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어려운 단어라도 썼어?”
아사드는 애꿎은 자신의 머리칼을 헝클였다. 부드러운 백금색 머리카락이 거친 손길 때문에 위로 뻗치거나 말거나 상관없는 듯 보였다. 머리카락이 어떤 꼴을 하고 있건 내내 아름다울 사람다운 자신만만함이었다.
케이든은 그저 놀란 상태였다. 날 위해서? 그 생각이 케이든의 머릿속을 빙글빙글 돌았다.
아사드가 마법사들에게 찾아간 이유가, 고작 이 자그마한 돌을 받아 오기 위함이었다. 단지 제가 더워하는 것 같다는 이유만으로 굳이 하지 않아도 될 번거로울 일을 했다. 그 사실이 케이든은 얼떨떨했다.
처음 아사드와 얼굴을 마주했을 땐, 처음 말을 섞어 봤을 땐, 그가 제게 이런 모습을 보여 줄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었다. 애초에 혼인식 이후론 거의 얼굴을 보지 못할 줄 알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알게 된 아사드는 고작 3년짜리, 이제는 2년 반가량밖에 시간이 남지 않은 대타에게도 이렇게 마음을 써 주는 사람이었다.
‘그렇다면, 정말 사랑하는 이에겐 얼마나…….’
다정하실까.
심장께가 간지러웠다. 조만간 온몸에 퍼질 간지러움이었다. 케이든은 소란하게 움직이려는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나라면 배신감을 느꼈을 거예요. 내가 황태자비님이라면 말이죠. 황태자가, 아사드가, 내 남편이…… 나를 좋아한다고 단단히 착각했을 것 같거든.〉
아까 전 자한이 건넸던 말이 문득 케이든을 스쳐 지나갔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자한이 말한 그 착각 속에서 살아 봤을까. 궁금했다. 너무 음침한 망상이고 참견이었다.
케이든은 계속해 뻗어 나가려던 생각을 다급히 지워 냈다. 연인을 앞에 둔 아사드를 그려 보는 일은 제 몫이 아니었다.
“정말 시원합니다.”
용기 내 아사드와 시선을 맞추며 케이든은 웃음 지었다.
“항상…… 이렇게 챙겨 주셔서 감사합니다.”
케이든은 속으로 안도의 숨을 쉬었다. 감사의 말을 전하는 게 뭐라고. 순간 가슴이 서늘할 정도로 긴장을 해 버렸다. 쿵, 쿵, 쿵. 제 심장이 뛰는 소리가 귀 안쪽을 맴돌았다.
그리고 케이든은 황급히 얼굴을 굳혔다. 평소보다 붕 뜬 마음으로 말을 내뱉은 탓에, 보기 싫을 바보 같은 얼굴을 해 버렸을 게 분명했다. 재빨리 지우고 싶었다.
케이든은 애꿎은 돌만 손안에서 굴려 봤다. 기분 좋은 시원함이 제 손을 끌어안아 주는 것만 같았다.
“……그렇게 고마울 것까지야. 별것도 아닌데.”
짧은 침묵이 두 사람 사이를 휘감았다.
케이든은 힐끔힐끔 아사드의 눈치를 살폈다. 아사드 역시 그런 케이든을 훔쳐봤다.
“전하께선, 덥지 않으십니까?”
망설이던 케이든이 간신히 물음 하나를 건넸다.
“왜?”
“이걸…… 함께 쓰는 것도 좋을 듯해서요.”
케이든의 말을 들은 아사드의 눈썹이 위를 향했다.
“그건 당신 몫이야. 정 더우면 내가 당신 손을 잡으면 돼. 마법석이 있으나 없으나, 당신 손이 내 손보다 차가우니까.”
아사드가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은 말이 듣는 케이든에겐 민망함을 안겨 줬다.
아문도 그렇고 아사드도 그렇고…… 역시나, 헬리오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손을 잡는 일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모양이었다. 손이 맞닿는 일에 많은 의미를 부여하는 엘바의 사람들과는 달랐다.
“왜, 나랑 손잡기 싫은가?”
“……아뇨.”
케이든은 할 말이 없어 웃기만 했다. 그런 케이든을 보는 아사드의 입가에 만족스럽다는 웃음이 떠올랐다. 언제나처럼 자신만만한 눈빛이 함께였다.
헤카를 마주한 건, 아사드가 케이든을 향해 손을 내밀었을 때였다.
빨리 제 손을 잡으라는 듯 슬렁슬렁 케이든을 향해 손을 흔들던 아사드의 얼굴에서 순식간에 웃음기가 사라졌다. 손 역시 헤카를 앞에 두고 느릿하게 아래로 내려갔다.
헤카는 케이든이 자한과 함께 들어갔던 가림막과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케이든을 마주하길 기다린 듯 보였다.
“좋은 오후입니다, 황태자 전하. 그리고 황태자비님.”
헤카는 인사를 건넸다. 그의 얼굴 위로 햇살처럼 밝고 꽃처럼 화사한 미소가 떠올랐다.
헤카가 아사드와 혼인을 약속했던 사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제가 떠난 뒤 두 사람이 부부가 될 예정이란 건 오늘 새롭게 안 사실이었다.
서로를 향해 인사를 나누는 헤카와 아사드를 보며 케이든은 마음이 부산스러워졌다. 오면 안 될 곳에, 있으면 안 될 곳에 눈치 없이 발을 디딘 기분이 들었다.
“자한 님께 초대를 받으신 모양이군요.”
아사드는 가볍게 웃어 보였다. 케이든은 본 적 없던 어른스러운 얼굴이었다.
‘……미래를 약속한 사람을, 좋아하는 사람을 앞에 둔 알파는 저런 얼굴을 하는구나.’
너무 신기했다. 생각해 보면 자신의 약혼자와 함께 있을 때의 도련님도 그랬었다. 저를 앞에 뒀을 때와는 달리, 그분의 앞에선 그려 낸 듯 다정한 신사의 모습을 했었으니까.
“네. 저희 어머니께서 자한 님과 돈독한 관계이시다 보니, 운 좋게 아들인 저까지 그분을 위한 연회에 참석할 수 있었습니다.”
“내일까진 황궁에 머물겠네요. 즐겁게 지내다 가길 바랍니다. 저 뒤에 계신…… 자한 님과도 정다운 대화를 나눠 보고요.”
아사드는 말했다.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였다. 웃고 있는 건 오직 입뿐이었지만 말이다.
이후로 몇 마디 말이 더 오고 갔다. 케이든은 자신이 얼떨결에 헤카의 옆에 서게 됐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아차렸다. 하지만 쓸데없는 움직임으로 두 사람의 대화를 방해하고 싶지 않아 가만히 있었다.
케이든은 아사드와 헤카가 말을 나누는 모습을 바라봤다. 너무나 아름다운 광경을 눈에 담았다.
꼭 신의 자식들이 말을 주고받는 것만 같았다. 케이든은 그도 모르게 감탄을 내뱉을 뻔했다. 하나 아사드와 눈이 마주친 뒤 다시 눈치껏 입을 다물었다.
여전히 어른스러운 모습이긴 했지만, 저를 보는 아사드의 얼굴이 묘하게 뾰로통해 보였다. 잘못한 게 없는데 잘못한 기분이 들었다.
헤카의 옆에 선 게 문제일까? 헤카를 온전히 눈에 담아야 하는 아사드의 시야에 제가 걸려 버린 거다.
‘짜증 날 만하지.’
가뜩이나 자주 보지 못하는 사람과의 만남을 방해한 꼴이 됐다.
케이든은 슬쩍 몸을 움직였다. 하지만 불만스러워 보이는 아사드의 시선이 계속해 따라붙어 왔다. 더 거리를 벌리라는 뜻인가 싶어 케이든은 아예 아사드의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러면 두 눈에 헤카만 보이겠지 싶었다.
그런데…… 마주한 헤카의 얼굴을 보니 또 잘못된 선택을 한 모양이었다. 그는 아사드 못지않게 오묘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사드의 옆에 다른 남자가 선 게 눈에 거슬리는 걸까 싶었다.
도대체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케이든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용케 내 옆으로 왔네.”
고개를 숙인 아사드가 케이든의 귓가에 속삭였다. 목소리가 조금은 장난스러웠다.
몸을 바로 세운 아사드는 다시 헤카와 말을 주고받기 시작했다. 하지만 대화가 길어질 거란 케이든의 예상과 달리, 두 사람은 곧장 적당한 작별 인사를 꺼내 이야기를 끝냈다. 헤카가 수확기 이후의 마대처럼 멍청히 서 있는 남자까지 챙겨 준 덕분에, 어색하게나마 작별 인사를 나눌 수 있었다.
“잡아.”
아사드는 케이든에게 툭, 하고 말을 던졌다. 다시 그를 향해 제 손을 내밀면서였다.
아사드가 먼저 자리를 뜨길 기다리던 헤카의 얼굴에 숨길 수 없는 웃음이 비죽 튀어나왔다.
헤카의 웃음이 뜻하는 바를 알 길이 없었다. 케이든은 헤카의 눈치를 살피며 아사드의 손을 잡았다. 손을 잡아도 되나 싶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사드의 말을 거부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질투를 불러일으키려는 걸까?’
내가 헤카라면 질투는커녕, 싫기만 할 것 같은데. 분명 슬프기도 할 거다. 하나 저는 연인들이 어떤 상황에서 즐거움을 느끼는지를 모르니, 제 기준만으로 속단해서는 안 됐다.
이런저런 방법으로 서로를 자극하는 연인들의 말 없는 대화가 케이든은 어려웠다. 이해도 가질 않았다.
먼저 걸음을 옮기기 시작한 아사드가 케이든을 부드럽게 잡아끌었다. 그는 헤카를 만나기 전, 자리로 돌아가자고 말했던 대로 케이든을 연회장의 중앙으로 이끌었다. 무용수들과 악사들이 있는 무대를 내려다볼 수 있는 곳이었다.
마련된 자리로 돌아간 케이든은 아사드의 옆에 어색하게 붙어 앉았다. 이전처럼 그와 아사드를 훔쳐보는 사람들의 시선을 피하면서였다.
대놓고 이쪽을 보는 황제 부부의 시선 역시 마찬가지였다. 가벼운 흰 천으로 만들어진 차양 덕분에 조금도 눈이 부시지 않았음에도, 케이든은 햇볕에 눈이 따가운 척을 해야만 했다. 눈이 마주칠까 무서워 그랬다.
악사들의 연주에 맞춰 몸을 움직이는 무용수들이 이목을 끌어 주니 그나마 이 정도의 시선만 받는 거겠지. 바로 아래에 그들을 위한 무대가 있어 다행이었다.
하지만 케이든의 불안한 평온은 아사드의 팔이 그의 어깨를 감싸 오면서 금이 가게 됐다. 그는 화들짝 놀라 다시 고개를 들었다.
“뭘 그렇게 놀라. 그냥, 나한테 기대면 돼.”
“…….”
“당신을 보는 사람들의 기대에 화답해 줘야 하지 않겠어?”
“알겠습니다.”
이런 모습을 보여 봤자일 텐데……. 속으론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케이든은 군말 없이 아사드가 원하는 대로 따랐다. 순순히 긴장을 풀고 몸에 힘을 뺐다.
아사드에게 반쯤 기대게 된 꼴이 민망하기만 했다. 아사드의 뜨거운 몸에 어색하게 몸을 붙인 상태로, 케이든은 손안의 마법석을 괜히 만지작댔다.
마법석은 여전히 얼음처럼 차가웠다. 그런데도 별안간 치솟은 열이 가라앉질 않았다. 마법석을 처음 건네받았을 때 느꼈던 떨림이 다시 케이든을 찾아왔다.
아사드의 품에서, 케이든은 제 심장의 이상을 알아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