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름다운 신부 (28)화 (28/97)

“너무 갑작스러운 방문이었습니다. 최소한 사흘의 여유 시간은 두고 미리 약속을 잡았어야죠. 이렇게 다짜고짜 얼굴을 들이밀다니. 기가 막히는군요.”

“…….”

“도대체 왜, 황비께서 그런 요청을 용인해 주신 건지 모르겠습니다. 언제부터 재상과 그의 가족들이 세상에 둘도 없는 귀빈 대접을 받았다고…….”

사나운 모양새로 변했던 아문의 얼굴이 고개를 들어 두 눈에 케이든을 담을 때가 되자 그새 새초롬해졌다.

“케이든 님께 죄송합니다. 제가 더 신경 썼어야 했는데.”

“아냐, 죄송하다니. 난 괜찮아.”

“낯선 사람과의 만남이 불편하진 않으셨습니까?”

아문의 물음이 케이든은 어렵게 느껴졌다.

괜찮았다는 답은 아문에게 민망함을 안겨 줄 거다. 절 대신해 열을 내 준 그를 멋쩍게 하고 싶지 않았다. 케이든은 제 속내를 감추고 어중간하게 웃어 보였다. 아문이 자신의 표정을 마음대로 해석할 수 있게 둔 거다.

케이든 역시 헤카의 방문이 조금 놀랍기는 했다. 하지만 그와의 만남 자체가 불편하지는 않았다. 당연히 불쾌함을 느끼지도, 짜증을 느끼지도 않았었다.

오늘 오전, 먼 황제 궁에서 건너온 황비의 보좌관은 케이든에게 손님의 방문에 대해 미리 알려 줬었다. 그 손님이 케이든의 또래인 데다 형질도 같은, 대재상 아래에 모인 3인의 재상 중 하나인 쿠람의 차남이라는 이야기도 더해졌다.

다소 다급하게 잡힌 약속이긴 했지만 아문의 말처럼 아주 다짜고짜 쳐들어온 건 아니었다.

하지만 헤카의 방문이 아문에겐 용납하기 힘든 문제가 됐다. 헤카와 단둘이 있는 건 안 된다며, 무슨 일이 생길지도 모르니 옆을 지키고 있겠노라 선언하기까지 했었다.

괜한 걱정을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케이든은 아문에게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저를 걱정해 주는 아문의 요청을 들어주고 싶어 그랬다.

“왜, 그 남자가 케이든 님을 찾아온 건지 모르겠습니다.”

정답을 알 길 없는 의문과 추측들이 아문의 주위를 떠돌기 시작했다. 아문은 재상의 차남이 왜 갑자기 케이든을 찾은 건지, 그에게 무슨 사악한 목적이 있는 건 아닌지, 여러 가지 의문을 혼잣말처럼 곱씹어 봤다.

“나만 아니었으면 황태자비가 되셨을 분이잖아.”

이상한 고민에 사로잡힌 아문에게 케이든이 먼저 말을 꺼냈다.

“갑자기 자기 자리를 뺏기게 된 거니까……. 그냥, 그 자리를 뺏은 사람이 궁금하셨던 게 아닐까?”

빨리 이야기를 끝맺고 화제를 돌리고 싶었다. 아문이 뒤집어쓴 불쾌감을 털어 내 주고 싶어 그랬다.

“……그 남자가 황태자비 후보였다는 걸 알고 계셨습니까?”

“……응.”

“누가 그런 말을 전하던가요?”

“엘바에서 들은 얘기야. 누가 가르쳐 준 건지는 몰라. 진짜야.”

아사드에게 약혼자가 있었다는 사실을 케이든에게 알려 준 사람은 엘바의 왕이었다.

〈사막에서 가장 아름다운 남자와 혼인을 약속했던 황태자를, 결국 자네가 얻게 됐군. 아무것도 아닌 자네가 사막의 꽃을 이긴 거야. 재밌는 일이지.〉

헤카를 마주한 순간, 케이든은 자신이 엘바를 떠나오면서 들었던 말을 떠올리게 됐었다. 제 앞에 선 남자의 얼굴이 사막의 꽃이라 불리는 게 당연할 만큼 아름다웠으니 말이다. 머리부터 발끝까지를 훑어 오는, 무언가를 가늠하는 듯한 그의 시선 역시 케이든에게 확신을 줬다.

“그래도…… 정말 친절한 분이셨어. 왕국어까지 쓰면서 내게 많은 걸 맞춰 주시고. 아문 너도 봤잖아.”

케이든은 아문이 더 캐묻지 못하게 황급히 화제를 돌렸다.

말 그대로, 헤카는 친절한 사람이었다. 저 같은 자가 황태자비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에 실망한 듯 잠시 곤혹스러워 보이는 낯을 했다가도, 금세 아름다운 미소 뒤로 기분을 감췄다. 그 후로는 쭉, 별궁을 떠나는 순간까지도 제게 웃는 모습만을 보여 줬다.

「황태자비 자리에 케이든 님을 앉힌 건 저 위에서 하품이나 하고 있을 신입니다. 왜 남의 자리를 뺏어 미안한 사람처럼 구십니까. 헤카나 재상이나, 제 운명에 원망을 퍼붓고 싶다면 신의 다리나 붙잡고 하라고 해요.」

“……알았어.”

심술이 난 아문을 위해 케이든은 웃어 보였다.

“뭐, 그 손님께서 친절한 모습을 비치긴 하셨죠. 케이든 님이 알파였다면, 그 자리에서 당장 구애했겠단 생각이 들 정도로.”

아문이 타인의 형질을 이런 식으로 입에 담는 경우는 처음이었다. 누구에게나 호감을 살 게 분명한 헤카의 무엇이 아문을 이렇게 뾰족하게 만들었을까. 고심해 봤지만 쉬이 답이 나오질 않았다.

「내가 오메가처럼 보이질 않아서 네가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걸지도 모르겠어. 하지만 그분은…… 그저 친절을 베푸셨을 뿐이야.」

“…….”

「다른 사람들은 아문 너랑 정반대로 생각했을지도 몰라. 내가 그분께 격식 없이 추근댄다고 숙덕였을걸? 그분을 끌어안고 허리까지 잡아 버렸으니까.」

“그건…….”

손등에 턱을 괴고 있던 아문이 화들짝 놀라 자세를 풀었다.

“그 사람이 발을 헛디뎌서 나자빠지려는 걸 도와주신 거잖아요.”

“헤카, 그분도 어색한 분위기를 풀려고 내게 친절히 대해 주신 것뿐이고.”

말을 마친 케이든이 객쩍게 웃어 보였다. 아문을 나무랄 의도는 아닌데, 그렇게 들릴까 염려가 됐다.

“……제가 왜 이렇게 앞뒤 분간도 못 하는 상태가 됐는지 모르겠습니다. 뭔가, 속이 꼬이고 짜증이 나요.”

“…….”

“그 사람. 이상해요. 갑자기 찾아와선 음흉하게 웃고, 말도 안 되게 친한 척을 하잖아요. 케이든 님을 뵌 적도 없으면서. 그게…… 그게, 더럽게 싫었나 봅니다.”

자그마한 목소리로 주절주절 말을 늘어놓던 아문이 입을 꾹 다물었다. 자신의 유치한 속내를 견디지 못하겠다는 듯 뺨을 붉혔다.

「설령 내가 진짜 알파라고 해도, 그분이 내게 구애를 할 리도 없지. 황태자님 같은 알파와 혼인을 약속하셨던 분이 나를 눈에 담을 리가 없잖아.」

케이든이 가볍게 웃어 보였다. 분위기를 환기하고자 내놓은 말이었다.

“케이든 님이 뭐가 어때서요.”

“문제가 많지.”

“…….”

「형질이 바뀐다고 얼굴이 바뀌진 않더라. 베타였을 때의 얼굴이랑 지금의 내 얼굴이 똑같은 걸 보면 말이야. 내가 알파가 되어도 달라질 일은 없을 것 같아. 성격도 그렇고.」

케이든은 대충 말을 얼버무렸다. 어쩌다 형질에 관한 이야기까지 입에 담게 됐다. 굳이 비밀로 할 내용은 아니지만, 어쩐지 민망했다.

“……베타였을 때가 있으셨어요?”

“응. 20살이었나, 그때까지는 베타로 살았어.”

“갑자기 형질이 변하신 겁니까?”

케이든의 형질을 바꾼 사람은 알렉스였다. 하지만 케이든은 다른 사람에게, 그것도 아문에게 그 사실을 솔직하게 전할 생각은 없었다.

제게 몇 번이고 약을 먹이고 또 몇 번이고 마법을 걸던 백작가의 마법사는 저를 볼 때마다 한숨을 푹푹 쉬었었다. 지겹다는 듯 고개를 젓고 혀를 찼었다.

〈게으르게 몸이나 팔아 빚 갚는 거, 하다 하다 이제 타고난 형질까지 바꾸려 하는 거. 창피하지 않나?〉

그 핀잔이 케이든은 억울했었다. 하지만 자신이 마법사의 말처럼 부끄러운 인간임은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그걸 잘 알아서, 지금도 거짓말을 하고 있지 않은가.

“그렇게 됐네. 왜 갑자기 형질이 변한 건지는 잘 모르겠어.”

싱거운 웃음과 함께 케이든은 말을 얼버무렸다.

“베타일 때와 달라진 점이, 정말 조금도 없으십니까?”

“응. 정말 없어.”

다행히 아문은 제 거짓말에 의구심을 품지 않았다. 그저 신기해만 하는 것 같았다. 간혹 아무런 이유 없이 형질이 변하는 사례들이 있어서 그렇겠지.

얼굴이 벌겋게 익었던 게 언제였냐는 듯 아문은 금세 평소의 활기를 되찾았다. 케이든이 오랜 시간 베타였다는 이야기를 알게 된 게 신기하고 즐거운 눈치였다.

머리카락은 원래도 검은색이었냐는 물음을 시작으로, 아문은 케이든에게 여러 가지 질문을 건넸다. 지금껏 속에 담아 뒀던 궁금증을 와르르 쏟아 냈다고 표현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차곡차곡 모아 둔 의문을 해소할 기회를 맞아 마음이 다급해진 사람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런 아문에게 케이든은 천천히 답을 내줬다. 거짓과 진실이 반씩 뒤엉킨 답변들이었다.

케이든은 아문의 앞에서 완전히 솔직해질 수 없는 자신이 부끄러웠다. 하지만 경멸 섞인 시선을 받는 것보단 거짓말을 하는 편이 나았다. 당장의 면피에 불과하더라도 말이다.

“이 상처들은, 일을 하면서 얻게 되신 겁니까?”

테이블 위에 올라와 있는 케이든의 손등, 그 위에 난 상처들을 아문은 제 손끝으로 더듬어 봤다. 오래된 상처들이 아문의 손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다.

아문은 저를 벌하려 드는 사람도, 저와 몸을 섞길 원하는 사람도 아니었다. 제게 바라는 게 있는 사람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자꾸만 살갑게 손을 뻗어 왔다. 그저 가만히 살을 맞대고 있을 때도 있었고 지금처럼 손장난을 칠 때도 있었다.

처음엔 이런 식의 맞닿음이 다소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제 손을 붙든 아문의 얼굴이 너무 편안해 보이는 데다, 비슷한 상황이 계속해 반복되다 보니 차차 생각이 달라졌다.

제 손에 기대는 아문의 손을 케이든은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됐다. 엘바 사람들과 헬리오 사람들의 옷차림이며 삶의 방식이 다르듯 아문과 제 생각이 다르겠거니 한 거다.

꼭 강아지가 장난을 걸어오는 것 같아서 귀엽기도 했고……. 물론, 아문에겐 비밀로 해야 하는 생각이었다.

“맞아. 일하다 다쳤어.”

자신의 손 대신 아문의 손을 보며 케이든은 답했다. 이 대답 역시 절반은 거짓말이었다.

상처가 많은 손등 위에서 아문의 손이 떨어져 나갔다. 하지만 뒤로 물러나지는 않았다. 아문의 손은, 케이든의 볼 위에 닿았다. 미끈한 손가락 끝이 오른뺨 아래 물감처럼 번져 있는 연분홍빛 흉터를 다정히 매만졌다.

“이거는요?”

나지막한 목소리로 아문은 물었다. 뺨에 닿은 손의 온기만큼, 아문의 시선 역시 온도가 높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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