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름다운 신부 (51)화 (51/97)

‘자신만만한 낯짝을 가진 놈이, 칙칙한 놈의 기운을 다 빨아먹은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무슨 관계일까. 친구라기엔 나이대가 맞질 않고, 연인이라기엔 어딘가 어색함이 느껴졌다.

우중충한 쪽이 광채가 나는 쪽의 눈치를 너무 봤다. 평생을 거침없이 살아왔을 듯한 헬리오 남자의 면상을 보아, 주종 관계인가 싶기도 했다. 하나 사람을 부릴 정도의 돈이 있는 자가 이 의상실을 찾을 리 없었다.

혹여나 저들이 어두운 일을 한다면 저럴 법도 했다. 없는 것들끼리도 쓸데없이 계급을 나눠 대는 게 뒷골목을 거니는 인간들이니 말이다. 헬리오 남자의 큰 몸이며 음울한 구석이 있는 미남자의 뺨에 번진 옅은 흉터가 밀로아의 추측에 힘을 실어 줬다.

‘내가 참견할 일은 아니지.’

의상실의 옷만 팔아 준다면, 그 정체가 뭐든 상관없었다. 밀로아는 가볍게 결론을 냈다. 금세 흥미가 식기도 했고 말이다.

자세를 바로 한 밀로아는 재봉 도구를 미리 챙겨 두기로 했다. 옷이야 금방 고를 테니, 옷을 수선할 준비를 해야 했다. 팔다리가 긴 사람들이다 보니 크게 수선할 것도 없겠지만 말이다.

재단사 밀로아의 하나뿐인 조수이자 의상실의 하나뿐인 직원인 라이나는 손님들이 나누는 대화를 귀담아듣고 있었다. 아니,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라기보다는…… 한 사람이 일방적으로 늘어놓는 말을 듣는 중이었다.

동대륙에서 건너온 금사 같은 머리칼을 가진 남자는 제 선배라는 이의 옷을 고르는 일에 한창이었다. 가끔은, 바로 옆에 있는 그 선배에게 이것저것 묻기도 했다. 하지만 선택을 질질 끌지는 않았다. 접객원의 입장에선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이걸로 준비해 주세요.」

아문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듯한 남자는 말했다. 재단사님이 아끼는 남성 정장을 가리키면서였다. 같은 디자인에 천만 다른 걸 써서 가격에 차등을 둔 채 늘어놓은 다른 옷들과 달리, 딱 한 벌만 만들어 둔 것이기도 했다.

「보는 눈이 정말 좋으세요. 탁월한 선택이십니다.」

「그래요?」

「이 가격에 이렇게 좋은 옷감을 쓴 정장은, 이 일대 의상실 어딜 가도 찾아보기 힘드실 거예요.」

세 블록 뒤에 있는 고급 의상실을 빼면 말이죠. 그 말은 가볍게 목구멍 뒤로 삼켰다.

「다행이네요. 옷을 새로 맞출 시간은 없거든요.」

만족스럽다는 얼굴을 하고, 남자 아문은 가볍게 미소 지었다. 제 취향은 아니지만 참 잘난 외양이었다.

라이나와의 대화를 끝마친 아문은 그의 옆에 있던 남자에게로 완전히 시선을 돌렸다. 아문이라는 남자가 선배라고 부르는 이였다.

‘뭐지…….’

라이나의 표정이 잠시 흐릿해졌다간 원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말수가 적은 남자가, 일단은 그의 후배일 남자를 앞에 두고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이 이상하게 눈에 걸렸다.

둘 사이를 맴돌고 있는 분위기는 밝았다. 하지만 그 밝음 사이로 어딘가 불온한 냄새가 났다. 아니, 정확히는 아문이라는 자에게서 불온한 냄새가 느껴졌다.

「자. 이제 선배 차례예요. 내가 선배의 옷을 골랐으니, 이번엔 선배가 내 옷을 골라 줘야죠.」

「응. 그래도, 음, 네가 고르는 게 더 좋을 것 같은데.」

「왜요?」

「나는 보는 눈이 없어서…….」

「괜찮아요. 이분 도움을 받으면 되죠.」

쭈뼛대는 남자와 눈을 맞추며 아문이라는 자가 웃어 보였다. 퍽 다정한 웃음이었다.

두 남자를 보는 라이나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도저히…… 저들이 평범한 선후배로 보이지 않아서 그랬다.

적어도 아문이라는 남자가 그의 선배에게 몹쓸 수작을 부리고 있다는 건 확실했다. 이미 건전하지 못한 연인 관계를 맺은 상태일 확률도 충분해 보였다.

라이나는 의상실을 찾은 남자들을 아닌 척 예의 주시하게 됐다. 남의 일에 신경 좀 작작 쓰라고 말하는 밀로아의 얼굴이 라이나의 머릿속을 꽉꽉 메웠다. 그런데도 신경이 쓰였다.

선배라는 남자는 영 미덥지 못한 작자의 손에 이끌려 의상실을 둘러봤다. 남자가 그의 후배뿐 아니라, 저 멀리 계신 재단사님이며 제 눈치까지 슬슬 살피는 모습이 어딘가 안타까운 기분을 들게 했다.

하지만 곧 사람 대신 다른 것에도 시선을 주게 됐다. 남자는 벽에 걸린 정장에 마음을 뺏긴 눈치였다. 귀족 자제들의 사교계 데뷔 무도회와 비슷하지만 큰 의미가 부여되지는 않는, 성인식 연회를 준비하는 청년들을 위한 정장이었다.

옷을 앞에 두고 잠시 깊은 고뇌에 잠겼던 남자가 시선을 내리고 라이나를 찾았다. 남자와 눈이 마주친 라이나는 뭐든 말해 보라는 듯 싱긋 웃어 보였다.

그의 후배에게 했던 것처럼 옷을 정말 잘 고르셨다고 칭찬을 건네고 싶었다. 하지만 남자가 부담을 느낄까, 차마 입을 열지 못했다.

「이 친구가 옷을 입어 볼 수 있을까요?」

「그럼요, 당연하죠.」

라이나는 재빨리 답했다. 급히 목소리를 낸 건, 옷을 입을 이 역시 마찬가지였다.

「내가 당장 입어 봤으면 좋겠어요? 왜? 길이가 안 맞을까 봐?」

「……아니. 안 어울리면 어떡해.」

남자는 아문이라는 손님의 눈을 피하며 중얼거렸다. 어색하게 낯을 굳힌 채 더듬더듬 말을 내뱉는 모습이, 그를 말을 배운 지 얼마 안 된 사람처럼 보이게 했다. 발음이나 어투엔 전혀 문제가 없는데도 말이다.

「나는 뭘 입어도 잘 어울려요.」

그래, 좋겠다. 다른 남자의 답을 들은 라이나가 속으로 생각했다.

라이나는 벽에서 옷을 내렸다. 저들을 살피는 건 살피는 거고, 옷을 파는 건 파는 거였다. 대화가 더 이어지지는 않았다. 라이나가 옷을 내리는 걸 본 밀로아가 아문을 탈의실로 안내한 덕분이었다.

돌아와 옷을 건네받은 밀로아는 곧장 아문을 따라 탈의실 안으로 들어갔다. 곧, 밀로아가 탈의실 바깥 커튼을 치는 소리가 의상실 안에 울려 퍼졌다.

라이나는 탈의실에 들어간 남자가 골라 뒀던 다른 남자의 옷을 꺼내 들었다. 미리 들고 있다가 재단사님이 나오면 건네려 했다. 이것 또한 수선을 해야 할 테니 말이다.

하지만 곧, 놀란 토끼 눈이 된 선배께 들고 있던 옷을 빼앗기게 됐다. 옷을 꺼내다 발이 꼬여 휘청인 라이나를 보고, 옷이 길고 무거운 탓에 몸을 가누지 못한 것이라 오해해 그런 것이었다.

라이나는 남자에게 저는 괜찮다고 반복해 말했다. 하지만 먹히지 않았다. 결국 옷을 돌려받는 건 포기하고 남자의 곁에 가만히 서는 쪽을 택해야 했다.

‘창피해.’

흠흠. 속으로 목소리를 가다듬은 라이나가 옆에 있는 남자를 흘깃댔다. 다른 손님이 나오기만을 기다리며 말없이 있자니 입이 간지러웠다.

「후배분과 사이가 각별하신가 봐요. 선후배끼리 이런 의상실에 함께 오는 경우가 거의 없는데.」

라이나가 남자에게 슬쩍 말을 건넸다.

「……그런가요.」

「아, 손님께서도 옷을 입어 보셔야죠. 이따, 탈의실로 바로 안내해 드릴게요.」

「아뇨, 괜찮습니다. 저는 그대로 가지고 갈게요.」

「음. 기장이 아주 짧거나 길거나, 작을 것 같지는 않지만……. 살짝, 걱정이 드네요. 재단사님께선 환불을 절대 안 해 주시거든요.」

참견을 하느냐 마느냐의 갈림길을 앞에 두고 라이나는 말을 흐렸다.

「조금 크고 길어도 됩니다. 두 벌이나 수선을 맡길 시간이 없어서요.」

그런 라이나에게 남자는 말했다. 조금 긴 정도가 아니라, 바닥에 질질 끌고 다녀야 할 정도로 기장이 맞질 않아도 상관없다는 듯한 무덤덤한 낯을 하고서였다.

정말 괜찮으니까 괜찮다고 말한 거겠지. 라이나는 남자의 말을 수긍했다. 재단사에게 몸을 보이는 걸 꺼리거나, 타인이 제 몸에 손을 대는 걸 싫어하는 손님들이 꽤 있으니 더욱 그러려니 싶었다.

만약 제 옆에 있는 남자가 오메가라면, 알파인 재단사님이 더욱 불편할 수도 있었다. 그런 경우엔 제가 그를 따라 들어가면 되지만 저 남자는 그것 역시 원치 않을 듯 보였다.

「그러니, 저는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제 후배의 옷만 딱 맞게 수선할 수 있으면 돼요.」

「후배분의 착장을 확인하시려는 이유에, 수선도 있었군요.」

「수선도 그렇지만…… 기왕이면 더 잘 어울리는 걸 찾아서, 그걸 입히고 싶어서요. 뭘 입어도 모난 부분 없이 멋있을 친구지만요.」

맞아요. 뭘 입어도 멋있으실 거예요. 라이나는 가볍게 답했다. 손님이 반기지 않을 괜한 말은, 거절당한 제안은 다시 꺼내지 않기로 했다. 손님을 부담스럽게 하지 말자. 오늘도 되뇌어 보는 원칙이었다.

「그래도 후배분이 골라 주신 옷이 마음에 드시나 봐요.」

다른 말을 꺼내는 건 괜찮았다.

「소중히 끌어안고 계시잖아요.」

원래라면 제가 들고 있어야 할 옷을 대신 챙긴 남자를 향해 라이나는 웃어 보였다. 남자는 조심히 옷을 끌어안고 있었다. 탁자 위에 올려 둬도 된다고 말했는데도 말이다.

「……네. 마음에 듭니다.」

어색한 웃음과 함께 남자는 짧은 답을 내놨다. 닫힌 탈의실을 바라보는 두 눈과 끌어안은 옷가지를 슬쩍 쓸어 보는 괜한 손길 위에, 미처 숨기지 못한 쑥스러움이 묻어 있었다.

라이나는 자신이 두 손님에게 품은 오해를 아주 약간은 긍정적인 방향으로 틀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아주 약간만 말이다.

「아, 곧 나오시겠네요.」

커튼 너머의 공간에서 새어 나오는 분주한 소리를 들으며 라이나는 말했다.

「옷을 다시 고를 생각은 안 하셔도 될 것 같아요. 이미 최고를 찾아내신걸요. 제 눈에는 손님께서 고르신 것이 가장…….」

하나 탈의실에 들어갔던 남자가 커튼을 요란히 열어젖히고 나온 탓에 말을 더 이어 가지 못했다. 커튼 봉이 바닥으로 굴러떨어지지 않은 게 다행이란 생각이 들 정도로 정신 사납고 다급한 등장이었다.

후배께선 옷을, 말 그대로 갖춰 입고만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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