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이든은 침실을 나섰다.
그는 마주 보고 선 채로 복도를 지키는 이들이 건네는 인사를, 어색하게나마 되돌려 주곤 급히 걸음을 옮겼다. 잠시 정원에 다녀오는 것뿐이라며, 걱정 어린 얼굴로 저를 따르려는 호위들을 몇 번이고 말리는 것과 함께였다. 결국, 정원 초입까지 그들과 함께 가게 됐지만 말이다. 어느 순간 새로이 나타난 젊은 호위들은 꼭 아사드처럼 걱정이 많았다.
개들은 정원의 연못 너머에 있는 비밀스러운 공터에서 케이든을 기다리고 있었다.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이 언제나 같은 자리를 고집했다.
금세 케이든을 발견한 개들이 자신의 영역에 나타난 반가운 손님을 향해 꼬리를 흔들며 달려들었다. 맹렬하다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펄쩍펄쩍 뛰어서였다.
“먹을 거 안 가져왔는데.”
웃음기를 머금은 케이든의 목소리가 개들의 귀를 쫑긋 서게 했다. 쪼그려 앉은 케이든에게 별안간 개들이 얼굴을 비벼 왔다. 먹을 것 따위는 상관없다는 듯 말이다. 세상에서 가장 귀여운 사기꾼들의 이마에, 케이든은 짧게 입을 맞췄다.
긴 코로 케이든의 무릎을 콕콕 찍던 산이 뒤로 물러났다. 개는 같은 자리에서 빙글빙글 원을 그리며 가볍게 돌다가는 공터 바깥을 향해 휙 방향을 틀어 걷기 시작했다. 란 역시 그런 산을 따라나섰다.
어쩐지…… 제가 따라오길 바라는 듯한 몸짓이었다. 머뭇대며 자리에서 일어난 케이든은 조심히 개들을 따라나섰다.
얼떨결에 시작된 산책이었다. 그래도 길을 잃을 걱정에 불안하지는 않았다. 빛의 정원은 네모난 모양을 한 별궁 한가운데에 은밀히 자리하고 있었다. 어디로 가든 결국, 그 끝에는 별궁이 나올 거였다. 그것이 동관이건 서관이건 간에 말이다.
편한 산책로를 내버려 두고, 개들은 커다란 나무들 사이로 난 비좁은 길만을 따라 바쁘게 움직였다. 케이든이 잘 따라오고 있는지 이따금 뒤를 돌아 확인을 해 가면서였다.
케이든은 발이 빠른 개들을 따라가기 바빴다. 자신이 앞을 향해 가는 것인지, 다시 뒤를 향해 가는 건지 헷갈릴 정도로 정신이 없었다.
가뿐하게 발을 움직이던 개들은 정원의 외곽에 다다라서야 멈춰 섰다. 군소리하지 않고 자신들을 따라와 준 케이든에게 꼬리를 흔들던 개들은, 곧 몸통이 두꺼운 나무 옆에 자리를 잡고 풀썩 앉아 버렸다. 두 마리 다 그랬다.
어쩌다 여기까지 왔을까. 속으로 헛웃음을 지은 케이든은 주위를 둘러봤다. 북부의 나무들과는 다른, 잔가지가 거의 없는 매끈한 나무 틈새로 보이는 모든 걸 눈에 담았다.
아주 익숙하면서도 어딘가 데면데면한 풍경이 케이든의 눈앞에 펼쳐졌다.
‘동관이구나. 1층 응접실 발코니 앞…….’
아사드가 기거하는 별궁의 동관은 케이든에겐 낯설기만 한 공간이었다. 아사드의 희락기가 왔던 이틀가량을 머물러 본 게 다였다. 그마저도 침실 안에서만 시간을 보냈었다.
동관이나 서관이나 별궁에 속해 있는 건 마찬가지였다. 그런데도, 와선 안 될 곳에 발을 들인 기분이 들어 객쩍게 목이 탔다.
작게 한숨을 내쉰 케이든은 이제 바닥에 반쯤 엎드려 버린 개들의 시선을 쫓아가 봤다. 바짝 선 채로 귀엽게 움직이는 귀에 닿고 있을 소리를 제 귀에도 담았다.
“…….”
아. 무심코 시선을 올렸던 케이든이 속으로 탄식했다.
누군가, 응접실 발코니로 걸어 나왔다. 당황한 케이든은 색이 연한 나무 뒤에 반쯤 몸을 숨겼다. 반사적으로 나온 행동이었다. 하지만 다시 슬쩍 고개를 들어 정원 바깥의 풍경에 시선을 줬다.
발코니에 선 이는, 얼핏 화난 듯 보이는 여자였다. 바깥에서도 여자의 모습이 훤히 들여다보였다.
서관의 1층과 마찬가지로 동관 1층의 응접실 또한 발코니를 통해 정원으로 나갈 수 있었다. 하나 여자는 그저 난간에 팔을 기대고 섰을 뿐, 더 나아갈 생각은 없는 듯했다.
그런 여자를 따라, 낯이 익은 남자 하나가 발코니까지 걸어 나왔다. 케이든이 나무 뒤로 반쯤 몸을 숨기게 한 원인이 된 이였다. 그의 표정 역시 앞서 나온 여자 못지않게 까칠한 상태였다.
‘아사드…….’
케이든은 불현듯 묘한 기분을 느꼈다. 이 자리에서 벗어나야 할 것 같다는 예감이 그를 찾았다.
무어라 말을 고르던 여자는 휙 몸을 돌렸다. 자신의 옆에 있는 아사드를 마주했다. 여전히, 두 사람 모두 표정이 밝지 못했다.
케이든은 발코니로 나온 여자가 누구인지를 단번에 알아봤다. 마치 거울처럼 아사드와 마주 보고 선 여자가, 아사드와 너무나 닮아서 그랬다. 다른 거라곤 성별과 체격밖엔 없어 보일 정도였다.
여자는 아사드의 유일한 형제이자 개들의 주인일 마트 메케리우스였다. 아사드와 고작 2살 터울인 마트는 제 어머니와 오빠처럼 화려한 인상의 미인이었다. 하지만 아직 그 얼굴에 앳된 구석이 남아 있었다.
〈우기가 끝난 뒤엔, 황녀께서 헬리오로 돌아오십니다. 완전히 돌아오시는 거예요. 연회 정도야 열릴 수도 있겠지만, 귀환을 축하하는 행사 같은 건 없을 겁니다. 황녀님은, 사람이 열 명 이상 모이는 자리엔 나타나지 않으시는 분이라서요.〉
케이든은 얼마 전 아문이 제게 전해 줬던 말을 떠올려 봤다. 헬리오의 하나뿐인 황녀가 동대륙에서의 짧은 유학을 마치고 수도로 돌아올 예정이라는 안내였다.
하나 마트는 이미 헬리오의 황궁에 있었다. 아무래도, 예정보다 이르게 귀환한 모양이었다. 우기가 미처 끝이 나기도 전에 말이다.
“……나한테, 너희의 소중한 분을 자랑하고 싶었어?”
몸을 숙인 케이든이 산과 란에게 속삭였다. 저를 여기까지 데려온 개들의 진짜 마음을 읽어 낼 수는 없었다. 그래도, 그 마음이 무엇이건 사랑스러울 게 빤했다.
개들의 목덜미를 부드럽게 쓰다듬어 준 케이든이 다시 몸을 세웠다. 케이든은 서관으로 돌아가려 했다. 정원에 숨어 헬리오의 황태자와 황녀를 몰래 훔쳐보는 사람이 되기 전에, 자리를 뜰 생각이었다.
아사드라면 제 기척 역시 금세 알아챌 거다. 그런 생각이 들자 마음이 급해졌다. 하지만 곧장 걸음을 옮기지는 못했다.
별안간 귓전에 닿은 선명한 목소리가, 케이든의 발목을 붙잡았다.
“……무슨 장난질을 하는…… 왜…… 그러면. 오빠 너는…….”
“…….”
“내 능력 알잖아. 내…… 암만 거짓말…… 안 먹혀! 누가 듣…… 죄다 돌려보내 놓고 무슨. 들으라고 해!”
무슨 일일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자리에 붙박인 채로, 케이든은 저를 알지도 못할 마트의 눈치를 살폈다.
당황스러웠다.
두 사람 사이에 무슨 말이 오가는 건지는 몰랐다. 하지만 일방적으로 말을 쏟아 내는 마트의 분위기가 험악했다. 혹여 제가 바로 앞에 있다는 사실을 알아챌까 봐 걱정돼 걸음을 옮기는 것조차 조심스러워졌다.
저는, 그저 개들을 따라 여기까지 왔을 뿐이었다. 하나 꼭 죄를 지은 사람처럼 심장이 떨렸다. 저들에게 제 존재를 들켜선 안 된다는 수상한 생각마저 들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아사드와 마트가 나누는 말소리가 거의 들리지 않았었다. 고작 단어 몇 개 정도만이 귀에 닿았다가 금세 달아나 버렸다. 그러나 이젠…… 아예 문장에 가까운 소리가 그대로 귀에 꽂혔다.
지금 이 상황이 케이든은 부담스럽기만 했다. 가족 간의 대화를 쥐새끼처럼 숨어 엿듣고 싶지 않았다. 하물며 그 대화에 뜨거운 열이 잔뜩 섞여 있다면 더더욱 자리를 피해 줘야 했다.
소리 없이 방향을 틀고자 케이든은 조심히 나무를 짚었다.
그때.
“……이 오빠인 걸 알면, 그분 기분이 어떻겠어.”
유독 선명하게 뻗어 온 마트의 목소리가, 다시 한번 케이든을 붙잡았다.
“아문이 오빠 너인 걸 알면, 기분이 어떻겠냐고!”
“…….”
“아문이……!”
친숙한 이름이, 마트의 목소리를 타고 반복해 밖으로 흘러나왔다.
“말할 거야.”
아사드는 제 동생에게 짜증이 섞인 답을 내놨다. 어딘가 격양된 상태로, 아사드는 마트와 말을 나누다가 멈추다가 했다. 화를 내는 건 마트였고 침묵하는 건 아사드였다.
케이든은 그들 사이를 오가는 말을 똑바로 알아들을 수 없었다. 제국어를 배우기 전으로 돌아간 것처럼 머리가 굳었다. 귓가에 닿아 오는 말들을 해석하는 게 힘들었다. 그들의 말소리가 더는 선명하게 들리지도 않았다. 눈에 보이지 않는 빗줄기가 남매의 목소리를 숨겨 버리기라도 한 것 같았다.
아문은 아사드다. 마트는 그렇게 말했다.
제가 아는 두 남자의 이름을 소리 없이 되뇌며 케이든은 다시 눈을 끔뻑였다.
짧게 토막 난 기억들이 케이든의 머릿속을 휘돌았다. 그리고 케이든은, 아문과 아사드가 지금껏 같은 자리에 선 적 없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 단 한 번도 마주한 적 없었다는 걸, 너무나 뒤늦게 깨달았다.
말도 안 돼.
케이든은 부정하고 또 부정했다. 그러면서도, 마음 한편으로는 아문의 이름을 빌려 제 후배 노릇을 했을 때의 아사드를 떠올렸다. 그의 황금색 두 눈은 마법이 덧씌워진 채 어두운 갈색으로 빛났었다. 그런 아사드를 보며, 케이든은 그가 아문과 참 많이 닮았다고 생각했었다.
마법은 말도 안 되는 일을 뭐든 가능하게 바꿔 낼 수 있었다. 그리고 아사드는…… 케이든이 아는 가장 대단한 마법사였다.
기억을 헤집던 케이든의 머릿속이 까맣게 변했다.
“……조용히 해. 누가 있어.”
아사드가 말을 읊조렸다. 그 가라앉은 목소리가, 바로 옆에서 속삭이기라도 한 듯 뚜렷하게 느껴졌다.
놀란 케이든은 숨을 삼켰다. 무얼 해야 할지 감조차 잡히질 않았다. 머리와 다리 모두 단단히 굳어 무겁기만 했다. 제대로 된 생각을 할 수도 걸음을 옮길 수도 없었다.
“개들이 있겠지.”
퉁명스럽게 말을 내뱉은 마트가 정원을 향해 휘파람을 불었다. 귀를 세우고 있던 개들이 벌떡 몸을 일으켜 섰다. 순식간에 주인을 향해 뛰어갔다.
마트는 나무 뒤에 몸을 숨긴 케이든의 존재를 알아채지 못했다. 그래도 안심할 순 없었다. 케이든은 그저 숨을 죽인 채 입술만 짓씹어야 했다.
조금씩, 조끔씩. 다시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해가 저렇게나 밝은데, 거짓말처럼 비가 내리려 하고 있었다.
“…….”
자리를 떠야 했다. 비를 피하기 위해서건, 아사드를 피하기 위해서건, 빛의 정원을 빠져나가야 했다.
하지만 케이든은 끝내 움직이지 못했다. 몹쓸 저주에 걸리기라도 한 사람처럼 다리가 완전히 굳어 버린 탓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