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름다운 신부 (47)화 (47/97)

“네. 아주 세게 문을 두드렸는데도 답이 없으셨습니다.”

“미안해, 듣질 못했어. 그래도…… 내가 답해 주지 않아도 혼자 잘 들어오잖아. 지금처럼.”

“놀라지 마시라고 뒤꿈치로 바닥을 쾅쾅 찍으면서 걸었는데. 그것도 못 들으셨죠?”

“응.”

케이든은 순순히 답했다. 그의 입가에 걸려 있던 웃음 사이로 민망함이 섞였다.

“고민이라도 있으십니까?”

“아니.”

“아무래도 거울을 보여 드려야겠군요. 그러면 말이 달라지실 겁니다.”

“왜?”

“세상의 모든 걱정을, 케이든 님 홀로 짊어진 것처럼 보이니까요.”

한쪽 무릎을 세우고 앉은 아문이 슬쩍 고개를 기울였다. 답을 주지 않아도 되지만, 답을 줄 때까지 기다리겠다는 의지가 느껴지는 고집스러운 얼굴을 하고서였다.

“그냥, 생각을 좀 하고 있었어. 내가 나중에 뭘 하고 있을까…… 그런 생각.”

머뭇대던 케이든이 아문에게 말했다.

케이든은 아문에게 제 고민을 털어놓고 싶었다. 하나 그 고민이 아문에게 부담이 될지도 모르겠다 싶어 다른 소리를 꺼내 놨다. 제 부탁이 아무리 쓸 곳 없는 헛소리라도, 아문이라면 그걸 들어주려고 할 테니까.

“나중이요?”

“대강 몇 년 뒤의…… 한 2년, 아니, 2년 하고도 더 뒤의 일?”

“왜 하필 2년일까요. 애매하게 느껴집니다.”

“너무 먼 나중 일은 상상이 안 가서.”

케이든은 말을 얼버무렸다.

아사드와 아문은 가까운 사이였다. 아문이라면, 제가 3년짜리 신부라는 사실 역시 이미 알고 있을지 몰랐다. 깊이 생각을 하지 않고 말을 내뱉은 것 같아 후회가 들었다.

아문은 말이 없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모를, 하지만 어딘가 뾰족한 눈을 하고 침묵을 택했다. 그러다 별안간 케이든과 눈을 맞췄다. 케이든이 제 눈치를 살피는 중인 걸 알고 있었다는 듯 단박에 시선을 얽었다. 평소의 아문 같지 않게 매서운 느낌이 들었다.

“……뭐, 황태자님과 잘 지내고 계시겠죠.”

말을 마친 아문이 표정을 풀고 씩 웃어 보였다. 일전에 내보인 미묘한 기색은 사실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것처럼 장난스럽게 웃었다.

아사드가 아문에게 따로 언질을 주진 않은 모양이었다. 다행이었다. 작별 인사 없이 저 홀로 아크를 떠나는 편이 나을 것 같아서 그랬다. 얼굴을 보고 하는 작별은 서운하고 아쉬울 테니까. 조용히 사라지는 편이 나았다.

“케이든 님께선, 그때를 어찌 그려 보고 계셨습니까?”

“아문 네 말처럼, 잘 지내고 있을 것 같아.”

“전하와 함께요?”

“……응.”

케이든을 대신해 아문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케이든이 내놓은 답에 큰 만족감을 느낀 듯한 얼굴을 하고서 말이다.

“흠. 편지는 잘 받아 보셨습니까?”

“편지?”

“엘바에서 온 편지요.”

“…….”

“제가 케이든 님을 돌봐 드리지 않았던 때에도, 친구분께 편지를 받으셨다고 하더군요. 본궁의 신관에게 들었습니다.”

아사드의 말이 이어졌다.

「제가 케이든 님의 일거수일투족을 파악하는 것이 기분 나쁘게 느껴지실 수도 있다는 걸 잘 압니다. 하지만 케이든 님의 안전을 위해 최대한 모든 걸 살펴 두려는 것이니, 넓은 마음으로 이해해 주세요.」

“아냐, 나는 괜찮아. 기분 안 나빠.”

진심이었다. 저를 감시하는 게 아문이 해야 하는 일 중 하나이지 않겠는가. 편지 이야기를 꺼내는 걸 보고 조금 놀라긴 했지만, 기분 나쁠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이른 아침에 저를 찾아왔던 신관은 자신이 먼저 편지를 열어 봤노라, 제게 말해 줬었다. 겉봉투부터 말린 꽃까지. 어딘가에 마법이나 독이 묻어 있는 게 아닌지 알아봐야 해 어쩔 수 없다고 했다. 그 과정을 아문도 함께했을까 싶었다.

그렇다면, 혹시…….

“편지의 내용도 알고 있습니다.”

케이든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아문은 빠르게 답했다.

아문의 목소리를 귀에 담으며 케이든은 민망함을 느꼈다. 아사드에게 무어라 말을 꺼내야 할까 걱정하고 있었는데…… 그럴 필요가 없어져 버렸다. 곧 그에게도 보고가 들어가겠구나 싶었다.

케이든은 불안했다. 아문이 북부에서 날아든 편지의 내용을, 동봉된 청첩장을 어떻게 생각할까 걱정도 들었다.

“엘바가 그리우십니까?”

하지만 아문이 꺼낸 물음은, 케이든의 예상과 방향이 다른 것이었다. 그리움. 아문은 아주 의아한 단어를 입에 담았다.

“아니.”

당황한 케이든이 얼떨결에 부정적인 답을 내놨다. 진심을 내뱉어 버린 거였다.

“그래도 고향인데요.”

“나는…… 고향에 애착이 없는 편인가 봐.”

그런 케이든에게 아문은 괜한 말을 더하지 않았다.

입을 다문 아문은 고민에 빠진 사람처럼 보이기도, 어떤 문제에 골머리를 앓는 사람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에게 곤란함을 안겨 준 게 엠마의 편지일지, 저일지는 알 수 없었다. 둘 다일 확률이 가장 높았지만 말이다.

“고향에 애착이 없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래?”

“네. 솔직히, 엘바가 살기 좋은 곳이라고 하기는 어렵지 않습니까. 여기 헬리오에 비하면요.”

헬리오에 가지고 있는 애정이 슬쩍 느껴지는 말이었다. 아문의 말에 내심 동조하며, 케이든은 웃음 지었다.

“아문 너는, 헬리오가 고향이야? 여기 아크가?”

“네. 평생 수도에서 살았습니다. 앞으로도 여기서 살겠죠.”

“황태자 전하를 도우면서 말이야.”

“아마도요. 지금은 케이든 님만을 돕고 있지만요.”

뚱한 낯을 하고 있던 아문의 입꼬리가 위를 향했다. 어딘가 산뜻하게까지 느껴지는 목소리가 듣기 좋았다.

“……아문. 나를 도와줘서 고마워.”

잠시 머뭇대던 케이든이 조심히 말을 꺼냈다.

“나처럼 재미없는 남자랑 어울리는 일이 즐겁진 않을 텐데. 이렇게 함께 있어 주는 것도 고마워.”

“왜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그런 말?”

“즐거워요.”

아문이 툭, 말을 내뱉었다. 애꿎은 머리카락을 손으로 흐트러트리면서였다.

“케이든 님과 함께 있으면 즐겁습니다.”

짧고 부슬부슬한 머리카락이 정전기 때문에 하늘로 치솟아 버렸다. 아문 본인에겐 비밀로 해야 할 아주 귀여운 모습이었다. 가만 보면, 아사드도 아문도 머리를 가만히 내버려 두지 못하는구나 싶었다.

“응. 나도 아문 덕분에 항상 즐거워.”

케이든은 미소 지었다. 걱정은 여전히 발치를 맴도는 중이었다. 그런데도 이렇게 웃을 수 있다는 게 신기했다.

“케이든 님께서도 헬리오를, 여기 아크를 새로운 고향이라고 생각하세요. 애착도 없는 고향을 고향이라고 부르는 건 이상하지 않습니까.”

“……좋아.”

“그리고 친구분의 결혼식 문제는, 제가 황태자님께 잘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아냐! 내가 말할게.”

케이든이 급히 아문의 말을 가로막았다. 아문에게 저를 대신해 나서 달라고 부탁할 생각은 없었다. 자신의 일을 그에게 미루고 싶지 않아서였다.

“전하께 아무런 말씀도 못 하실 걸 압니다. 괜한 걱정만 그 속에 산처럼 쌓아 두실 걸 알아요.”

케이든은 민망했다. 아문이 저를 너무 잘 알아서, 그것이 창피했다.

“미안해. 내가…… 너무 우유부단하고 한심하지.”

“신중하고 조심스럽다고 보는 게 좋겠죠.”

“…….”

“황태자님의 성정이 더러운 편이니, 그분을 상대하기 더더욱 어려우실 테고요. 케이든 님만 그런 게 아닙니다. 다들 그래요.”

“아문. 너, 정말 나 말고 다른 사람이 있을 땐 그런 말 하지 마. 큰일 나.”

잔뜩 목소리를 낮춘 케이든이 충고 아닌 충고를 내놨다. 너무 솔직한 아문이 걱정돼서 그랬다. 더군다나 아사드의 성격이 강한 걸, 성격이 나쁘다 과장하기까지 하지 않았는가.

“네. 그런 말은 케이든 님 앞에서만 하겠습니다.”

아문의 웃음 섞인 말소리가 발코니에 침묵을 가져왔다. 청명한 하늘만큼이나 깨끗한 고요였다.

“아문.”

“네.”

“……고마워.”

“…….”

“내 마음을 알아줘서 고마워.”

그리고 케이든은 다시 한번 아문에게 감사를 전했다.

“제가 말을 잘 전해 드릴 테니, 너무 염려 마세요.”

“……응.”

“대신, 케이든 님을 보필할 시종 자리는 제가 차지하는 걸로 하겠습니다. 엘바에 가게 된다면요. 호위야 능력 있는 자라면 누가 붙어도 괜찮지만, 바로 옆을 지켜야 할 시종은 얘기가 달라지죠. 아무나 붙일 순 없습니다.”

“네가 함께해 주면 나는 정말 좋지.”

“뭐, 대충, 같은 상단에서 일하는 선후배 사이라고 치면…… 붙어 다니는 게 이상해 보이지도 않겠죠.”

아문의 입가에도 슬그머니 미소가 피어올랐다.

케이든은 문득, 왕국의 귀족 자제들처럼 차려입은 아문을 떠올려 봤다. 크라바트 매듭을 리본처럼 묶어 놓으면 정말 귀엽고 똘똘해 보이겠지 싶었다. 아문은 질색을 하겠지만 말이다.

“이상한 생각을 하고 계신 듯한데.”

“아냐, 이상한 생각이라니.”

“…….”

“진짜야. 이상한 생각 안 했어. 그냥, 아문 네가 왕국의 도련님들처럼 옷을 차려입은 걸 상상해 본 정돈데……. 정말 잘 어울릴 것 같아서…….”

케이든의 목소리가 흐려졌다. 이상한 생각을 하지 않았다고 했지만, 정작 그 생각을 입 밖으로 내뱉고 보니 어딘가 이상하게 느껴져서 그랬다.

그래도 왕국의 복식과 아문이 잘 어울릴 것 같다는 말은 진심이었다. 영리해 보이는 아문을 모두가 귀족 자제나 상단 후계자쯤으로 여길 게 분명했다.

케이든은 자신이 가진 돈을 속으로 세어 봤다. 정말 왕국에 갈 수 있다면, 엠마의 결혼식에 참석하게 된다면, 아문이 동행해 준다면…… 케이든은 아문에게 어린 신사들이 입을 법한 정장을 선물해 주고 싶었다. 불쑥 치솟은 소망이었다.

농장에서 일할 땐, 제 몸값을 갚느라 봉급을 제대로 받지 못했었다. 하지만 상단주의 저택에서는 봉급을 꼬박꼬박 받았다. 일터 밖으로 나갈 일도, 사람을 만나거나 무언가를 사는 데 돈을 쓸 일도 없어 무식하게 모아 두기만 했었지만 말이다.

아무래도, 언젠가 이런 일에 쓰려고 돈을 더 아껴 뒀던 모양이었다.

아크를 떠나야 할 때를 대비해야 하니, 모은 돈을 다 쓰지는 못할 거다. 아문에게 아주 좋은 옷을 사 주진 못할 터였다. 그래도 가능하다면, 자신의 바람이 꼭 이루어지길 바랐다.

“뭐, 저 역시 그렇게 생각합니다. 제가 뭘 입건 정말 잘 어울릴 거라고요.”

자신만만한 얼굴을 한 아문이 가볍게 말했다. 이제는 너무나 익숙해진 뻔뻔함이었다.

“왕국의 신사들 같은 차림새라는 것이 몸을 조이는 정장을 뜻한다면, 케이든 님과도 잘 어울리겠죠.”

“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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