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사드의 목소리가 너른 침대 끝자락에 가만히 걸터앉아 있던 케이든의 시선을 단단히 붙들었다. 밤의 어둠을 가로지르는 비를 구경하던 짙은 보라색 눈동자 속에, 오직 아사드 메케리우스만이 가득 차게 했다.
“황태자님…….”
케이든은 뒤늦게 아사드를 불렀다.
아사드는 조급한 상태였다. 놀란 케이든에게 인사를 건넬 여유도 없었다. 케이든이 몸을 일으키려 들까, 냉큼 그의 옆자리부터 차지하고 앉았다.
“생각해 봤어.”
제법 비장한 분위기를 풍기며 아사드는 입을 열었다.
“역시 안 돼.”
“갑자기 무슨…….”
“앞으로 억제제 같은 건 먹지 마. 이젠 그딴 거 안 먹어도 돼.”
“…….”
“그래. 황태자는 몰라야 하는 암묵적인 법도대로, 아이가 생기지 않게 조심해야지. 하지만 억제제를 쓰는 방법만 있는 건 아니잖아. 그래서 의사들이랑 마법사들을 불러서 달달 볶았어. 당신 몸에 해가 되지 않을 방법을…… 억제제를 쓰지 않아도 될 방법을, 뭐든 내놓으라고.”
왜인지 뺨이 불그스름한 아사드를 앞에 두고 케이든은 입을 열었다 닫기만 반복했다. 당황해 그런 거였다.
“더럽게 민망했는데, 그래도…… 당신 몸이 아프면 안 되잖아. 그건 싫어. 내가 쪽팔린 편이 낫지.”
말을 마친 아사드는 잠시 침묵했다. 그답지 않게 무언가에 망설임을 느꼈다.
하나 머뭇댐은 잠시였다. 아사드는 손에 꽉 쥐고 있던 주머니의 끈을 풀었다. 그리고 그 안에 든 것들을 침대 위에 우수수 쏟아 냈다. 기이한 모양새의 작은 고무들이었다. 금빛이 나는 자그마한 마도구도 함께였다.
얼굴이 붉어진 아사드가 케이든의 낯을 살폈다. 그의 눈이 감기고 뜨이는 걸 빤히 바라봤다.
“이게 무슨…….”
케이든이 말을 흐렸다. 설명이 필요하다는 눈치였다. 아사드는 창피함을 참지 못하고 속으로 욕 몇 마디를 내뱉어야 했다.
“민가에 사는 이들은…… 색사를 나눌 때…… 이런 걸 쓴다고 하더군. 준비가 안 된 상황에서 아이가 생기면 안 되니까.”
“…….”
“저건…… 특수한 마법까지 덧입힌 거야.”
뒤이어, 아사드는 자신이 들었던 모든 걸 케이든의 앞에 줄줄 늘어놨다.
뚝뚝 끊기는 설명을 전해 받은 케이든은 말이 없어졌다. 어색해 죽겠다는 얼굴을 하고 입을 꾹 다물었다. 아사드는 케이든이 그럴 만하다고 생각했다. 자신 또한 저 기이한 것을 보고 내심 놀랐었으니 말이다.
케이든과 시선을 맞추며, 아사드는 간신히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는 성기에 씌울 고무들과 함께 침대 위로 떨어졌던 작은 마도구를 집어 들었다. 반원형 접시처럼 생긴 것이었다. 마도학자와 마법사가 머리를 맞대고 만들어 낸 물건이라 전해 들었다.
“색사를 마친 뒤에…… 이걸, 당신 배에 대라고 하더군. 당신의 안쪽에 남을 내 흔적을 지워 줄 거라 했어.”
“…….”
“하지만 완벽한 도구는 아니래. 일단은 저 흉물스러운 것과 함께 쓰는 편이 나을 거라고 마법사가 내게…….”
말을 이어 가려던 아사드가 헛웃음을 지었다. 제 앞에 선 의사들과 마법사들이 당황해 우왕좌왕하던 것이 떠올라서였다.
민망한 침묵 사이로 빗소리가 섞여 들었다.
이렇게 말을 더듬은 건, 태어난 이래 처음이었다. 대충 옹알이나 하던 시절에도 이렇게까지 바보같이 말하지 않았겠지. 덜떨어진 어린애처럼 보이기 싫은데, 어린애처럼 굴게 됐다. 짜증 나는 일이었다.
속으로 한숨을 쉰 아사드가 케이든을 힐끔 바라봤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모를 낯을 하고, 케이든은 침대 위에 흩뿌려진 고무들을 보고 있었다. 그러니까, 제 배우자의 성기를 감싸게 될 것들을 눈에 담고 있었다.
“신기합니다. 둘 다…….”
어색한 미소와 함께 케이든은 조심조심 말 한마디를 덧붙였다.
“그래도 저것들만 믿고 억제제를 먹지 않는 건, 조금 위험할 것 같습니다.”
“아주 작은 가능성도 무시하면 안 된다?”
“황태자님께서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그 작은 가능성 하나에, 전하의 모든 계획이 어그러질 수 있다는 걸요.”
차마 아사드와 시선을 맞추지는 못하고 케이든은 말했다. 그의 목소리가 사뭇 진지했다.
케이든이 입에 담은 모든 계획이라는 게 정확히 뭘 짚고 있는지, 아사드는 확신할 수 없었다. 자신의 마음속에서 이미 반쯤 사장된 계획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 그런 추측만을 하게 됐다.
창피함과 미안함이 뒤섞인 미묘한 기분이 들었다. 케이든은 둔해 빠진 남자였다. 하지만 가끔은 당황스러울 정도로 눈치가 좋았다. 제 우스운 옛 계획마저 진작 깨닫고 있던 모양이었다. 너무나 색이 바래 원래의 목적이 뭐였는지도 알아볼 수가 없어진 그 계획을 말이다.
“케이든.”
“…….”
“나는 당신 앞에서 멍청해져. 아는 것 하나 없는 머저리가 되는 걸 당신도 알잖아. 언제나 그래.”
“…….”
“계획? 우리 사이에 그딴 건 없어. 당신이 아는 계획을 나는 몰라. 앞으로도 모르는 일로 남겠지. 내가 모르는 나의 계획이, 내게 무슨 의미가 있겠어.”
아사드는, 케이든을 떠나보낼 생각이 없었다. 그리 마음먹었다.
정략혼에 사랑은 필요하지 않았다. 서로 사랑하지 않아도 부부가 되고, 아이를 가질 수 있었다. 제 어머니와 아버지처럼 사랑 없이도 오래도록 함께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제가 평생을 함께할 이가 케이든이면 안 될 이유는 또 뭔가?
케이든이 가진 것 하나 없는 북부 사람이라는 이유만으로, 저 사람은 황비가 될 수 없다며 황실 전체가 그를 손가락질하고 마음대로 떠들어 댄다고 해도 알 바 없었다. 입을 틀어막고 손가락을 분질러 주면 될 일이었다. 제 앞에 케이든을 데려다 둔 신도, 불신자들을 처벌하는 데 만족감을 표할 거다.
애초에, 고작 황비 문제로 제 자리 하나 지키지 못하고 흔들릴 이를 황제라고 할 수 있을까. 당장 사막으로 달려가 모래 속에 잠겨 죽는 편이 나았다.
‘내 신부는 문제를 만들 사람이 아니야. 신이 주선해 준 신부에게 불만을 품을 불경한 것들이, 훗날 황실의 진짜 문제가 되겠지.’
자신 역시 그 불경한 것 중 하나였다는 사실도 잊고 아사드는 삐딱하게 웃었다.
아사드는 마주한 케이든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겹쳤다. 겨울 날씨처럼 차갑던 손이 제 아래에 깔려 순식간에 미적지근해졌다.
“당신은 걱정이 너무 많아. 지금 나한테 중요한 건, 당신 몸이 상하지 않는 것뿐인데. 왜 그걸 몰라줄까.”
손이 닿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아사드는 케이든에게 몸을 기울이고 그를 끌어안았다.
“어…….”
하지만 케이든이 그를 덮친 아사드의 무게에 밀려난 탓에 결국 서로를 끌어안고 침대 위를 구르는 꼴이 됐다. 퍽 우스운 모습일 게 분명했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아사드는 케이든을 끌어안은 팔에 힘을 줬다. 서늘한 남자를 품에 안은 채 가만히 누워 빗소리를 들었다.
‘편안해.’
이 모습 그대로, 평생을 보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저는 케이든을 좋아했다. 내내 경계해야 할 거추장스럽고 끈덕진 사랑 따위가 아니라, 케이든에게 아주 인간적인 애정을 가지게 됐다. 아사드는 그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순식간에 마음이 편해졌다.
“건강 해치면 안 돼. 그래야 오래 살지. 오늘부터, 그 개 같은 억제제랑 헤어지는 거야. 희락기가 올 수 있게 내버려 둬.”
자식에게 잔소리밖에 할 줄 모르는 부모도 아니고. 했던 말을 반복하고 또 반복하는 절 케이든이 지긋지긋하다고 생각해도 할 말이 없었다.
케이든은 답이 없었다. 그는 입을 열어 언어를 전하는 대신 웃는 걸 택했다.
귓가를 스치는 자그마한 웃음소리가 너무 간지럽게 느껴졌다. 민망한 기분이 아사드의 뺨을 쿡쿡 찔렀다. 이유도 없이 손끝이 저렸다. 도통 해소될 것 같지 않은 간지러움이, 이내 온몸으로 번졌다.
“……왜 웃어?”
아사드는 물었다. 들뜬 마음과는 어울리지 않는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튀어 나가 버렸다. 흐물흐물해진 자신의 마음을 숨기기라도 하려는 듯 말이다.
“저 건강해요.”
거짓말은. 케이든의 말을 들은 아사드가 속으로 혀를 찼다. 새벽녘에나 눈을 뜰 유령 같은 낯빛을 하고 말만 잘한다 싶었다.
“그래도…… 앞으론, 정말 억제제를 먹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응. 안 돼.”
“네. 전하께서 계속 그렇게 말씀하시니까, 그러기 싫어졌어요.”
“그래. 설령, 누가 당신한테 약을 가져다 바쳐도 무시해. 뭐든 입에 대지 말고 화분에 물 대신 줘. 몸에 안 좋은 건 당신 근처에도 가지 못하게 감시하라고, 시종들한테도 전해 둘 거야.”
눈을 감은 아사드가 중얼중얼 말을 늘어놨다.
억제제를 먹는 게 황태자비와 황태녀비만의 일이라니. 젊었을 적의 아버지는 분명, 어머니 앞에서 훌쩍이며 우는소리를 줄줄 늘어놨을 것이다. 억제제니 피임약이니, 매일같이 입에 닿는 것들이 독하기만 해 속이 아프다 징징댔을지도 몰랐다. 네 아버지는 온실 같은 세상에서 꽃처럼 키워진 듯한 철없고 순진한 알파였다고, 제 이모가 전해 줬었던 말에 따르면 말이다.
하지만 케이든은 우는소리를 할 사람이 아니었다. 아픔에 둔감하기까지 했다. 그러니, 케이든 대신 제가 나서는 수밖에 없었다. 그는 하지 않을 일을 해 주는 거다.
“우린 부부잖아. 뭐든 함께해야지. 한 사람만 일방적으로 희생하는 건 이상해. 난 그런 거 싫어.”
“…….”
“황실의 법도? 다, 말도 안 되는 헛소리야.”
투덜대던 아사드가 케이든을 더 꽉 끌어안았다. 케이든의 목덜미에 코를 박고 그의 살 냄새를 맡았다. 막 몸을 씻은 사람에게 남은 따뜻한 물 내음 아래로 페로몬은 느껴지지 않았다.
케이든에게도 희락기가 오면, 그 부드러운 향기를 질리도록 탐할 수 있게 될까?
까만 머리카락과 풀어진 목깃 사이로 드러난 살 위에 입술을 붙이며, 아사드는 케이든의 허리춤을 단단히 붙잡았다. 저와 케이든 사이에 약간의 틈도 남기고 싶지 않다는 듯 품으로 끌어당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