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름다운 신부 (70)화 (70/97)

“네. 지금 생각하시는 게 그대로예요. 헤카, 이 아름다운 분이 저희 쌍둥이의 몸과 마음을 모두 갈취해 버리는 바람에…….”

“아니, 티티. 일단 우리의 운명적인 만남부터 말씀드려야지.”

“왜, 왜 너흰 둘이나 되는 거야. 한 사람 입을 막으면 바로 다른 놈이 떠들고……!”

헤카가 말한 사고가 이거였구나. 투덕대는 세 사람을 보며 케이든은 그제야 확신했다. 멍청하게 입을 벌리지 않도록 조심하면서였다.

“황태자비님 앞에서 헛소리하지 마.”

“헛소리라니. 어차피 우리랑 혼인할 거면서. 아닌 척은.”

“뭐, 뭐?”

“알파 둘을 거느리고 사는 오메가라니! 제국의 유일무이한 존재가 되는 거야. 너무 좋겠다.”

“…….”

“헤카는 운이 좋아.”

“그럼 그럼. 아, 쌍둥이 황족을 위한 법이 있어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 신이 쌍둥이인 덕을 이렇게 보네. 네프랑 내 몸이 타라 님처럼 이어져 있는 건 아니지만.”

방긋 웃는 티티의 모습이 티 없이 맑아 보였다. 정말 놀랍게도 말이다.

케이든은 티티가 내뱉은 말을 곱씹어 봤다. 헤카와 쌍둥이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고, 쌍둥이들은 혼인을 마음먹을 정도로 헤카에게 푹 빠졌다. 헤카 역시 그들이 싫은 눈치는 아니었다. 창피함이 조금 더 앞설 뿐.

하지만…….

헤카가 아사드가 아닌 다른 사람의 신부가 된다.

이 사실이 말도 안 되게 느껴졌다. 아사드는? 황태자님은 어떻게 된다는 말인가. 케이든의 마음이 순간 덜컥 내려앉았다.

“애정 싸움이라도 하는 건가?”

익숙한 목소리가 귓전에 닿았다. 케이든은 제 뒤에 붙어 선 남자를 차마 돌아보지 못하고 어색하게 눈만 깜빡였다. 거짓말처럼 몸이 굳어 버렸다.

“고작 하룻밤 사고에 운명을 끌어와 시끄럽게 떠들어 대더니. 부부가 되자며 거머리처럼 들러붙기로 한 모양이군.”

“……알고 계셨습니까?”

“저것들이 날 찾아와선, 헤카의 모든 걸 알려 달라고 졸라 댔으니까.”

아사드는 목소리에 짜증이 섞여 있었다. 자신을 귀찮게 하던 쌍둥이 남매를 향한 스트레스였다.

케이든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아사드를 걱정해야 하는 건지 위로해야 하는 건지…… 모른 척을 해야 하는 건지, 무엇 하나 선택할 수가 없었다. 무어라 말을 내뱉기도 어려웠다.

“사고를 친 건 저것들인데, 왜 당신이 내 눈치를 봐?”

고개를 숙인 아사드가 귓가에 속삭인 말이 간지러웠다. 화들짝 놀란 마음을 숨기기 위해, 케이든은 어색하게 웃어야만 했다.

“전하께선…… 괜찮으십니까?”

붉어진 귀를 손으로 가리며 케이든은 물었다. 누가 들을까, 목소리를 잔뜩 낮춘 채였다.

“괜찮냐니. 무슨 뜻인지 모르겠네.”

입을 달싹이던 케이든은 슬쩍 주위를 둘러봤다. 저와 아사드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은 없었다. 시끄러운 쌍둥이들에게로 시선이 쏠린 탓이었다.

케이든은 결국, 저를 내려다보는 아사드와 시선을 맞췄다. 더 말소리를 줄이고, 아사드의 앞에 말 한마디를 내놨다.

“헤카 님과…… 깊은 사이셨으니까요.”

“…….”

“…….”

“누가?”

“네?”

“설마, 내가?”

아사드의 얼굴이 단박에 구겨졌다.

“정말 나를 말하는 거야?”

의도를 모를 되물음이었다. 당황한 케이든은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 대화가 이상한 방향으로 치닫고 있다는 게 여실히 느껴져 더 당혹스러웠다.

아사드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어졌다. 두꺼운 장작에 불씨가 옮겨붙기라도 한 듯이 활활 탔다.

“어떻게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

“누가 그딴 소리를 지껄인 거야. 나는, 난, 그딴…….”

아사드의 말이 도통 끝을 맺지 못하고 어물쩍 흩어졌다. 무어라 이름을 붙이기 힘든 여러 감정이 아사드의 얼굴 위로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초조한 기색을 숨기지도 못하고 입가를 매만지던 아사드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아사드는 케이든의 손을 붙잡았다. 손가락 사이사이로 자신의 손가락을 끼워 넣고, 도망치지 못하게 단단히 옭아맸다.

어수선한 풍경을 등지고, 아사드는 앞장서 걷기 시작했다. 케이든은 그런 아사드를 얌전히 뒤따를 수밖에 없었다.

연회장을 벗어난 아사드는 복도에 늘어선 문을 하나씩 열어젖히며 빈방을 찾아냈다. 결국 골라낸 것은 들어선 사람 없이 텅 빈, 오직 빗소리만이 몸을 누이고 있던 손님방이었다.

아사드는 케이든과 함께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당황한 케이든을 앞에 두고, 아사드는 입술을 짓씹으며 흥분을 가라앉혔다. 그는 침묵했다. 말하는 법을 잊은 사람처럼 입을 여닫기만을 반복했다.

그러다 결국, 똑바른 말 한마디를 내뱉게 됐다.

“사이가 깊다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그게…….”

“그 사람과 내가, 연인? 그런 사이였다고 생각했어?”

그 안에 케이든만을 담은 아사드의 두 눈이, 용광로 안에서 녹인 황금같이 뜨겁게 끓고 있었다. 단지 마주한 것만으로도 케이든은 입 안이 메마르게 됐다. 아사드의 뜨거움이 마치 자신을 활활 태울 불처럼 느껴져 그랬다.

“네. 그런…… 오해를 했습니다.”

케이든은 아사드에게 답했다. 반쯤은 얼떨결에 내놓은 답변이기도 했다. 또 반쯤은 덜 솔직하게 내놓은 답변이었다. 한때 연인이었단 오해를 한 게 아니라, 지금 또한 묘한 사이일 거라고 추측을 했었으니 말이다.

“말도 안 돼.”

“죄송합니다.”

말을 중얼거리는 아사드에게 케이든은 급히 사과했다. 아사드가 너무 억울해 보여서 그랬다. 아직 상황을 똑바로 파악하지 못했는데도, 제가 잘못한 것 같다는 생각만이 들었다.

“…….”

아사드를 달구던 흥분은, 케이든이 내놓은 말 한마디에 순식간에 녹아내렸다. 아사드의 황금색 눈동자 위에 서렸던 뜨거움 역시 차차 가라앉게 됐다.

열기가 사그라든 두 눈에 남은 건 서운함이었다. 아사드는 그저, 서운함이 가득 담긴 얼굴을 하고 말없이 케이든을 바라봤다.

연약한 실망을 뒤집어쓴 남자를 앞에 두고 케이든은 안절부절못하게 됐다. 그냥 잘못한 수준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아무래도, 제가 아사드에게 나쁜 짓을 저지른 기분이었다.

어찌할 줄을 몰라 하던 케이든이 주먹을 쥔 아사드의 손을 조심히 붙잡았다.

아사드의 마음을 어떻게 하면 달래 줄 수 있을까, 그런 고민을 하다 저지른 짓이었다. 아사드는 제 손이 차갑다며 좋아하지 않았던가. 아사드에게 남은 잔열이, 그 뜨거움이, 당혹감이 조금이나마 제게 옮겨지길 바랐다.

“……케이든.”

“네.”

“자신의 배우자에게만 몸과 마음을 바치는 것이 이 제국의 황태자가 갖춰야 할 소명이야. 설령 신의 뜻이 아니라 사람의 뜻을 따라 정략혼을 했다고 한들 마찬가지고.”

케이든과 눈을 맞추며 아사드는 말했다. 다소 다급하게 내놓은 문장이었다.

“나는 죄가 없어. 하늘에 대고 맹세할 수 있어.”

죄라니. 생각지도 못한 무거운 선언을 들은 케이든이 속으로 탄식했다. 머릿속에 가득 차 있던 생각들이,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 이리저리로 튀었다.

“왕국 놈들이 배우자가 아닌 애인을 통해 아이를 보고, 그 아이를 후계자 삼는 기행을 저지르기도 한다는 얘기는 알아. 하지만 당신이 나를, 그런 놈들이랑 비슷할 거라 여기고 있을 줄은…….”

미간을 찌푸린 아사드가 중얼거렸다. 생각에 잠겨 말끝이 흐려졌으나 그 눈빛만은 여전히 강렬했다. 시선 역시 케이든에게서 떨어질 생각이 없었다.

케이든은 그런 아사드를 가만히 들여다봤다. 제 앞을 가로막고 있던 뿌연 막 같은 게 한 꺼풀 벗겨진 느낌이었다. 흐리게 보였던 것들이, 생각이, 본래의 선명함을 되찾아 가고 있는 듯했다.

생각해 보면, 아사드의 입을 통해 직접 헤카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 들은 적이 없었다. 그는 헤카의 이름을 제대로 입에 담은 적조차 없었다. 케이든은 그것이 아사드가 헤카를 마음에 담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를 보호하기 위해 숨기는 거라고, 그게 당연하다고 여겼었다.

하지만 그건 제 기준의 당연함일 뿐이었다. 케이든은 뒤늦게 그 사실을 깨닫게 됐다.

1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제가 보아 온 아사드라면, 말에 거침이 없고 솔직한 아사드라면……. 적어도 희락기를 앞두고선, 자신에게 미래를 약속한 사람이 있다고 고백을 했을 거다. 케이든 당신이 아니라 그 사람을 만나게 해 달라 양해를 구해 왔겠지. 아사드에 대해 뭘 얼마나 안다고. 그런 추측을 하게 됐다.

쌍둥이의 습격을 받기 전, 헤카는 제게 아사드와의 혼인에 목을 매지 않는다고 말했었다. 그 뒤로도 자신의 솔직한 속내를 내보였다. 이야기를 머금은 부드러운 목소리에서 아사드를 향한 사랑은 느껴지지 않았었다. 사랑이 식어 그런 게 아니라, 식을 사랑조차 존재하지 않아 그랬던 거였다.

케이든은 아연함을 느꼈다.

‘내가…… 착각에 빠져 있었구나.’

왜 그런 멍청한 오해를 하고 있었을까. 너무 당황스러워 헛웃음이 나올 정도였다. 민망함에 스스로를 질책하게 됐다.

설령 시간을 되돌아간다고 해도 아사드에게 헤카와의 관계를 묻지는 못할 거다. 그래도, 지금 당장은 그런 기분이 들었다.

그렇다면…….

〈당신이 떠나면 아사드는 바로 재혼할 겁니다. 황태자비의 자리를 오래 비워 둘 수 없으니까요. 이전에 혼인을 약속했던 남자가 그의 진짜 신부가 될 테죠.〉

자한이 전해 준 말은 반쪽짜리 진실로 변한다. 혼인을 약속했던 남자. 그 말을 제외해야 했다.

케이든은 자한이 제게 거짓말을 한 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신부에 관한 얘기만 틀렸을 뿐이었다. 적막한 별궁 생활과 매일같이 저를 찾아오는 약들만 봐도, 자한의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어쩔 수 없이 마주하게 되는 사람들의 시선은 덤과 같은 것이었다. 몇 마디의 말보다 무거운 진실을, 케이든은 이미 여러 번 마주했다.

게다가 저 역시, 머지않아 아사드의 곁을 떠나야 할 때가 올 거라 예감하지 않았던가.

황궁에 기거하지 않는 자한이 모르는 일들이 있겠지. 케이든은 그저, 그런 생각을 했다.

헤카는 아사드가 아닌 다른 황족들과 마음이 닿게 됐다. 2년 뒤엔, 저는 모를 새로운 신부가 아사드를 찾게 될 거다.

결국, 달라지는 점은 아무것도 없을 거다. 하지만…….

‘왜 이렇게 기분이 좋은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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