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름다운 신부 (29)화 (29/97)

“이거는요?”

나지막한 목소리로 아문은 물었다. 뺨에 닿은 손의 온기만큼, 아문의 시선 역시 온도가 높았다.

놀란 케이든은 당황해 눈을 깜빡였다. 제 상처들이 어쩌다 생긴 건지…… 아문은 많이 궁금한 모양이었다.

아문의 호기심이 조금 의아하긴 했지만 꺼림칙하진 않았다. 아사드가 제 뺨 아래에 남은 화상 자국을 나쁘게 보지 않았던 걸 떠올려 보면, 아문 역시 특별한 뜻도 악의도 없이 그저 호기심만으로 물음을 건넸겠지.

“11살 때였나, 그때 일어난 사고 때문에 생긴 거야.”

“불이 났었나요?”

“응.”

“…….”

“같은 방을 쓰던 친구를 돕다가 이렇게 됐어. 그 친구가 어리고 겁도 많아서…… 혼자선 못 빠져나올 것 같더라고. 다친 건 그냥, 내가 운이 없었지.”

“그 친구는 운이 과하게 좋았고요.”

“나한테 많이 미안해했어. 내가 다 민망할 정도로.”

입양이 결정돼 고아원을 떠나는 날까지 그랬었다. 케이든은 이제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소년이, 아니 청년이 잘 지내고 있길 바랐다.

“화상 흉터는 고통이 오래간다던데요. 아프진 않으십니까?”

“하나도 안 아파.”

흠. 케이든의 순순한 답을 받아든 아문이 자그만 한숨을 내뱉었다. 그는 케이든과 시선을 맞췄다.

“여기 헬리오에선 아플 걱정 같은 건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전하께서 케이든 님을 챙겨 주실 테니까요.”

말을 마친 아문이 그의 손을 천천히 뒤로 물렸다.

아문에게 어떤 답을 해 줘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여전히, 케이든은 이런 상황이 어려웠다. 제 상처들은 이미 아문 지 오래라 더는 아플 일도, 덧날 일도 없을 거라며 괜한 말이라도 주절주절 늘어놓아야 할까? 하지만 바보 같아 보일 정도로 호들갑을 떨고 싶지는 않았다. 걱정해 주는 사람을 실망케 하기도 싫었다.

그래서 케이든은, 고맙다고 대답하며 웃기만 하는 편을 택했다. 다시금 물음을 쏟아 내려는 듯 보이는 아문을 막아서며 말을 돌렸다.

“너무 내 얘기만 한 것 같아. 나도 아문 너한테 궁금한 게 많은데.”

“……저한테 궁금하신 게 있으십니까?”

“너무 많아서 탈이지.”

“들려 드릴 만한 얘깃거리가 없어요.”

“나한텐 머리카락 색이 진짜냐는 것까지 물어봐 놓고.”

케이든은 아문에게 서운한 척 말했다. 장난을 건 거지, 진심으로 서운함을 느낀 건 아니었다. 아문에게 솔직한 답을 바라지도 않았다. 저 역시 그에게 반쯤은 거짓말을 하지 않았는가.

“저는 평범한 사람입니다. 평범하다기보단 지루하다는 말이 맞겠네요.”

“……가족은?”

“…….”

“가족과 함께 살진 않아?”

아문에게 케이든은 슬며시 물었다. 아문의 얼굴에 곤혹스러움이 스치는 걸 보고 당황해 입을 다물어 버렸지만 말이다. 후회가 들었다.

“네. 가족은 없습니다.”

케이든은 가끔, 아문이 형제가 많은 집안의 장남 같다고 느낄 때가 있었다. 아문 특유의 단단함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단단함이란 게 짊어질 가족이 많아 갖게 된 책임감이 아니라, 혼자이기에 갖게 된 책임감에서 나온 것인 모양이었다.

“……나도 그래. 우리한테 공통점이 있었네.”

빙그레 웃어 보인 케이든이 느릿느릿 말을 이어 갔다.

“그래도 아문 넌, 왠지 가족을 일찍 만들 것 같아. 그런 느낌이 들어.”

“제가요?”

「아, 그게, 그, 혼인을 꼭 해야 한다는 말은 아니야. 참견하려는 의도도 아니고. 그냥, 남들보다 가정을 빨리 꾸리지 않을까 싶었어.」

“뭐…… 좋은 사람을 만나면 그러겠죠.”

별안간 뚱해진 얼굴로 아문은 중얼거렸다.

“너는 좋은 사람이니까, 그만큼 좋은 사람을 만날 거야.”

깨끗한 진심을 담아 케이든은 말했다.

케이든 역시 가정을 꾸리는 상상을, 어떤 상황에서건 서로의 편이 되어 줄 가족을 얻는 상상을 해 본 적이 많았다. 20살이 지난 후로는 그런 터무니없는 망상 같은 걸 하지 않게 됐지만 말이다.

“아문은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

아문이 아무리 혼인을 빨리 해도…… 제가 헬리오에서 떠난 이후가 아닐까 싶었다. 혼인식에 참석하진 못하겠지. 애초에 저를 초대해 줄지도 모르겠지만. 그런 생각을 하자니, 어딘가 아쉬워졌다. 주제넘은 생각이었다.

“좋아하는 사람이요?”

놀란 아문이 되물었다.

“제가요?”

“……없어?”

얼빠진 얼굴을 한 아문에게 미안하기도 하고 민망하기도 해 케이든은 어색하게 웃었다.

사실, 케이든은 리헤트와 아문이 서로 좋아하는 사이가 아닐까 추측했었다. 아문과 리헤트가 굉장히 강한 시선을 교환하는 걸 본 적이 있어서였다. 어쩌다 셋이 함께 이동할 일이 생길 때마다 그랬다. 그럴 때면 제가 두 사람 사이에 눈치 없이 껴 버렸구나 싶어 마음이 안 좋았다.

“내가 너무 실없는 참견을 한 것 같아. 이상한 소리 해서 미안해.”

“아뇨. 괜찮습니다.”

“…….”

“좋아하는 사람, 그런 건 없지만요.”

정색한 아문이 답을 내놨다.

“정말 없어요.”

누가 뭐라고 한 것도 아닌데, 아문은 목소리를 키워 한 번 더 케이든의 물음을 부정했다.

“알아. 내가 괜한 오해를 했어.”

케이든은 급히 아문을 달랬다.

아문의 귀 끝이 붉어진 게 보였다. 그 상대가 리헤트건 아니건,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는 말을 입 밖으로 내뱉기 쑥스러운 모양이었다.

제가 그의 절친한 친구나 형제가 아니니 더욱 그렇겠지. 아문이 곤란해할 주제는 다신 꺼내지 말자. 케이든은 결심했다.

갑작스레 찾아온 적막 속에서 아문은 눈을 굴렸다. 의미 없이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시선을 이리로, 저리로 돌렸다.

“다른 얘기를 해야겠습니다.”

툭, 새로운 화제를 입 밖으로 내뱉은 아문이 말을 이어 갔다.

“내일 밤, 피마의 사령관이신 자한 메케리우스 님께서 아크에 도착하실 예정입니다. 제가 일전에 말씀드렸던 것처럼요.”

“……응. 기억해.”

“그분을 위한 연회는, 오늘로부터 나흘이 지난 뒤에 열릴 겁니다.”

이젠 저도 연회에 참석해 얼굴을 보여야 한다고 했었지. 케이든은 얼마 전 아문과 나눴던 대화를 떠올려 봤다.

“자한 님께선 그분과 피가 섞이지 않은 사람들에겐 다정하시니, 대면을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하지만…….”

고민하던 아문이 말을 이어 나갔다.

“보통은 날카로운 상태이십니다. 아주 염세적이고 사나우시죠.”

“황태자님과도 사이가 안 좋으셔?”

피가 섞이지 않은 사람들에겐 다정하단 말은, 피가 섞인 사람들에겐 그렇지 않단 말이기도 했다. 괜히 신경이 쓰이는 이야기였다.

“좋지도 나쁘지도 않으십니다. 저는 괜찮은 편이라고 생각하지만요. 자한 님께선 황제 폐하와 애틋한 남매지간이시니, 조카를 미워하진 않으시겠죠.”

“아…….”

「전하를 향한 그분의 언행이 다소 당황스럽더라도 신경 쓰지는 마세요. 작정하고 남을 상처 주려 하시는 분은 아니십니다.」

“…….”

「제가 보기에, 자한 님은…… 뒤늦은 사춘기를 앓고 계신 듯합니다. 실연의 상처를 극복 중이신 거죠. 조금 길게요.」

뚱한 얼굴로 잠시 생각에 잠겼던 아문이 고개를 들어 케이든과 눈을 맞췄다. 그는 케이든에게 자한과 관련된 이야기 하나를 전해 줬다. 아주 짧은 사랑 이야기였다.

자한 메케리우스에겐 사랑하는 연인이 있었다. 하지만 그 연인이 성벽 너머, 먼 사막의 모래 위에서 삶을 살아가는 가난한 유랑민 남자였기에 두 사람의 사랑은 환영받지 못했다.

선대 황제의 괴롭힘과 압박에 제 연인이 다칠까 마음을 쓰던 자한은 제 이름과 성씨를 버리고 황궁을 나가겠다고 나섰다. 하지만 그의 외침은 받아들여지질 않았다. 그가 아주 뛰어난 전사였기 때문이었다.

선황제는 그의 아들을 눈앞에서 치우는 대신, 일어서지 못하게 억눌렀다. 그리고 자한의 연인을 바다 건너 동대륙으로 보내 버렸다. 자한을 포함한 황족들 그 누구도 남자가 어디로 갔으며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알아내지 못하게 깊숙이 숨겼다. 그렇게, 선황제가 자한의 연인을 죽였다는 소문이 황궁을 떠돌게 됐다.

모든 걸 포기한 자한은 1년간 칩거 생활을 이어 갔다. 그러나 이내 아버지의 뜻에 따라 정략혼을 올리게 됐다. 황실에 이득을 가져다주면, 연인을 돌려주겠다는 약속을 받아서였다.

하지만 그마저도, 혼인 상대가 반년도 채 지나지 않아 지병으로 죽어 버렸다. 선황제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다행히, 지금의 황제 폐하께서 자한 님께 자유를 주셨죠. 적어도 한 번 더 혼인할 필요는 없어진 겁니다.」

아문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황실 사람들 대다수가 자한 님의 애정 문제에서 선황제 폐하의 편에 섰었다 보니…… 자한 님께 크게 미움을 받고 있습니다. 그분이 일부러 시간을 내 수도에 머물다 가시는 이유도, 다른 황족들 마음 불편해지라고 그러시는 겁니다. 신나게 성질도 부리시면서요.」

케이든은 얼굴 한 번 본 적이 없는 남자가 조금은 안타깝게 느껴졌다.

사랑하는 사람과 억지로 헤어지게 된 이야길 들으니, 아사드 생각이 나기도 했다. 자한 사령관과 연인을 갈라놓은 이가 이미 명을 달리한 이전 세대의 황제라면…… 아사드와 헤카를 갈라놓은 건 신과 제가 아닐까 싶었다.

아사드가 그의 외삼촌처럼 사랑 때문에 고통을 받고 엇나가면 어쩌나 걱정이 됐다. 여러모로 마음이 좋질 못했다.

“솔직히, 자한 님이 조금은 답답합니다. 그깟 사랑에 눈이 멀어 뭐가 중요한지를 잊으셨잖습니까. 그 사랑이란 것이 가루도 남지 않고 풍화될 만큼의 시간이 흐른 지금까지도 길을 헤매고 계시죠.”

아주 냉소적인 품평이었다.

“더 큰 명예를 얻을 수 있을 분이 중서부에 처박혀 황궁을 멀리하시는 것 역시 이해가 가질 않습니다.”

아문은 황실 사람들의 이야길 참 잘 아는구나.

그가 전해 준 이야기가 그가 훨씬 어릴 때 벌어졌을 일을 담고 있어 더더욱 묘한 느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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