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름다운 신부 (56)화 (56/97)

그래도, 예쁘다는 소리를 이렇게 툭 내뱉게 될 줄은 몰랐다.

고작 하루도 안 되는 짧은 시간을 선배라는 이름으로 지냈을 뿐인데, 그새 선배 역할에 익숙해지기라도 한 모양이었다. 아문의 이름을 빌린 아사드가 꼭 배우처럼 연기를 잘해서 영향을 받은 걸지도 몰랐다.

아사드를 편히 대하는 스스로가, 케이든은 참 낯설게 느껴졌다. 늦게나마 민망하기도 했다. 엠마의 결혼식이 완전히 끝을 맺은 뒤엔 다시 입을 다물고 뻣뻣하게 굴게 되겠지만 말이다.

“……꽃. 계속 꽂고 있어야겠네. 예쁘다고 해 주니까, 빼기 좀 그래.”

잠시 침묵하던 아사드는 이내 케이든을 따라 가만히 웃었다. 따로 말을 더하진 않았다. 속으로 ‘나도 내가 예쁜 거 아는데.’, 그런 생각을 하고 있지 않을까 싶었다.

그 후에도 대화가 더 이어지지는 않았다. 엠마와 알리나, 결혼식의 주인공들을 바로 마주하게 돼서 그랬다.

자신의 배우자를 뒤로하고, 엠마는 뜀박질에 가까운 걸음걸이로 케이든을 향해 왔다. 두 손에 드레스 자락을 꽉 쥐고서였다.

「케이든!」

자기보다 키가 큰 케이든을 와락 끌어안은 엠마가 그 자리에서 방방 뛰었다. 몸을 숙인 케이든은 엠마의 뒤로 보이는 여자의 눈치를 살피며 엠마를 마주 안아 줬다.

무슨 짓을 해도 몸에 밴 흙냄새가 가시질 않는다고 툴툴대던 엠마에게선 이제 찻잎 향기와 꽃향기가 났다. 깡마르기만 했던 몸도 제법 살이 붙어 통통해졌다. 그게 좋아서, 케이든은 웃었다.

포옹을 푼 엠마는 케이든의 어깨를 흔들며 질문을 퍼부었다. 질문이라기보단…… 케이든의 새로운 일자리와 더운 사막 생활에 대한 염려, 몹쓸 놈에게 따돌림을 당하는 게 아닌가 하는 걱정을 쏟아 낸 것과 다름없었다.

모두, 이미 지난 편지 속에 한차례 답을 실어 보냈었던 걱정들이었다. 엠마 역시 케이든이 전한 답신을 받아 봤을 터였다.

그래도 케이든은 모른 척 엠마에게 다시 한번 답을 내줬다. 글을 쓰는 일에 서툰 두 사람에게 필요한 건, 몇 가지 단어의 어색한 조합으로 만들어진 문장이 아니라 서로의 눈빛과 목소리였다.

엠마가 아사드에게 시선을 준 건, 조금의 시간이 더 흐른 후였다.

「일 때문에 루아나에 함께 오게 된 후배분?」

「네, 맞습니다.」

「왕국어도 잘하시는구나. 너무 반가워요! 이렇게 결혼식에 오실 줄은 몰랐는데!」

눈을 동그랗게 뜬 엠마가 아사드의 손을 덥석 잡았다. 꼭 붙든 아사드의 손을 위아래로 힘차게 흔들며 웃었다. 아사드 역시 그런 엠마를 따라 웃어 줬다. 손에 힘을 빼 주면서였다.

「저 역시 정말 반갑습니다. 아름다운 결혼식에 참석해 축하를 전해 드릴 수 있어 기쁘고요. 아문이라고 편히 불러 주세요. 친근하게 대해 주시면 더 좋고요.」

「어떻게 그럴 수 있겠어요.」

「선배님의 가장 가까운 벗이 아니십니까. 그렇다면, 제게도 가까운 분이죠.」

아사드는 아문의 이름을 대며 엠마에게 그리고 알리나에게, 스스로를 소개했다.

「케이든이 편지에 거짓말을 썼을 줄이야. 이렇게 잘생기고 체격 좋은 후배를 자그맣고 귀여운 어린애처럼 묘사하다니. 완전 사기꾼 아닌가요?」

「선배 눈에는 제가 작고 귀여운 애처럼 보였나 봐요.」

「아니, 그게…….」

「편지가 오고 가는 사이에 키가 훌쩍 커 버리기도 했고요.」

당황한 케이든과 몸을 붙이며 아사드는 말을 더했다. 그 틈에 다시 입을 다문 케이든은 너스레를 떠는 아사드를 빤히 바라만 봤다.

엠마와 말을 나누는 아사드는 이제 막 사회생활을 시작한 건실한 청년처럼 보였다. 얼굴이 다소 과하게 잘났다는 점만 빼면 말이다. 왜인지, 그게 신기하게 느껴졌다. 아사드의 몰랐던 일면을 알게 된 듯해 좋기도 했다.

「……아크에서 루아나까지. 먼 길을 달려와 줘서 고맙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 당신이 없었다면, 내 신부는 밤새 눈물을 쏟았을 겁니다.」

엠마의 배우자인 알리나가 케이든에게 나지막이 말을 건넸다. 차갑고 무감해만 보이는 낯을 하고서였다. 하나 그녀가 입에 담은 감사만은 순백한 진심 아래에서 나온 것이었다.

「맞아. 나, 밤새 울었을 거야. 케이든 네가 보고 싶어서.」

알리나의 말을 들은 엠마가 말을 더했다. 아사드와 말을 나누는 와중에도 제 배우자의 목소리를 놓치지 않은 모양이었다.

말을 더듬으며 엠마에게 어색하게 반응한 케이든은 슬그머니 시선을 돌렸다. 형형한 알리나의 눈빛을 피한 거였다.

엠마의 주도로 대화는 두런두런 이어졌다. 케이든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엠마는 그와 말을 나누면서도 계속해 아사드의 얼굴을 살폈다. 그러다 케이든을 향해 눈 한쪽을 찡끗대며 무언의 말을 건네기도 했다. 도통 해석이 되질 않는 표정이었다.

「케이든은 어떻게 지내고 있으려나, 걱정이 많았거든요. 그런데 오늘 보니까, 제 걱정이 조금 과했던 건가 싶어요. 이렇게 밝고 성격 좋은 후배가 옆에 있을 줄 몰라서 그랬던 거죠. 음, 매일매일 즐거울 것 같은데. 심심할 틈이 없겠는데요?」

「그럴까요?」

「그럼요. 케이든 같은 애가 친구 결혼식에 후배랑 같이 온다는 것 자체가, 어유, 말로 다 못 하겠다.」

말을 마친 엠마가 기분 좋게 웃었다. 장난스러운 얼굴이었다.

동행이 있다는 제 편지에 회신하며 엠마는 그 사람과 무슨 사이냐고 반복해 물었었다. 함께 일하는 어린 후배라고 하자 더는 묻지 않았었는데, 막상 얼굴을 마주하고 보니 다시 호기심이 드는 모양이었다.

「아문은 북부에서 해야 할 일이 있어서 겸사겸사 같이 온 거야. 시간이 떠서 여기까지 함께 와 줬고.」

혹여나 엠마가 이상한 오해를 품게 될까, 케이든이 급히 말을 꺼냈다. 하지만 아사드가 대화 사이로 끼어들면서 분위기가 바뀌었다.

「뭐, 루아나에 일이 있긴 합니다. 그보단, 선배 혼자 먼 길을 이동할 게 걱정돼서 따라온 거지만요.」

그 속을 모를 아사드가 내놓은 몇 마디에 케이든의 부정이 어딘가 이상야릇해져 버렸다. 아사드와 엠마가 수다를 떠는 걸 바라보며 케이든은 입만 달싹여야 했다.

두 사람 사이를 오고 가는 말소리를 듣는 건 재밌었다. 케이든은 아사드가 듣는 사람의 기분을 우쭐하게 해 주는 화법을 쓸 줄 안다는 걸 처음 알았다. 가끔은 그가, 정말 상단에서 일하는 상인처럼 보일 정도였다.

아사드는 엠마에게 건네는 모든 대화를 제국어가 아닌 왕국어로 내뱉고 있었다. 그것이, 이제 더는 놀랍지 않았다.

마차에 올라탄 아사드가 왕국어를 배워 뒀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했을 때, 케이든은 별생각이 없었다. 금방 말을 배운 아사드가 대단하다 싶기만 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의아함이 커졌다. 제국의 황태자가 되는 사람이 한 가지 언어밖에 쓰지 못할 리 없다는 가능성을 그제야 떠올리게 됐다.

나와 말을 섞는 게 싫어서, 그래서 제국어만 썼던 거구나.

케이든은 그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왕국어를 유창하게 쓸 수 있다는 사실을 반년 넘게 숨겨 왔던 남자가 이제는 제 앞에서도 거침없이 왕국어를 쓰게 됐다. 그게 기쁜 일인지, 서글픈 일인지…… 케이든은 알 수가 없었다.

기분이 좋아진 엠마는 밝게 웃었다. 아사드를 향해 호감 섞인 말들을 쏟아 내면서였다. 한데 모아 풀자면, 예쁘고 잘생긴 데다 성격까지 괜찮은 후배가 내성적인 케이든과 친하게 지내 줘서 다행이라는 소리였다.

웃고 있는 건 아사드 역시 마찬가지였다. 케이든 역시 아사드와 엠마를 따라 어색하게나마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점점 싸늘해지는 알리나의 눈치를 보는 건 잊지 않고.

케이든은 아사드의 옷자락을 슬쩍 붙잡아 당겼다. 아사드는 케이든의 뜻에 따라 순순히 뒤로 물러나 줬다. 케이든과 거리를 더 가까이 붙이면서였다.

자연스레 고개를 숙인 아사드가 케이든의 귓가에 말 한마디를 속삭였다.

“당신 친구한테 잘 보이고 싶어서 이러는 건데. 별로야?”

별로라니. 아사드의 물음에 케이든은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엠마에게 좋은 모습을 보여 주고 싶어서 이러는 거라는데, 어찌하겠는가.

「케이든, 북부엔 얼마나 더 머물다 갈 거야?」

딱 붙어 선 케이든과 아사드를 눈에 담으며 엠마는 물었다.

「내일 하루만 더 머물고…… 다시 아침이 밝으면 헬리오로 돌아가야 해.」

「아, 너무 이르다. 다른 숙소가 아니라, 여기 저택에 머물렀으면 더 좋았을 텐데. 너한테 제일 좋은 방을 내줬을 거야. 여기 후배분께도.」

안 그래도 아래로 처진 편인 엠마의 눈매가 더 아래를 향했다.

케이든 역시 엠마의 친절을 받아들여 이 저택에 머물고 싶었다. 하지만 밤새 아문을 도와 끝마쳐야 할 일을 핑계로 그 호의를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아직 하루가 더 남은 거니까. 음. 나쁘지 않아. 시간이 되면, 내일 오찬 자리를 따로 갖자.」

제 친구의 거절을 물고 늘어지지 않은 엠마가 쾌활한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제안보다는 선언에 가까웠다.

「엠마. 말은 고맙지만, 이제 막 식을 올린 부부의 시간을 뺏으면 안 되잖아.」

「으음. 하지만 결혼 기념 여행은 나흘 뒤에 떠나는걸. 그때까지, 나랑 알리나는 여유가 충분하니까 부담 느낄 필요 없어. 너한테 시간이 있느냐 없느냐가 제일 큰 문제지.」

「하지만…….」

「저도 초대해 주시나요?」

두 손으로 케이든의 어깨를 감싸며 아사드는 말을 보탰다. 케이든으로선 그 뜻을 모를 웃음과 함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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