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
“황태자비의 일에, 케이든의 일에 바보처럼 굴기 싫어. 아무것도 모르고, 멍청이처럼…….”
별안간 기세가 수그러든 아사드를 앞에 두고, 시종장은 속으로 탄식했다.
아사드의 얼굴에 묻어난 안타까움과 서글픔이 낯설었다. 황제의 옆에 서서 세상을 내려다보던 자신만만하고 오만한 어린 청년에게서 저런 표정을 끌어내는 일이 가능한 자가 생겼다는 사실이 놀라울 따름이었다.
아사드는 사랑에 빠졌다.
아사드가 걷지도 못하던 때부터 지금껏 그를 돌봐 온 사반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잘된 일이라며 축복할 수만도 없는 노릇이었다. 자신이 품은 사랑을 아사드 본인은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을 게 분명했다.
제가 모시는 이가, 아사드가 꿈꾸는 황제의 길에는 사랑이 없어야 했다. 이제 막 스무 해가량을 살게 된 청년의 짧은 평생을 따라붙어 온 믿음이었다.
황태자비가 2년 뒤에, 어쩌면 그보다 더 이르게 헬리오를 떠나게 될 거란 사실을 아사드는 알지 못했다. 헬리오의 황족 중 오직 그만이, 몰랐다.
제 아들만 모르는 비밀을 만든 황제의 뜻을 사반은 알 길이 없었다. 황태자가 괜한 일을 치지 않게 비밀에 부쳐 둔 것일 수도 있고, 그저 반려 신탁의 효험을 관찰해 보기 위함이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고작 1년도 지나기 전에, 너무 많은 게 달라져 버렸다. 아사드가 진실을 알게 된다면 어떨까. 다른 의미로 시끄러워질 것이 분명했다.
자신의 마음을 인정하지 않을 아사드가 황태자비를 떠나보내게 두는 게 맞을지, 제 마음을 인정하고 사랑을 받아들이게 돕는 게 맞을지…… 사반은 도통 알 도리가 없었다.
하나 저는 일개 시종장일 뿐이었다. 결국, 지켜보는 일 외엔 아무것도 하지 못할 거다. 사반은 자신의 위치를 잘 알았다.
“이제 약 같은 건 안 돼. 그딴 걸 입에 넣게 할 순 없어.”
“네?”
“케이든에게 희락기가 오면 내가 도울 거야. 그 사람은, 희락기가 와서 돌아 버린 나를 도와줬잖아. 그러니 나도 그와 함께해야지.”
아이고. 시종장은 귀를 막고 싶어졌다. 잠시 얌전해졌던 아사드가 다시금 분노를 태우고 있어서 그랬다. 거친 빗소리까지 다 먹어 치울 시끄러운 분노였다. 두 눈에 서린 빛마저 뜨거웠다.
“전하. 오메가의 희락기에 대해 알고 계십니까?”
“…….”
“그 시기의 오메가는 아이를 품게 될 가능성이 훨씬 더 커집니다. 알파의 희락기보다 몇 배는 더요. 마음이 거부하지 않는 상대라면 그 확률이 더욱 높아지죠. 아이를 갖는 건, 알파가 아닌 오메가의 선택이기 때문입니다. 성교육 시간에 주무셨습니까?”
황태자비께선 전하를 거부하지 않을 테죠. 그 이야기는 속에만 담아 둔 채로 사반은 말을 마쳤다.
“……형질이니 뭐니, 그딴 거엔 관심도 없는 어린애한텐 너무 지루한 수업이었어. 머릿속으로 낙타나 세는 일이 더 재밌었다고.”
“예예.”
대충 답을 내놓은 사반이 다시 얼굴을 굳혔다. 그는 아사드를 올려다보며 대화를 이어 갔다.
“황태자비님의 일은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래도 긴 시간을 이어져 온 황실의 약속을 지켜야 했으니까요.”
“…….”
“상상해 보세요. 전하께서 아버지가 되시는 겁니다. 언젠가 헬리오의 황제가 될 후계자의 아버지가요. 어린 나이에 감당하기엔 너무 큰일이 아닙니까.”
“그게 왜 큰일이지? 뭐가 문제야?”
사반은 저렇게 멍청하게 구는 아사드를 처음 봤다. 사랑이 사랑인 걸 모르는, 어쩌면 애써 부정하고 있는 어린 청년의 헛발질이 사춘기보다 무섭구나 싶었다. 사춘기를 두 번 앓는 편이 더 낫겠단 생각까지 들었다.
“사반. 당신도 생각해 봐. 황태자비의 품에 안긴, 대충 나와 그 사람을 반씩 섞어 둔 것 같은 자식들. 그 외모가 아주 출중할…….”
아사드의 말이 멈췄다. 흥분했던 남자의 얼굴이 왈칵 구겨졌다.
“내가…… 이런 미친 소리를.”
전신에 찬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보이는 아사드를 앞에 두고 시종장은 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웃음이 나오기도 했다. 아사드와 케이든의 아이가 정말 예쁠 것 같아서였다. 일찍 손주를 본 친구들이 열곤 하는 수다 판에 저도 낄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실없는 생각마저 들었다. 입 밖으론 꺼내지 못할 공상이었다.
“황태자님.”
“…….”
“저는 언제나 전하의 편입니다.”
“알아.”
“아시니 다행입니다.”
사반이 말을 이어 갔다.
“시간은 무한한 것이 아닙니다. 그 유한한 시간을 후회로 채울지, 기쁨으로 채울지. 전하께서 선택하셔야 할 때가…… 오게 될 듯합니다.”
황실의 일에는 깊이 참견하지 않는 게 좋았다. 사반이 이곳에서 오랜 시간 일해 오며 얻은 교훈이었다. 그래도 제가 오래도록 돌봐 온 아이에게, 아사드에게 한마디 정도는 해 주고 싶었다.
조금 색이 바랜 오래전의 기억이 사반의 머릿속에 짧게 떠올랐다.
〈사반. 나는 자한 삼촌처럼 멍청한 짓은 안 해. 다른 사람한테 내 마음 나눠 줄 일 없을 거야.〉
〈왜 그런 생각을 하십니까?〉
〈역사에 길이 남을 완벽한 황제가 돼야 하니까.〉
〈그러다 반려 신탁이라도 받으시게 되면요? 아주 거대한 운명과 쾅, 하고 부딪치시는 겁니다.〉
〈흥. 신이 주선해 줘도 마찬가지야.〉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신부가 전하 앞에 뚝 떨어지면요?〉
〈나보다 아름다울까? 쉽지 않을 텐데.〉
〈예예.〉
〈뭐, 그래도 소용없어. 내 마음엔 그 누구도 발 들이지 못해. 눈이 멀고 귀가 먹어서 세상을 돌아보지 못하는 바보가 될 생각은 없거든.〉
맹랑하게 답하던 10살짜리 꼬맹이의 웃음이, 침묵에 잠긴 청년의 얼굴 위로 덧입혀졌다.
“희락기 억제제 문제는, 전하의 말씀을 따르겠습니다.”
“…….”
“대비책을 마련해 주신다면요. 걱정은 들지만 어쩌겠습니까. 이 별궁의 주인인 황태자 전하의 명을 가장 중히 받들라고 폐하께서도 말씀하신걸요. 법전 속에 기록된 법도도 아니고 말이죠.”
사반의 말이 아사드의 표정을 순식간에 밝아지게 했다. 그 모습이 보기 좋아서, 사반은 아사드를 따라 웃었다. 아주 부드러운 웃음이었다.
아사드는 선황제의 저주를 성전처럼 받들고 있었다. 그 성전을, 아사드가 제 손으로 찢어 버릴 날이 오길. 빗속에서 사막을 돌보고 계실 타라 신께, 사반은 기도드렸다.
* * *
대저택의 1층에 자리한 연회장에선 코가 얼얼할 정도로 달콤한 꽃내음이 났다. 저택의 고용인들이 정성스럽게 장식해 둔 꽃들마저 작은 음악가들이 탄생시킨 아름다운 선율을 품고 기분이 좋아진 모양이었다.
우기가 닷새째를 맞이한 날에, 쿠람 재상의 저택에서 작은 연주회가 열렸다. 재상의 보물 같은 차남 헤카가 후원하는 어린 음악가들이 참여한 연주회였다. 가난하지만 재능 많은 소년 소녀들의 미래에 투자할 후원가들을 찾고자 하는 목적이 반, 훌륭한 어린 음악가들을 자랑하려는 목적이 반 정도 되는 행사이기도 했다.
헬리오의 황태자 부부는 헤카의 초대장을 받고 재상의 저택에 발을 들이게 됐다.
아사드는 헤카가 운영하는 예술 재단의 후원가 중 하나였다. 그런 아사드가 재단이 주최한 음악회에 참석하는 건 아주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적어도 케이든에겐, 아주 갑작스러운 일이었다.
〈연주회에 가야 해.〉
요즘 들어 케이든에게 어색하게 굴고 있는 아사드는, 자신의 배우자와 눈도 마주치지 않고 대뜸 말했었다.
〈연주회요?〉
〈……나 혼자 가기 싫어.〉
혼자 가기 싫다는데 어쩌겠는가. 케이든은 별안간 침실에 쳐들어온 아사드를 순순히 따라나서야 했다.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도 없었다. 옷을 느긋하게 고를 여유도 주질 않으신다고, 의복을 담당하는 시종들과 함께 툴툴대던 리헤트의 목소리가 아직도 케이든의 귀에 선했다.
음악회는 케이든과 어울리는 곳은 아니었다. 케이든은 좋은 음악이 뭔지, 나쁜 음악이 뭔지 알지 못했다. 예술성이 있는 것과 없는 것 역시 구분할 줄 몰랐다. 그저 연주자들이 대단하다는 생각만을 했다.
예년보다 훌륭한 수준의 연주였다며 후원가들은 어린 음악가들에게 열렬한 박수를 보냈다. 케이든 역시 박수를 보냈다. 귀에 잘 들어오지 않는 음악이 아니라, 그에겐 낯선 악기들을 연주한 이들의 사랑스러운 열정을 향한 마음을 실었다.
음악회가 끝이 난 뒤엔 짧은 피로연이 이어졌다.
당연히, 아사드는 어린 음악가들과 함께 피로연의 꽃이 됐다. 아사드에게 한 번이라도 인사를 건네 보고자 하는 사람들이 그의 주위를 벌처럼 맴돌았다.
대화는 길게 이어질 때도 있었고 짧게 끝을 맺을 때도 있었다. 그 내내, 케이든은 아사드의 옆을 지키고 서서 작게 웃기만 했다. 사람들의 호기심 섞인 눈빛이 부담스러웠지만 먼저 고개를 돌릴 수는 없었다. 저 때문에 아사드가 우습게 보일까 그랬다.
“…….”
“…….”
앞에 사람을 두지 않을 땐 민망할 정도의 적막이 찾아왔다.
슬쩍 아사드의 옆얼굴을 훔쳐봤던 케이든은 이내 다른 이들을 향해 눈을 돌렸다. 그러고 있다 보면…… 아사드가 다시 저를 바라보는 게 느껴졌다. 노골적인 시선이었다. 하나 제가 그를 향해 고개를 돌리면, 거짓말처럼 사그라들 시선이었다.
케이든은 말이 없는 아사드가 어색했다. 예전 같았으면 그저, 기분 나쁜 게 있는 모양이구나 하며 눈치껏 함께 입을 다물었을 거다. 하지만 지금은, 아사드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으니 괜스레 신경이 쓰였다.
아사드의 침묵만이 신경 쓰이는 것도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