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케이든이 저도 모르게 되물었다.
그는 자신이 신사들의 복식과 얼마나 어울리지 않는지 이미 잘 알고 있었다. 알렉스의 옷을 입어 본 적이 있어서였다.
이상한 명령에 따라 억지로 입게 되었던 근사한 정장이, 그 부드럽고도 불편한 천의 감촉이 케이든은 아직도 생생히 떠올랐다.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이 남의 옷을 몰래 훔쳐 입은 부랑자처럼밖엔 보이질 않았었다. 수상쩍은 자가 귀한 옷을 입고 있다며 치안대가 잡아가도 무어라 할 말이 없을 정도였다.
“나는 그냥…… 남의 옷을 잘못 입은 사람처럼 보일 거야.”
“흠. 나중엔 제 말에 동조하시게 될 겁니다. 어차피, 케이든 님께서도 신사의 모습을 하셔야 될 테고요. 혼인식, 아니 북부의 결혼식에 참석하시는 거니까요.”
아문의 말을 들은 케이든이 일단은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너무 정신없이 굴었구나 싶었다. 아문에게 옷을 입힐 생각만 했지, 제 행색에 관한 염려는 하지 못하고 있었다.
더군다나, 아직 북부행에 대한 허락이 떨어진 것도 아니었다. 그저 아문이 말을 전해 주겠노라 이야길 해 줬을 뿐이었다. 그런데도 엠마의 결혼식에 참석할 수 있다는 가능성에 들떠 버렸다.
“제가 상단주라면, 고향 친구의 혼인식에 참석하기 위해 휴가를 낸 직원에게 돈을 아끼지 않을 겁니다. 작은 상단의 주인이니 큰돈을 쓰지는 못하겠지만, 적당해 보이는 새 옷 한 벌 마련할 정도의 돈은 쥐여 주겠죠.”
“……걱정되네. 그런 옷을 입고 밖에 나가 본 적이 없어서.”
“저 역시 그렇습니다. 두 사람 모두 경험이 없다니, 참 다행이죠.”
“왜?”
“어색함을 함께 나눌 수 있을 테니까요. 잘된 일 아닌가요?”
어색함을 나눈다. 그 말이 왜인지 참 좋게 들렸다. 묘한 안도가 찾아왔다.
“아문.”
“네.”
“정말 고마워.”
“이미 고맙다고 말씀하셨는데요.”
“하지만 계속 고마운걸.”
“……북부행이 어떻게 될지 아직 모릅니다. 실망하시게 되면 어쩌시려고.”
“알아. 그래도 고마워. 엘바에 가지 못하더라도 괜찮아. 나는, 네가 마음 써 준 것만으로도 기뻐.”
케이든은 미소 지었다.
그런 케이든을 빤히 보던 아문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살짝 몸을 굽힌 그가 아래에 있는 케이든에게 불쑥 손을 내밀었다.
“……다시 안으로 들어가시는 편이 좋을 듯합니다. 해가 너무 강해요. 날이 더워지는 게 느껴집니다.”
케이든은 아문이 내민 손을 순순히 붙잡았다. 살이 맞닿는 순간, 아문으로부터 뜨거운 열기가 옮겨붙었다. 아문이 말한 더위가 아무래도 그에게 먼저 찾아온 모양이었다.
“응. 빨리 들어가자.”
아문을 따라 자리에서 일어나며 케이든은 말했다. 기쁨이 묻어 있는 목소리가 다정했다.
* * *
꿈만 같게도, 케이든은 엠마의 결혼식에 참석할 수 있게 됐다. 이동 시간을 포함한 4박 5일간의 짧은 일정이었다.
〈노을이 지기 직전에야 루아나에 도착할 겁니다. 바로 다음 날 정오에 결혼식에 참석하시게 될 거고요. 그 후에 올 하루는…… 휴식을 취하며 자유롭게 보내시면 됩니다. 하실 수 있는 일이 많지는 않겠지만요.〉
비밀을 유지하는 것에도 한계가 있으니 일정을 여유롭게 잡기 어렵다며 아문은 사과를 건넸었다.
하나 케이든은 짧은 일정에 조금도 불만을 품지 않았다. 오히려 엘바에 오래 머무를 필요가 없어 잘됐다고 생각했다. 케이든은 그가 떠나온 북부의 땅이 조금도 그립지 않았다. 그저 엠마의 결혼식을 볼 수 있다면, 그녀와 했던 약속을 지킬 수 있다면 그걸로 족했다.
혹여나 말도 안 되는 우연에 발이 걸려 알렉스와 마주치지 않을까, 그런 걱정이 들기도 했다. 두려웠다. 하지만 불안에 숨이 막힐 정도는 아니었다.
서먼 백작가의 농장은 수도에서 멀찍이 떨어진 곳에 있으니, 제가 일부러 찾아가지 않는 이상 알렉스를 마주할 일은 없으리라. 그래도 걱정이 되면 숙소 안에서만 가만히 시간을 보내면 됐다. 아문의 옷이야, 엠마의 결혼식 전에 잠시 시간을 내 살 수 있을 것이다.
케이든은 기쁨과 고마움만을 느끼고 싶었다. 엠마의 초대에 응할 수 있다는 사실이 기뻤고, 북부에 가는 걸 허락해 준 아사드에게, 저와 함께해 줄 아문에게 고마웠다.
‘돌아오면…… 전하께도 감사를 전해야지.’
아사드가 윗분들의 허락을 받아 냈다는 이야기를 시종장 사반을 통해 전해 들었다. 하지만 요 며칠 아사드를 만나지 못한지라 제대로 된 감사를 건넬 기회도 없었다.
도통 얼굴을 보기 어려운 건 아문 역시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에게 급히 처리해야 할 일이 생겼던 모양이었다. 제가 참견할 일은 아닌 것 같아 묻지 못했지만 말이다.
케이든은 창문이 없는 마차에 몸을 실었다. 평범한 상단에서나 쓸 법한 투박하고 커다란 짐마차였다.
하지만 그 내부는 겉과는 달리 아주 안락하고 포근했다. 마법사들이 걸어 준 온갖 마법은 덤이었다. 위장을 하느라 안과 밖을 다르게 만들어 둔 거였다.
푹신한 자리에 앉은 케이든은 마차 벽에 멋스럽게 늘어진 천을 보며 괜스레 뺨을 쓸었다. 마차의 내부를 꾸미느라 고생했을 이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어 민망했다.
위장은 짐마차만 한 것도 아니었다. 낡은 후드 망토를 뒤집어쓴 호위 두 사람이 마부의 행세를 하며 앞에서 말들을 몰고, 다른 호위 셋이 상단의 일행인 척 뒤를 따를 거라고 했다. 황태자비의 출궁이 완전한 비밀에 부쳐졌으니, 호위 역시 다른 사람의 흉내를 내는 게 당연하다면서였다.
아문은, 일전에 말한 대로 케이든의 후배가 되기로 했다.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동선을 확인해 본 뒤에 마차 안으로 들어오겠다고 했는데…….
‘조금 늦네.’
슬그머니, 불안이 고개를 들어 올리려 했다. 굳이 느끼지 않아도 될 불안을 끌어모으는 스스로가 한심했다. 저보다 어린 아문에게 의지하려 드는 게 창피하기도 했다.
그때, 짐마차의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불안이 섞인 상념이 순식간에 우그러졌다. 케이든은 곧장 고개를 들었다.
“아문…….”
케이든이 내놓은 이름이 허공으로 흩어졌다. 받아 줄 사람 없는 부름으로 변해 버렸다.
마차 안에 들어선 남자를 마주한 케이든은 순간 말을 잃었다. 그의 표정 역시 잠시 흐릿해졌다.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걸까, 그런 의심이 들어 입을 다물게 됐다. 제 시야에 담긴 풍경이 너무 비현실적이라 그랬다.
“뭘 그렇게 놀라?”
짐마차에 가볍게 몸을 실은 남자가 퉁명스레 물었다.
곧이어 문이 닫히는 소리가 짐마차 안에 퍼졌다. 평범한 짐마차라면 들어서는 것만으로도 크게 흔들렸을지 모를 큰 키와 좋은 체격을 가진 남자는, 그러니까, 아문이 아닌 남자는…….
아사드였다.
“아문이 아니라 내가 와서 실망했어?”
삐딱하게 웃어 보인 아사드가 케이든과 마주 앉았다.
케이든은 상단의 일꾼들이 입을 법한 옷을 걸친 남자를 봤다. 금을 녹여 덧입힌 듯 영롱한 황금색 눈동자를 짙은 갈색으로 덮어 숨기길 선택한 남자를, 그럼에도 여전히 빛을 잃지 않은 남자를 빤히 바라봤다. 아사드가 제 앞에 있다는 사실이 너무 혼란스러워 아무런 말도 내뱉질 못했다.
“……눈 색 좀 달라졌다고 남편을 알아보지 못하는 건 아니지? 아니면, 옷이 문제야?”
입가에서 웃음을 지운 아사드가 괜히 매무새를 가다듬어 봤다.
위장을 위한 복장을 갖춰 입은 아사드의 모습이 이상하진 않았다. 도리어 너무 잘 어울렸다. 하나 본인이 나서서 직접 말하지 않는 이상, 그 누구도 아사드가 상단의 일꾼이라고 여기지 않을 것 같았다. 어디 좋은 곳에 나들이를 가는 사람처럼 차려입었다는 착각을 하게 될 정도였다.
“눈이 금색이면 너무 튀잖아. 내가 황족인 걸 알아봐 달라고 유세 부리는 것도 아니고. 그래서 색을 바꾼 거야. 내가 마법을 쓸 수 있다는 걸 당신이 잊지는 않았겠지만, 뭐, 그래.”
입을 다문 케이든의 낯을 살피며 아사드는 주절주절 말을 늘어놨다. 문장 사이사이에 끼어든 머뭇거림과 어색한 끝맺음이 도통 아사드와 어울리지 않았다.
“왜 전하께서 여기에…….”
어색하게 말을 끝맺은 건 케이든 역시 마찬가지였다. 다만, 자의로 끝을 낸 게 아니라 타의로 말을 흐리게 됐다.
“왜긴. 당신을 따라 엘바에 가려고 왔지. 무슨 이유가 더 있겠어.”
아사드의 말이 짐마차 안으로 침묵을 끌어왔다. 말들이 발을 구르는 소리만이 저 앞에서 자그맣게 들려오기 시작했다. 곧 마차가 출발하려는 모양이었다.
“심심해서 이런다고 생각해.”
“네?”
“심심해서. 당신 따라 엘바 구경이나 갈까 하고 아문 자리를 갈취한 거야.”
눈앞의 남자가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저 혼자 마음에 품고 있던 평범한 알파였다면, 아사드와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다는 사실에 기쁨만을 느꼈으리라.
하지만 아사드는 제가 아는 평범함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고작 심심하다는 이유로, 제국의 황태자가 이리 쉽게 자리를 비워도 되는 걸까? 아사드처럼 바쁘게 사는 사람이 그럴 수 있을까 싶었다.
더군다나, 신분을 숨기고 엘바에 방문하겠다는 아사드를 황실의 사람들이 가만히 내버려 둔다는 게 너무 이상했다. 상식이 부족한 제 머리로도 도통 이해가 가질 않았다.
“다른 분들도, 전하께서 여기 계신 줄 아시나요?”
케이든은 자신을 찾아온 의문을 조심히 입에 담아 봤다.
“모르는데.”
아사드가 무심히 내놓은 답변이 케이든의 입을 벌어지게 했다. 심장이 덜컹, 아래로 내려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