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름다운 신부 (69)화 (69/97)

아사드의 침묵만이 신경 쓰이는 것도 아니었다.

저와 아사드 사이를 오가는 미묘한 어색함이 별안간 한풀 꺾일 때가 있었다. 그럴 때면 아사드는 이유 없이 제 손가락을 쥐어 보기도, 힘을 줘 손 전체를 잡아 오기도 했다. 그러다 화들짝 놀라 잡았던 손을 놓아줬다.

아사드가 이상하게 굴고 있었다. 별궁에서도 그랬지만, 이 저택 안에선 더욱 유별나게 굴고 있었다.

‘……헤카가 있어서 그런 걸까?’

아마 그렇겠지. 붉은 옷을 입어서인지 평소보다 더 고혹적으로 느껴지는 헤카를 보며, 케이든은 생각했다. 때마침, 만면에 웃음을 띤 헤카가 다가오고 있기도 했으니까.

화제의 손님들을 찾아온 헤카는 먼저 정중한 인사를 건넸다. 반가움을 담아, 케이든과는 과하지 않은 가벼운 포옹까지 나눴다. 예상치 못한 환대였다.

“황태자 전하를 뵙는 일이, 하늘에서 별을 따는 것보다 어렵다고 하더군요. 오늘도 그 말을 실감했습니다. 전하의 주위를 맴도는 하이에나들이 행사의 주최자인 제게도 자리를 양보해 주지 않더라니까요.”

너스레를 떠는 헤카는 기분이 좋아 보였다. 경쾌한 목소리 역시 듣기 좋았다.

“비가 쏟아지는 우기에 움직이는 일이 쉽지 않은데, 올해도 아이들을 찾아와 주셔서 감사해요. 정말 큰 영광입니다.”

“별말씀을.”

“거기다 이렇게, 황태자비님께서도 행차해 주실 줄…….”

“신이 사막을 정화하는 동안, 공께선 사람들의 마음을 청소하는 일을 하는군요.”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아사드는 헤카의 말을 끊었다. 헤카는 개의치 않아 했다. 본래 하려던 말을 잇는 대신, 다시 빙그레 웃는 편을 택했다.

“이런 과찬을 해 주시다니. 아이들에게 자랑해야겠어요.”

“신께서도, 어린 친구들의 음악회를 기특히 여기셨을 겁니다.”

미리 써 둔 극본이 있는 것처럼 대화가 막힘없이 흘러갔다. 아사드와 헤카의 입가에 머무는 은은한 미소가 꼭 잘 말린 이불처럼 뽀송뽀송해 보였다. 정말 아름다운 사람들이었다. 케이든은 속으로 감탄해야 했다.

하지만 잡념은 곧 깨지게 됐다. 헤카가 케이든을 향해 시선을 돌린 덕이었다.

“황태자비님께서 여기까지 행차해 주신 걸 보고, 얼마나 기뻤는지 몰라요. 정말요.”

“아, 그랬군요.”

케이든을 대신해 헤카의 앞에 툭, 답을 내놓은 아사드가 헤카를 따라 또 한 번 웃었다.

“마침 황태자비님께 드리고 싶은 이야기가 있었기에, 더욱 기뻤어요.”

“……제게요?”

“네. 언제 다시 찾아뵐 수 있을까 발을 동동 구르며 마음을 쓰던 참인걸요. 그런 제게, 아주 잠시만이라도 시간을 내주시겠어요? 아량을 베푸셔서요.”

슬쩍 아사드의 낯을 살폈던 헤카가 케이든에게 말했다. 헤카의 커다란 눈망울 속에 나긋한 기대감이 담겨 있었다.

“……그럼요.”

어린 강아지 같은 눈을 가진 이의 부탁을 어찌 거절하겠는가. 당황한 케이든은 자신도 모르게 긍정의 답을 해 버렸다. 아사드의 눈치를 볼 새도 없었다.

“이 자리에서 하면 안 되는 말인가 봅니다? 아니면, 내 앞에서 하기 힘든 말인가?”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다만, 같은 형질을 가진 사람들만이 이해할 수 있는 이야기라고 해야 할까요……?”

아쉽다는 듯 눈썹을 아래로 내린 헤카가 미묘한 표현을 늘어놨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군요. 황태자비를 아주 잠시만, 놓아주는 수밖에.”

말을 마친 아사드는 케이든을 향해 슬며시 몸을 숙였다. 그리고 케이든의 귓가에 속삭였다.

“쓸데없는 소리를 하면 정강이를 까 버려.”

“네?”

“문제가 생겨도 내가 책임질 테니까.”

몸을 뒤로 물리는 아사드의 얼굴이 뚱해져 있었다.

정강이를……. 아사드의 말을 곱씹어 보던 케이든의 입가에 어색한 웃음이 떠올랐다. 헤카에게 아사드의 목소리가 닿았을까 걱정됐다.

아사드와 헤카는, 언젠가 혼인식을 치를 사이였다. 하지만 자한을 위한 연회에서도 그렇고 오늘도 그렇고…… 아사드도 헤카도 서로에게 묘하게 날이 서 있는 것처럼 보였다.

케이든은 그들의 마음이 어려웠다. 부부가 될 약속을 한 이들이 속마음을 숨기기 위해, 거친 단어와 눈빛을 이용하는 걸까? 화가 난 고양이들처럼 구는 두 사람의 속내를, 케이든은 도통 파악할 수 없었다. 짐작도 가질 않았다.

“금방 돌아오겠습니다. 연회의 주최자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황태자비님을 독점할 순 없죠.”

성큼 거리를 가까이 붙여 온 헤카가 조심히 케이든의 팔짱을 끼며 말했다. 선을 넘은 친밀한 접촉을 한 게 아니라, 황태자비를 에스코트하겠노라 나선 것이었다. 헤카의 입장에선 말이다.

갑작스럽게 좁혀진 거리감을 눈에 담은 아사드의 미간이 구겨지는 모습이 보였다.

‘화가 났을까?’

케이든은 입 안이 마르는 걸 느꼈다. 헤카는 형질이 같은 사람도 반하게 할 수 있을 만큼 아름다우니, 아사드가 저를 경계할 법했다.

그래도 아사드에게 질투의 대상이 되고 싶지는 않은데…….

복잡한 마음이 들었다.

케이든은 조금 거리가 멀어진 아사드에게 어색한 인사를 건넸다. 긴장한 탓에 무뚝뚝한 낯을 하게 됐다. 그리고 케이든은, 그런 자신을 보고 얼굴이 더욱 험악해진 아사드를 알아채지 못한 채 완전히 돌아섰다.

“제가 다른 분을 에스코트해 보는 건 처음이라 부끄럽네요. 너무 친한 척하는 것처럼 느끼실까 봐 걱정도 되고요.”

어색한 팔짱을 풀지 않고 걸음을 옮기며 헤카는 케이든에게 말을 걸었다.

“아닙니다.”

“황태자비님을 다시 만나 봬야지, 만나 봬야지 하면서, 황궁에 방문 요청을 몇 번씩 올렸어요. 그런데 도통 승인이 나질 않더라고요. 그래서 지금껏 찾아뵙질 못했네요.”

“저를요? 저는…… 정말 몰랐습니다.”

“그래도 이렇게 다시 만나 뵙게 됐으니까요. 다행이죠. 자한 님을 위한 연회에서도 뵙긴 했지만, 그땐 저나 황태자비님이나 서로 경황이 없어서 제대로 말도 나누기 어려웠잖아요.”

당황한 케이든과 눈을 맞춘 헤카가 사람이 없는 구석진 곳에서 멈춰 섰다. 여전히 팔짱은 풀지 않은 채였다. 키 차이 탓에 팔이 저려 보이는데 말이다.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내쉰 헤카가, 다시 입을 열었다. 케이든은 생각지도 못했던 말을 내뱉었다.

“황태자비님, 저는 아버지와 뜻이 같지 않아요.”

“그게 무슨 말씀인지…….”

“황태자 전하와의 혼인에 목을 매지 않는다는 얘기예요.”

“…….”

“제가 황태자님과 부부가 될 준비를 했던 적도 있었죠. 하지만 다 옛일이 됐어요. 아주 살짝 자존심이 상하긴 했지만 금세 극복했고요. 비련의 주인공이 되기엔, 저는 정말 밝은 사람이거든요.”

흠흠. 목소리를 가다듬은 헤카가 말을 더했다.

“저는 황태자비 자리에 욕심 없어요. 전하께도 감정이 남아 있지 않고요. 아니, 애당초 감정이 남을 사이도 아니었죠. 그러니, 혹여나 저와 관련해 오해할 만한 일이 벌어지더라도…… 제 뜻이 아니라고 생각해 주세요.”

숨도 쉬지 않고 말을 쏟아 내던 헤카의 얼굴이 불현듯 찌푸려졌다. 무언갈 떠올린 게 분명한 눈동자 속에 불쾌한 기운이 서려 있었다.

“그 오해할 일도…… 일어나지 않겠지만요.”

“…….”

“아버지가 의지를 상실하셨거든요. 제가 사고를 치는 바람에…… 벌써 보름째 침실에 처박혀선 술만 마시고 계세요. 오늘도 마찬가지고요.”

또랑또랑하던 헤카의 말소리가 차분한 속삭임으로 순식간에 색을 바꿨다.

“무슨 일이 있으셨습니까?”

사고라니. 케이든은 놀라 되물었다. 헤카가 아사드와의 혼인을 원치 않는다는 말은 쉽게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하지만 헤카가 그의 아버지를 술독에 빠트렸다는 이야기만은, 확실히 알아들을 수 있었다.

“알파와 오메가 사이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사고 중 하나를 저질렀다고 해야 할까요.”

헤카가 입에 담은 알파가 아사드는 아닌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도대체 누구를 가리키는 거란 말인가.

케이든은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자신이 느끼는 당혹감을 드러내지는 않으려 했다. 제가 무심코 내보일 표정과 내뱉을 반응이 헤카에게 상처를 줄지도 모르니 조심해야 했다.

혹여 말실수라도 저지르게 될까, 케이든은 가만히 입을 다물었다. 헤카가 자신에게 전해 준 이야기들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음에도 그랬다.

“그게…….”

고민하던 헤카가 다시 입을 열었다. 하지만 말을 완성하진 못했다. 별안간 헤카에게 들러붙어 온 이들 탓이었다.

“자기. 왜, 황태자비님이랑 팔짱을 끼고 있어? 누굴 질투 나게 하려고 이럴까? 응?”

“그림 좋더라.”

헤카의 귓가에 여자와 남자의 목소리가 차례로 가 닿았다.

“자기가 잘생긴 사람 좋아하는 건 알지만, 너무 대놓고 그러면 우리가 속상하지. 우리도 얼굴은 잘난 편인데.”

으악! 괴상한 비명을 지른 헤카가 아쉽다는 듯 케이든과 팔짱을 풀었다. 몸에 붙은 벌레를 떼어 내려는 사람처럼 자신에게 다가온 남자와 여자를 밀쳤다.

“……아.”

헤카에게 다가온 남자의 어깨를 반사적으로 붙잡았던 케이든 역시, 헤카를 찾은 이들의 면면을 확인하고는 슬쩍 손을 물렸다.

황궁 바깥의 저택에서, 케이든은 황실의 일원들을 만나게 됐다. 티티와 네프. 얼굴이 똑같이 생긴 쌍둥이 남매이자 아사드의 사촌들이었다.

케이든은 쌍둥이들에게 어색한 인사를 건넸다. 너무 당황한 나머지 다짜고짜 인사말부터 내뱉은 거였다. 아문이 옆에 있었다면 아랫사람에게 먼저 인사하지 말라고 성을 냈을 일이었다.

“아, 저희가 먼저 인사드렸어야 했는데. 우리 황태자비님은 오늘도 잘생기셨네요. 음, 아름다우셔.”

방긋 웃어 보인 티티가 케이든을 와락 끌어안았다가 곧장 물러났다. 그녀의 동생인 네프의 손에 이끌려서였다.

“초대도 안 했는데 여긴 왜 왔어?”

씩씩대던 헤카가 목소리를 잔뜩 낮추고 말했다.

“자기가 우리 보고 싶을까 봐.”

“내가 왜 너희를 보고 싶어 해.”

“당장 며칠 전을 생각해 보세요. 싫다 싫다 하더니, 그날도 우리랑…….”

헤카가 재빨리 티티의 입을 막았다. 하지만 소용이 없었다. 실없이 웃으며 티티는 계속해 말을 이어 갔다. 대신, 헤카가 아니라 케이든에게 말을 걸었다.

“우리 사막의 꽃께서 황태자비님과 친분이 있는 줄은 몰랐는데요. 곧 황궁에서 함께 부대끼며 살게 될 텐데, 두 분 사이가 묘할까 봐 조금 걱정했거든요. 그런데 이렇게 화목한 모습을 보게 되니까, 아, 정말 안심이 돼요. 참 기쁜 일이죠.”

케이든은 티티를, 입을 다문 채 그저 웃고만 있는 네프를, 성이 난 헤카의 얼굴을 한 번씩 바라봤다. 제가 이해한 상황이 맞는 건지 계속 의심이 가서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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