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름다운 신부 (66)화 (66/97)

아문은 케이든이 가장 신뢰하는 말벗이자 그의 스승이었다. 그의 귀여운 동생 비슷한 역할을 하기도 했다. 그런 아문이, 실은 자신의 약점을 캐내고자 모습을 바꾼 배우자였다는 걸 알게 되면…… 케이든은 실망하고 슬퍼할 거다. 제게 배신감을 느낄 것이다.

그래도 해야 하는 일이었다.

케이든이 실망하더라도, 제 입으로 사실을 고해야만 했다. 헛소리처럼 들릴지라도 일단은 입을 열어 말하는 게 옳았다. 제 행동에 상처를 받은 이에게 자신의 잘못을 고백하고 진실하게 사과해야 했다.

아사드는 그가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제 신부에게 접근했다는 걸, 그 불순함이 케이든을 황궁 밖으로 내보내고자 하는 소망에서 탄생했다는 걸 그대로 전하기로 마음먹었다.

새로운 시작을 위해선, 그 어떤 가감 없이 진실만을 알려야 했다. 무엇은 숨기고 또 무엇은 드러내면서 자신의 거짓됨을 변론한다면, 그건 또 다른 거짓말을 낳는 것과 다름없었다.

누군가의 관용을 바라는 사람은, 그래선 안 됐다. 거짓을 솎아 낸 새로운 땅 위에서 케이든에게 용서를 구할 것이다. 케이든의 마음이 풀릴 때까지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리게 된다고 해도, 감당해야 했다.

‘……우기가 끝나기 전까지. 아문을 없애자.’

한결 서늘해진 낯으로 아사드는 뒤를 돌았다.

황태자비를 마주할 채비를 마친 아문의 새하얀 옷에는 잔주름이 보이지 않았다. 그 빳빳한 완벽함이, 걸음걸이마저 올곧은 아문을 더욱 단정히 보이게 했다. 실로 황태자가 가장 아끼는 심부름꾼이라 할 만한 자태였다.

7. 사막에 내리는 비

매일이 뜨겁고 건조한 사막에도 짧은 우기가 찾아왔다.

사막을 청소하는 시간.

대략 열흘 정도 계속되는 장마를 헬리오 사람들은 그렇게 불렀다. 비의 장막으로 세상의 눈을 가린 타라 신께서, 그녀가 부리는 다른 신들과 함께 너른 사막을 정화해 주고 있다고 생각해 그랬다.

우기 내내 헬리오 사람들은 몸가짐을 조심히 했다. 일을 해야 할 때가 아니라면 밖을 나서지 않았고, 신의 눈과 귀에까지 닿을 경솔한 짓을 저지르지 않기 위해 입을 삼가고 움직임을 아꼈다. 신들의 일을 방해해선 안 된다는 마음가짐 때문이었다.

안 그래도 차분하던 별궁 서관의 분위기 역시 짧은 우기를 맞아 더 깊은 적막에 빠졌다.

시원하게 쏟아지는 장대비가 세상을 두드리는 소리를, 케이든은 가만히 귀에 담았다.

빗줄기는 언뜻 거칠다 싶을 정도로 거셌다. 그런데도, 내리는 비가 두렵다는 느낌은 들지 않아 신기했다. 멍하니 바라보고 있자니 마음이 편안해지기까지 했다.

하나 계속 여유를 부리긴 힘들었다. 마주 앉은 아문에게 자꾸 시선이 가서 그랬다. 케이든은, 깊은 생각에 잠긴 아문이 신경 쓰였다.

저렇게 얼빠진 낯을 한 아문을 마주하는 건 흔치 않은 일이었다. 황태자비가 부재한 황실의 연회에 관해 열을 올리며 말을 쏟아 냈던 어느 날 이후로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심지어 오늘의 아문은, 어지간히 생각이 많아 보이던 그때보다도 몇 배는 더 머리가 복잡해 보였다.

케이든은 아문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모른 척을 하는 게 점점 더 힘들어졌다. 아문을 침묵하게 한, 넋이 나가게 한 이유에 제가 포함되어 있을 듯해 마음이 무거웠다. 괜한 말을 듣게 만든 것 같아 미안하기도 했다. 제가 잘못한 건 없다는 걸 알면서도 케이든은 그런 생각을 했다.

오늘 오전. 케이든은 평소보다 이른 시간에 자신의 주치의를 만났다. 그의 주치의인 라몬의 요청에 따라 준 거였다.

라몬은 얼마 전부터 별궁 서관에 새로이 상주하게 된 의사였다. 황제 헤세트의 밑에서 일하던 이로, 황제의 명을 받아 소속을 옮기게 됐다.

케이든에게 이제야 낯이 익숙해진 그는, 치료 마법사도 없이 홀로 황태자비를 찾아왔었다.

황태자비와 독대한 라몬은 남의 말에 자꾸만 끼어드는 놈을 떼어 두고 오는 일에 성공했다며 음산하게 웃음 지었다. 치료 마법사 없이 혼자 일하고자 검진 시간을 옮길 것을 요청한 모양새였다. 케이든 역시 친하지 않은 사람 둘을 동시에 마주하는 것보단 한 사람만을 마주하는 편이 좋았기에, 라몬을 따라 속없이 웃었었다.

하나 케이든이 라몬과 단둘이 있는 시간이 길어지지는 못했다. 아문이…… 안 하느니만 못한 노크와 함께 접견실의 문을 열어젖히며 등장한 덕분이었다.

아문은 예정보다 훨씬 이르게 케이든을 찾았다. 어떻게 알았는지, 침실이나 응접실이 아닌 접견실로 오기까지 했다. 케이든도 라몬도 아문에게 별다른 인사를 건네지 못하고 눈만 깜빡였다.

침입자와 다름없는 방문자는 케이든과 가까이 붙어 마주 앉아 있는 라몬을, 다른 사람의 건강이 아니라 본인의 건강부터 돌아봐야 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안색이 나쁜 남자를 흘겨봤다. 라몬을 보는 아문의 한쪽 눈썹이 삐딱하게 올라갔었다.

기묘한 대치가 계속 이어지진 않았다. 병약해 보이는 의사는 두고 케이든에게만 짧은 인사를 건넨 아문은 가벼운 걸음걸이로 접견실 안으로 들어섰다. 살포시 문을 닫으면서였다. 거칠게 문을 열고 들어올 때와는 달랐다.

아문은 라몬에게 손목을 붙잡힌 케이든의 뒤에 서는 걸 택했다. 자리를 잡은 아문은 그저 말없이 웃기만 했다. 가만히, 그들의 대화를 귀에 담았었다.

라몬은 아문의 방문엔 관심도 없어 보였다. 잠시 시선을 주는 게 끝이었다. 그는 자신의 말을 잡아먹으려 드는 빗소리가 짜증 난다며, 목소리를 키우는 데에만 신경을 쏟았다.

〈예정대로라면, 이달 안에 희락기가 와야 하지만…… 억제제를 복용하고 계시죠?〉

〈네, 그렇습니다.〉

슬쩍 고개를 돌려 아문의 눈치를 보던 케이든은 어물쩍 답했었다. 아문이 이런 얘길 들어도 되는 건가 당혹스러워 그랬다. 적어도 아문의 앞에선 라몬에게 말을 편하게 해야 하는 걸까, 고민이 들기도 했었다. 하나 나이가 저보다 10살은 더 많은 사람에게 되는대로 말할 순 없었다.

케이든의 답을 들은 라몬은 혀를 찼다. 그는 제 앞의 남자가 말을 낮추거나 올리거나, 그딴 문제엔 관심도 없다는 듯 여상한 얼굴을 했다.

〈아, 황태자비님이 제 동생이었다면 어땠을까요. 희락기 억제제니 뭐니 하는 그딴 약들, 당장 끊어 내라고 한마디 할 수 있었을 텐데요. 저와 혈연으로 얽히실 일이 없어 너무나 안타깝습니다.〉

결국 이렇게 한마디 하셨으면서……. 멋쩍음 섞인 웃음을 지으며 케이든은 속으로 생각했었다.

이제 막 30대 후반에 들어섰을까 싶은 라몬은 피곤이 덕지덕지 묻어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언제나 그랬다. 케이든을 찾아올 때도 마찬가지였다.

처음엔, 표정이 차가운 라몬이 어렵기만 했었다. 말이 빠른 그가 제 몸 이곳저곳을 살피며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많은 질문을 쏟아 낼 때면 정신이 하나도 없어졌다. 그가 뭐라고 하는지 잘 알아듣지 못하는 절 위해 리헤트가 대신 라몬의 제국어를 번역해 주기도 했었다.

그래도 이제는, 어느 정도 라몬에게 적응이 됐다. 라몬이 케이든을 위해 최대한 말을 느리게 하려고 노력해 준 덕이었다. 여전히 리헤트의 번역이 필요할 때가 있었지만 말이다.

라몬은 세상 모든 일에 반기를 들고 싶어 하는 청개구리이자 염세적인 투덜이였다. 하지만 동시에, 약자에겐 친절한 사람이자 지독한 수다쟁이기도 했다. 말투와 표정이 다소 거칠긴 해도, 그가 자신의 환자를 매우 염려하고 아낀다는 사실을 케이든은 금세 알게 됐다.

지금도 그랬다. 라몬은 케이든을 진심으로 걱정해 주고 있었다.

〈흠…… 황제 폐하께 봉급을 받는 사람이 궁의 암묵적인 법도를 어기라 말할 순 없겠죠. 황태자비님께서 어쩌실 수 없는 문제라는 것 역시 잘 알고 있으니, 괜한 말을 더하진 않겠습니다.〉

케이든의 뒤를 지키고 선 아문 때문인지, 라몬의 잔소리가 꼬리에 꼬리를 잡고 이어지지는 않았었다. 케이든에겐 다행인 일이었다.

하나 대화가 완전히 끝을 맺지는 못했다. 케이든과 라몬이 나누던 대화 속으로 별안간 아문이 끼어들었으니까.

〈희락기 억제제요?〉

아문은 라몬에게 물었다.

〈아. 소문의…… 아문이신가. 황태자님의 왼쪽 팔이었나 오른쪽 팔이었나. 여하튼, 그중 하나 되시는.〉

자꾸만 아래로 흘러내리는 무거운 안경을 붙잡으며 라몬은 반응했었다.

〈말장난은 됐고. 헬리오에 당도하신 이래로 계속, 황태자비님께서 억제제를 복용하고 계셨습니까? 그것만 대답해요.〉

〈희락기 억제제만이 아니지. 피임약도 아주 잘 챙겨 드십니다. 매일매일. 하루도 거르지 않으시고요. 하지만 안심해요. 아니지, 오른팔께서 안심할 일은 아니고. 황태자 전하께 안심하시라고 전해 주세요. 황태자비께선 황실의 비밀스러운 법도를 아주 잘 지키고 계신답니다.〉

라몬의 답을 들은 아문은 왈칵 미간을 구겼다. 그런 아문을 올려다보며 라몬은 피곤하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맥연히 빈정대며 말을 이어 갔다.

〈억제제 필요하지. 때에 따라선 아주 큰 도움이 돼요. 이야, 그래도 혹시 모를 일 방지해야 한다고 주기마다, 아니, 그걸 넘어서 매일같이 약을 먹는 건……. 어휴. 건강에 무지 안 좋은 짓인데.〉

〈…….〉

〈특히 말이죠, 황태자비님은 발현이 남들보다 늦기까지 하셨잖습니까. 형질이 미숙하고 불완전해요. 그러니 억제제를 멀리해야지. 나는 그게 상식이라고 생각하는데, 잘 모르는 사람들이 많더라고. 그래서 약을 어, 아주 종류도 다양하게 먹이는 건가?〉

케이든은 갑자기 시작된 아문과 라몬의 설전에 당황해 입을 다물었다. 저와 관련된 어지간한 이야기는 다 꿰고 있을 거라고 여겼던 아문이 의아해하는 모습이 당황스럽기도 했다.

〈하지만 어쩌겠습니까. 저는 윗분들의 명을 받고 움직이는 사람인데요. 황태자비님의 불완전한 형질이 독한 희락기 억제제에 절어 가는 모습을, 슬픈 눈을 하고 바라보는 수밖에요.〉

전혀 슬퍼 보이지 않는, 슬픔 대신 무거운 짜증만이 깃든 눈으로 라몬은 고개를 저었다.

라몬의 비꼼을 받아 든 아문의 낯빛이 붉으락푸르락해졌었다. 라몬에게 무언가를 말하고 또 묻고 싶어 하는 듯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결국 입을 꾹 닫아 버리는 쪽을 택했다.

그건…… 라몬이 접견실을 떠난 뒤에도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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