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이든은 시야의 바깥에 서 있던 외부인에게 팔이 붙잡혔다. 허약하다는 소리는 들어 본 적 없던 성인 남자가 맥을 못 출 정도로 억센 완력이었다.
「잠깐, 잠깐만요.」
이유도 모르고 끌려가던 케이든이 당황해 왕국어로 말을 걸었다.
몸에 간신히 힘을 준 케이든은 자신을 잡아챈 남자를 잠시나마 멈춰 세웠다. 케이든과 남자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쳤다.
“안녕.”
마주친 남자가 가벼운 인사를 건넸다. 황궁 내에서조차 흔히 볼 수 없는 금색 눈을 가진, 어딘가 아사드를 닮은 사람이었다.
케이든의 몸에서 힘이 빠졌다. 맥이 풀려 버렸다.
웃어 보인 남자는 목격자인 시종에게, 그리고 이쪽을 향해 오는 헤카에게 눈을 접어 웃어 보였다. 입술 위에 검지를 올려 비밀을 지켜 달라 부탁하는 건 덤이었다.
남자는 흰 천이 씌워져 있는 커다란 가림막 뒤로 케이든을 인도했다.
얼이 빠진 상태로 걸음을 옮기던 케이든이 남자를 따라 멈춰 섰다. 여전히, 남자는 케이든의 팔을 놔줄 생각이 없는 듯했다.
아마도 아사드의 친척일 남자였다. 고작 가림막 뒤에 숨어 뭘 하려고, 무슨 얘기를 하려고 이러는 걸까. 괜히 긴장이 됐다.
“너무 놀란 것 같아서 미안한데.”
“…….”
「걱정하지 마요. 나, 아사드 외삼촌이에요. 오늘의 주인공.」
별안간 말투를 바꾼 남자가 곧장 말을 더했다. 익숙한 왕국어였다.
「나 왕국어 잘해요. 국경에서 오래 일했거든.」
아문에게 배운 대로, 케이든은 제 앞의 남자에게 황급히 헬리오식 인사를 건넸다. 그러다 우리 사이에 무슨 인사가 필요하냐는 이상한 소리를 듣게 됐다.
「아사드 없이 만나 보고 싶어서. 보아하니…… 걔가 나한테 당신을 제대로 소개해 줄 것 같지 않더라고. 당신도 그렇게 생각하죠?」
남자는 자한 메케리우스였다.
황제가 아끼는 형제. 피마의 수호자, 사령관. 30대 후반 정도 되어 보이는 남자는 맹수처럼 날카로운 인상의 아사드나 그의 누이인 황제와 달리, 얼핏 덩치가 크고 순한 개 같은 인상의 소유자였다.
하지만 그 사나운 눈빛만은, 황제와 똑 닮아 있었다. 어지간한 사람은 그와 눈도 마주치기 힘들어할 거란 생각이 들 정도였다.
눈을 마주하는 게 어렵게 느껴지는 건, 이 세상의 평범한 사람 중 하나일 케이든 역시 마찬가지였다. 실례인 걸 알면서도 눈을 똑바로 마주치기 어려웠다.
자한의 눈가며 눈썹 부근으로, 케이든의 시선이 슬그머니 오르고 내려갔다.
그래도 황제 헤세트의 앞에 섰을 때보단 나았다. 그땐 정말 눈도 제대로 마주치질 못했으니 말이다. 황제 폐하께서 웃고 계셨음에도 겁이 났었다.
「황족들의 혼인은 이득만 따르는 장사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내 욕심 많은 조카가 자기 이득을 포기하고 신의 말을 따르게 됐다니, 너무 신기하지 뭐예요. 신부의 얼굴이 궁금해 미칠 것 같더라고.」
“…….”
「지금 보니, 아주 잘생긴 신부를 얻었네.」
산뜻한 웃음과 함께 나온 말이었다. 조롱의 뜻을 담아 전한 건 아닌 듯했다.
케이든은 무어라 반응해야 할지 몰라 어색하게 눈만 깜빡였다. 제가 관성적으로 내놓을 감사의 인사가 혹여나 아사드를 우습게 만들까 걱정돼 입을 다물기로 한 거였다.
하지만 자한은 케이든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엔 관심이 없다는 듯 술술 말을 이어 갔다.
「신이 정해 준 운명은 아니었지만, 나도 내 나름의 운명적 사랑을 한 적이 있어요. 내가 아사드처럼 신탁을 받을 위치에 있는 사람이었다면…… 나의 사람이 신탁의 주인이 됐을지 궁금하네요.」
말을 마친 남자가 케이든을 붙잡고 있던 손을 물렸다.
“이런, 괜한 오해를 받을 순 없죠. 조카한테 얻어맞긴 싫으니까.”
케이든과 가볍게 눈을 맞추고, 남자는 스스로에게 팔짱을 끼며 웃었다. 도통 그 속을 모를 웃음이었다.
하지만 이전처럼 곧장 말을 잇지는 못했다. 짧은 침묵이 그의 앞을 서성이다 물러섰다. 어쩐 일인지 잠시 사그라들었던 웃음도 침묵이 사라진 뒤에야 원래의 자리로 돌아왔다.
「……당신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닮았어요. 마르주는 여기 헬리오 사람이었으니 외모가 닮은 건 아니고, 분위기가 닮았다는 뜻으로 한 말입니다.」
좋아하는 사람. 아문에게 들었던 자한의 이야기가 케이든의 머릿속을 맴돌았다. 사막을 유랑하던 가난한 남자와의, 비극으로 끝난 사랑이었다.
어쩌면, 그 마르주라는 사람과 제 분위기가 닮았다는 자한의 말이 맞을지도 몰랐다. 저 역시 여기 뜰에 모인 이들과 섞이지 못하는 이방인이었으니 말이다.
케이든은 자한의 웃음 뒤로 비치는 낡은 괴로움을 보는 게 불편했다. 저를 독대하고 싶어 한 그의 의도를 헤아리기가 어려워 더욱 그랬다.
“그래서 더, 당신이 불쌍해.”
자한은 케이든에게 속삭였다.
「체면치레용으로 쓰이다 버려질 신부라는 게, 안타까워요.」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케이든이 더듬더듬 내놓은 목소리를 따라 자한은 몸을 숙였다. 그저 가까워진 것만으로도 무거운 압박감이 느껴질 정도의 거구였다.
「케이든. 당신은 3년짜리 신부예요.」
“…….”
「설마, 모르고 있었나?」
자한이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하나 케이든의 답변엔 관심 없다는 듯 계속해 말을 이어 갔다.
「3년은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이에요. 하지만 신탁의 신비로움이 잦아들기엔 충분한 시간이죠. 그 신비로움이 빛을 잃게 될 때, 당신은 그 자리에서 쫓겨날 겁니다. 쓸모가 없어지니 버리는 거지.」
자한은 제게 심술을 부리는 사람처럼 보였다. 그러나 동시에, 제가 너무나 안타까워 마음을 쓰는 사람처럼 보이기도 했다.
묘한 슬픔마저 느껴지는 자한의 혼란을 앞에 두고, 케이든 역시 혼란에 빠졌다.
「우리 아버지는 죽었어요. 시대가 달라졌으니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답니다. 맨몸으로 사막에 내버려지진 않을 겁니다. 자는 사이에 죽임을 당하지도 않을 거고.」
“…….”
「내 누이는 우리 아버지와는 다르죠. 당신에게 새로운 신분을, 평생 걱정 없이 먹고살 수 있을 만큼의 재산을 안겨 줄 겁니다. 얌전히 입만 다물어 준다면?」
“…….”
「엘바에서도 당신을 면천해 주기로 했다는데. 황태자비 자리에서 물러난 뒤엔, 다시 왕국으로 가려나?」
조금 더 몸을 숙인 자한이 조금 더 목소리를 낮췄다. 마치 비밀 얘기를 하듯 속삭였다.
“왜 그렇게 당황해요? 진짜 몰랐던 얘기일 리는 없잖아. 어느 정도는 예상했을 텐데. 그렇죠?”
자한의 물음에 케이든은 침묵했다. 그는 어지럽던 마음을 이전처럼 가라앉히는 중이었다.
조금은 짐작하지 않았느냐 묻는 자한의 말은 맞았다. 케이든은 자한이 속삭여 준 비밀에 크게 놀라지 않았다. 언젠가는 쫓겨나게 될 거라고 계속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단지, 그 기한이 예상보다 빨랐을 뿐이었다.
「내가 그랬잖아요. 당신이 내 연인을 닮았다고. 당신 같은 사람들은 욕심이 없어요. 하지만 속에 담은 걱정만은…… 사막의 모래알처럼 많죠. 나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
「당신이 떠나면 제사장은 신의 이름을 빌려 새로운 신탁을 내릴 거예요. 귀중한 신탁을 그리 쉽게 저버려도 되냐 싶겠지만, 이 황실 놈들은 기본적으로 믿음이 부족해요.」
장난스럽게 한숨을 쉰 자한이 말을 이어 갔다.
「신께 충성을 바치는 척만 하는 거죠. 지금도 그래요. 일단은 신의 뜻을 받아들이고, 뒤로는 모른 척 다른 짓을 하고 있잖아요? 우리 신실한 제사장만 불쌍하지.」
“……그렇군요.”
“간신히 입 열어서 내놓은 말이, 그게 끝인가?”
“…….”
“하고 싶은 얘기 더 없어요? 제국어 말고 왕국어 써도 되는데.”
눈썹을 아래로 늘어뜨리며 자한은 물었다. 하나 끝내 그가 원하는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헬리오를 떠나기 싫은 건가. 뭐, 우리 누이께선 의외로 당신을 마음에 들어 하니……. 하지만 지금 할 얘기는 아니죠.”
한결 밝아진 음성이 케이든의 귓전에 닿았다.
자한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바뀌었다. 그러나 케이든은 자한의 부드러움을 믿지 않았다. 자한의 눈은 여전히 날카로운 모양을 하고 있었다. 케이든은 자한의 눈 속에서 황실을 향한, 어쩌면 운명을 거스르려는 자들을 향한 적의를 느꼈다.
〈남은 인생은 부족함 없이 살게 될 걸세. 자네가 자네에게 주어진 시간을 버텨 준다면 말이야.〉
케이든은 엘바의 국왕이 제게 건넸던 말을 되짚어 봤다. 그땐 최소한의 시간이란 게 무슨 말인가 했는데, 이제야 진짜 뜻을 깨달았다.
잠잠해진 머릿속에 물음 한 가지가 떠올랐다. 입에 담기 객쩍은 내용이었으나, 드는 생각이라곤 그것 하나밖에 없었다.
“……황태자님께서도 알고 계신가요?”
잠시 머뭇대던 케이든이 자한에게 물었다.
“이 재미없는 연회에 모인 황족 중에, 당신이 3년짜리 신부라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을 텐데.”
“…….”
「저 천박한 작자들이 당신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는 이유가 뭐겠어. 황태자비의 신분이 미천해서? 아니지. 당신이 신이 선택한 진짜 황비가 될 사람이라면 신분이 무슨 상관이에요. 하지만 당신은, 황비가 될 수 없죠. 그래서 무시하는 겁니다. 잘 보여 봤자 금세 사라질 사람이니까. 아무런 의미가 없는 사람이니까.」
“…….”
“아사드만 그걸 모른다? 그럴 수 있나? 나는 모르겠네.”
자한이 의아하다는 듯 되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