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사드만 그걸 모른다? 그럴 수 있나? 나는 모르겠네.”
자한이 의아하다는 듯 되물었다.
“이해했습니다.”
케이든은 자한에게 다시 한번 납득의 말을 건넸다.
그래도 조금은 신경이 쓰이는 점이 있었다. 왜 아사드는 굳이…… 이름뿐인 황태자비를 연회에 데리고 나온 걸까. 뜰에 모인 시종과 호위들의 눈을 속이기 위해서? 고작 그것 때문에 이런 수고를 들인다는 게 의아했다.
「당신이 떠나면 아사드는 바로 재혼할 겁니다. 황태자비의 자리를 오래 비워 둘 수 없으니까요. 이전에 혼인을 약속했던 남자가 그의 진짜 신부가 될 테죠.」
아사드와 헤카가 혼인을 하는구나. 자한이 무심히 건넨 말을, 케이든은 느릿하게 되새겨 봤다.
아사드가 저를 여기까지 데리고 온 이유를 조금쯤은 알 것도 같았다.
헬리오 사람들에게 있어 불륜은 큰 죄가 된다고 했다. 그러니, 반려자를 떼어 둔 상태로 미래를 약속한 사람을 독대하는 것보단…… 그 반려자가 있는 자리에서 좋아하는 사람과 시간을 보내는 편이 나을지도 몰랐다. 뜰 이곳저곳에 자리한 시종들은 제가 진짜 신부가 아니라는 진실을 알지 못하니까, 저를 이용해서 그들의 눈을 속이고 입을 막는 거다.
케이든은 자신의 추측이 제법 그럴싸하게 느껴졌다.
어쩐지…… 민망한 기분이 들었다.
아사드의 다정함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괜한 의문을 품지 않았던 게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응당 그랬어야 하는 일이지만 말이다.
케이든은 그저 싱겁게 웃어 보였다. 눈앞의 남자에게 무어라 내놓을 만한 답이 없어서 그랬다. ‘제가 두 분의 진짜 혼인식을 보지 못해 아쉽네요, 정말 아름다울 텐데.’ 이런 말을 할 순 없지 않겠는가.
“반응이 미지근하네요.”
“……제가 이곳에 오래 머무르지 못한다는 것도, 전하께 혼인을 약속했던 분이 계셨다는 것도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습니다.”
「나라면 배신감을 느꼈을 거예요. 내가 황태자비님이라면 말이죠.」
“…….”
「황태자가, 아사드가, 내 남편이…… 나를 좋아한다고 단단히 착각했을 것 같거든.」
자한의 말이 영 틀린 것만은 아니었다. 제가 지금보다 더 나은 사람이었다면, 아니 헤카 같은 사람이었다면…… 아사드가 제게 호감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오해를 했을지도 모른다. 그는 제게 정말 많은 걸 해 줬으니까.
하지만 여기 있는 제게, 저 같은 사람에게 애정 섞인 호감을 느낄 알파는 없었다. 그래서 착각하지 않았다.
「걔가 근엄한 얼굴을 하고 있긴 하죠. 잔뜩 무게 잡고. 그런데 정작 꼬리 흔드는 건 못 숨기고 있잖아요. 안 그런가?」
자한의 이상한 농담이 케이든을 다시 웃게 했다. 원래도 그런 착각 같은 건 하지 않았지만, 오늘 이후로는 더 하지 않게 되겠지 싶었다.
“자한 님께서 저보다 훨씬 잘 아시겠지만, 전하께선…… 정말 다정하신 분입니다. 그래서 아무것도 아닌 절 불쌍히 여겨 주시고 저는 갚지도 못할 만큼 많은…… 말도 안 되는 친절을 베풀어 주시는 겁니다.”
말이 길어질수록 느려지는 케이든의 제국어를 귀 기울여 듣던 자한이 웃음을 터뜨렸다. 아주 호쾌한, 가림막 뒤에 몸을 숨긴 게 무색해지는 우렁찬 소리였다.
“맞아요. 내가 황태자비보단 아사드를 잘 알죠. 너무 잘 알아서, 나는 심술이 나던데.”
간신히 웃음을 가라앉힌 자한이 손을 뻗어 케이든의 목걸이를 만져 봤다. 단정한 외관을 가진 남자에게 어울리는 줄이 얇은 목걸이였다.
“아사드의 선물인가?”
검을 쥐는 전사답게 손가락 마디마디마다 굳은살이 박여 있는 커다란 손이, 목걸이에 박힌 보석을 쓸었다.
“……네.”
“잘 어울려요. 아사드가 고심해서 고른 게 보여.”
“…….”
“……불쌍한 황태자비. 죄지은 것도 없이 신에게, 황실에게, 황태자에게, 사랑이 우습기만 한 사람들에게 휘둘려야 한다니.”
목걸이에서 손을 떼어 내며 자한은 말을 이었다.
「당신이 더는 아사드의 신부가 아니게 될 때, 피마로 찾아와요. 왕국으로 돌아갈 생각이 없다면 머물게 해 주죠.」
“……네?”
「덥지도 춥지도 않아 꽤 살기 좋은 곳입니다. 거기다…… 내 밑에 당신과 나이가 비슷한 알파도 많죠. 얼굴은 아사드보다 흠, 조금 많이 못나긴 했는데 인성은 훨씬 낫습니다.」
케이든과 거리를 살짝 벌린 자한이 목소리는 내지 않고 그저 입만 움직여 한마디를 덧붙였다.
‘내가 주선해 줄게요.’
소리 없는 말을 마친 자한이 두 손으로 케이든의 어깨를 붙잡았다. 작게 웃어 보인 그는 그대로 케이든의 몸을 뒤로 돌렸다. 케이든은 얼떨결에 자한과 같은 방향을 보게 됐다.
“오랜만이네요, 삼촌.”
그리고, 어딘가 심기가 불편해 보이는 아사드를 마주해야 했다.
자한을 마주하던 아사드의 시선이, 그보다 아래에 있는 케이든에게로 내려왔다. 어쩐지 기시감이 드는 순간이었다.
케이든의 머릿속에 문득 아문의 얼굴이 스쳐 갔다. 제 앞에 선 아사드의 낯이 천막에 몸을 숨긴 저를 찾아왔던 아문과 묘하게 비슷하게 느껴져 그랬다.
그래도 제 의지로 천막 안에 몸을 숨겼을 때와 사령관의 손에 붙들려 가림막 뒤로 끌려온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잠시 자리를 비우긴 했지만, 저로선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도…… 꼭 죄를 지은 사람처럼 마음이 쪼그라들었다. 저는 눈치채선 안 되는 비밀을 알게 돼서 그런 걸지도 몰랐다.
“다들 삼촌을 기다리고 있어요.”
“거짓말은.”
“기다림에 지친 사람들은 모른 척하고, 이렇게 가림막 뒤에 숨어 황태자비나 괴롭히고 계시다니요. 가뜩이나 아직 제국어가 어색한 사람을요.”
괴롭히다니. 케이든은 아사드의 과격한 언사에 또 한 번 마음이 작아졌다. 자한이 저를 괴롭히지 않았다는 걸 그에게 알려 주고 싶었다. 가족에게 이상한 오해를 하면 안 되지 않겠는가.
하지만 케이든보다 먼저, 자한이 입을 열었다.
“제국어가 아닌 왕국어로 말을 나눴습니다.”
“…….”
“그리고 괴롭힘이라니. 그런 말 하면 삼촌이 섭섭해요. 황태자비께 물어볼까? 어때요, 내가 괴롭혔어요?”
케이든의 어깨에 손을 얹은 채로 몸을 숙인 자한이 물었다.
“아뇨, 아닙니다.”
저를 찾아와 준 아사드와 시선을 맞추며 케이든은 급히 답했다. 다소 어색한 웃음이 함께였다.
누가 봐도 심술이 난 얼굴을 한 아사드가 거리를 붙여 왔다. 그는 제 외삼촌에게 이따 다시 뵙겠단 짧은 말을 건넸다. 케이든의 어깨 위에 올라가 있던 손을 떼어 내면서였다.
벌레를 치우듯 자한의 손을 털어 내 준 아사드는 곧장 케이든에게 팔짱을 꼈다. 반쯤은 케이든의 팔을 강탈했다고 봐도 무방했다.
“돌아가자.”
케이든의 귓가에 속삭인 아사드가 그가 왔던 방향으로 다시 걸음을 옮겼다. 케이든은 당황해 잠시 뒤를 돌아보았지만, 제게 손을 흔들어 보이는 자한을 눈에 담기 무섭게 아사드에게 한 소리를 들어야 했다.
“당신 남편은 난데 왜 저쪽에 도움을 청해?”
“아닙니다. 도움이라뇨…….”
“아니면 말고.”
삐딱하게 웃는 남자의 똑바른 걸음을 따라 케이든은 얌전히 다리를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조만간 검 쓰는 법을 알려 줄게. 적어도 사람 명치를 긋고 찌르는 법 정도는 가르쳐 둬야겠어.”
“네?”
“오늘처럼 누가 접근해서 힘으로 끌고 가려고 하면, 바로 그어 버릴 수 있게. 쑤셔도 좋고.”
농담인지 진담인지 모를 험악한 소리였다.
“애초에 혼자 두는 게 문젠가.”
말을 마친 아사드가 멈춰 섰다. 케이든과 팔짱을 푼 그는 다소 삐딱한 자세로 서서 제 신부를 빤히 바라봤다.
“……자리를 비워서 죄송합니다. 다신 이런 일 없을 거예요.”
케이든은 재빨리 사과의 말을 내뱉었다. 내내 기회를 엿보며 아사드의 눈치를 살피다 틈이 보이자 곧바로 전한 셈이었다.
하지만 제 사과가 성에 차지 않은 모양이었다. 아사드의 낯이 떫어졌다.
어떡하지. 어수선하게 들썩이는 마음을 가라앉히려 노력하며 케이든은 머리를 굴려 봤다. 하나 아무리 생각해도 아사드가 만족할 만한 답변을 떠올리질 못했다.
“미안하단 소리 들을 생각 없어.”
말을 마친 아사드가 케이든의 오른손을 잡아끌었다. 그는 케이든의 손에 무언가를 쥐여 줬다. 갑작스럽게 찾아온 차가운 감촉에, 케이든은 순간 자신이 얼음을 들게 된 줄 알았다.
뭔지 확인해 보라는 듯 아사드는 케이든을 향해 고개를 까닥였다. 케이든은 눈치껏 자신의 손을 펴 봤다.
손바닥 위에 작고 하얀 돌이 놓여 있었다. 은은한 빛이 나는, 각도에 따라 보석처럼 보이기도 하는…… 너무 낯선 생김새를 가진 매끈한 돌이었다.
“마법사들한테서 갈취해 온 거야. 손에 쥐고 있어. 냉기 마법이 걸린 물건이니까.”
케이든의 손에 올라가 있는 돌을 보며 아사드는 말했다. 어딘가 계면쩍다는 얼굴을 하고서였다. 그가 느끼는 부끄러움의 근원을, 케이든은 알 수 없었다. 그건 아사드 본인도 마찬가지였다.
“계속 쥐고 있으면 더 차가워질 거야. 북부에 있는 기분까지는 안 들겠지만 뭐, 대충 중부에서 오전 햇빛 쐴 때의 느낌 정도는 받아지겠지.”
아사드의 설명을 들으며 케이든은 얼떨결에 다시 주먹을 쥐었다.
순식간에 몸속의 열기가 가라앉았다. 주위의 공기마저 지금보다 더 서늘해지는 기분이었다.
연회가 열리는 뜰엔 이미 냉기 마법이 걸려 있었다. 그 덕에 더위를 느낄 새도 없었다. 아사드가 제게 덥냐고 물었을 때도, 제 어딜 보고 저런 말을 하는 걸까 싶어 의아함을 느꼈을 정도였다.
그런데도…… 이 자그마한 돌을 쥔 것만으로, 한낮의 사막을 헤매다 얼음 동굴이라도 발견한 사람처럼 기분이 들떴다.
“왜 반응이 없어? 더워했잖아. 그래서 가져온 건데. 이렇게 사람이 많은 곳에서 지난번처럼 다짜고짜 마법을 쓸 수도 없으니까.”
입을 다문 케이든을 향해 아사드는 느릿느릿 말을 던졌다. 케이든이 답을 주기도 전에 먼저 말 한마디를 더 덧붙이기도 했다.
“내가 어려운 단어라도 썼어?”
아사드는 애꿎은 자신의 머리칼을 헝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