 테니까.”
“……무슨 소리야?”
당황해 소파 등받이에서 몸을 뗀 헤카가 물었다.
“무슨 소리긴, 말 그대로지. 황태자비 자리는 비워질 거야. 그 빈자리는 네 차지가 될 거고.”
“…….”
“이 얘길 해 주고 싶어서 일단 널 별궁으로 보낸 거란다. 그래야 네가 내 얘길 더 반겨 줄 듯해서. 별궁 꼴이 얼마나 우스워졌는지 직접 봤잖니.”
저와 쏙 빼닮은 아들의 머리칼을 다정히 헝클인 쿠람이 웃어 보였다.
“그거, 아버지 혼자 하는 생각 아니지? 확신하는 거 보니까, 그렇지?”
미간을 찌푸린 헤카의 물음에 쿠람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여 답했다. 경쾌한 웃음과 함께였다.
“그 사람을 내쫓기로 했어?”
“황태자비가 헬리오에 발을 들이기도 전에 이미 결정이 난 얘기란다. 그리고 내쫓긴, 그런 무식한 행동은 하지 않아. 아주 적절한 보상과 함께 다른 기회를 열어 줄 거야. 그 남자가 허튼짓하지 않고 조용히 물러나 준다면.”
“…….”
“하지만…… 이전에 비해 황제 폐하의 의중이 다소 모호해지긴 했지. 그 속을 모르겠단 말이야. 그래도 일단은 내 손을 잡아 주겠다고 하셨단다. 그러니 너와 내가 더 잘해야지. 일단이라는 건, 언제든 마음이 바뀔 수 있다는 말과 다름없으니까.”
헤카는 당황해 입을 다물었다. 아니, 아버지는 자기 아들을 도대체 뭐라고 생각하는 거란 말인가. 어처구니가 없었다.
케이든은 제가 황태자와 혼인을 약속했던 사이였음을 이미 아는 눈치였었다. 그런데도 제게 모나게 굴지 않고 친절하게만 대해 줬는데…….
이루 말할 수 없는 찜찜함이 헤카를 찾아왔다. 한여름 우기의 절정에도 이런 찜찜함은 느끼지 못할 것 같았다.
“황태자비님도 아는 얘기야?”
“아니. 모르지. 아마, 꽤 오랫동안 모르고 살 거야.”
“말도 안 돼.”
“어쩔 수 없어. 생각할 시간을 많이 주면 안 되거든.”
웃음을 거둔 쿠람이 말을 이었다.
“하루. 딱 그 정도만 머리 굴릴 시간을 줄 거란다. 기한은 촉박하게, 보상은 넉넉하게.”
“…….”
“제대로 된 기회를, 인생을 바꿀 제안을 받아 본 적 없는 사람은 멀리 내다보지 못하고 눈앞의 이익만을 택하게 된단다. 이 아버지가 보기엔 지금의 황태자비가 그런 사람이지. 아둔하고 순진해. 날것의 언어를 쓰자면, 음, 멍청하다고 표현할 수 있겠구나.”
속으로 경악한 헤카가 입을 열었다 다물길 반복했다.
“우리 아들, 왜 그렇게 놀랄까? 2년 반은 너무 먼 것 같아? 기다릴 시간이 아까운 모양이구나.”
“…….”
“그럼, 그 남자한테 알파라도 하나 붙여 볼까? 신도 불륜 저지르는 놈들은 돕지 못하잖아.”
“그런 짓을 왜 해!”
“어우.”
“어, 어. 아버지는 정말, 같은 오메가끼리 너무한 거 아냐?”
당황해 얼굴이 벌겋게 익은 헤카가 말을 더했다.
“아니, 애초에 황태자비께선 그렇게 아무 알파한테 막 넘어가고 그럴 분이 아니야. 준비는 무슨 준비. 말도 안 되는 일 벌이지 마!”
“얘야. 누가 들으면 그 남자랑 네가 오래 알고 지낸 사이인 줄 알겠다. 내가 너한테 처음 본 사람을 믿으라고 가르쳤니, 의심하라고 가르쳤니? 아니면, 너 사실 마법사였어? 마법이라도 써서 황태자비의 마음에 들어가 본 거야?”
“…….”
“얼굴이 멀끔해서 마음이 약해진 건 아니지? 그래. 얼핏 보면 알파 같은 느낌도 있긴 하더라. 좀 비굴해 보이긴 해도, 그럴 수 있지.”
아하하. 말을 마친 쿠람이 밝게 웃어 보였다. 그런 아버지를 보며 헤카는 부모에게 주먹을 휘두르는 패륜을 저지르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황태자비님을 다시 뵙기로 했어. 나 그 사람이랑 친해질 거야. 그러니까, 괜한 짓 하지 마! 그런 짓 하면 아버지랑 다신 안 볼 테니까! 집 나간다!”
헤카는 대뜸 외쳤다. 쿠람에겐 씨알도 먹히지 않을 소리였다.
“그래? 친해지는 거 나쁘지 않지. 그 남자가 괜한 욕심 부리지 않게 네가 바로 옆에서 막아 줄 수도 있을 테고. 자기 주제를 파악하게 도울 수 있겠지? 아, 허튼 마음도 못 먹게 해야 하네.”
“무슨 허튼 마음.”
“왜, 그 남자가 황태자 전하의 첫 희락기를 기회 삼아 애라도 갖게 되면 큰일이…….”
으악. 쿠람의 말을 끊어 버린 헤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두 손 모두 주먹을 꽉 쥔 채였다.
거친 숨을 몰아쉰 헤카가 침실의 문을 향해 저벅저벅 걸음을 옮겼다. 아버지가 방을 나갈 생각이 없다면, 제가 먼저 나가는 수밖에 없었다.
“나, 어머니한테 갈 거야. 따라오지 마!”
헤카는 과묵한 어머니가 계실 서재로, 아버지의 머리를 쥐어박아 줄 존재가 있는 공간으로 향했다. 머리에 열이 오른 채였다.
* * *
슬슬 날이 어두워지고 있었다.
시간이 조금만 더 지나면 노을이 완전히 자취를 감추고 어둠이 내릴 텐데. 아문은 도통 제 옆을 떠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저를 찾아온 손님이 자리를 뜬 후 곧장 아문과도 작별의 인사를 나누게 될 줄 알았는데 말이다.
아문은…… 어딘가 화가 난 상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