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케이든은 끝내 움직이지 못했다. 몹쓸 저주에 걸리기라도 한 사람처럼 다리가 완전히 굳어 버린 탓이었다.
그러나 별안간 찾아온 생각이 케이든의 머리를 툭툭 쳤다.
……돌아가면, 아문이 있을 거야.
일이 바빠 요 며칠 못 볼 거라고 했지만, 오늘은 와 줄 거야. 아니. 오지 않는다면 찾으러 가면 돼. 멍한 얼굴을 한 케이든이 속으로 말을 중얼거렸다. 별안간 생겨난 믿음이, 왔던 길로 되돌아가라며 거칠게 등을 떠밀었다.
금세 빗줄기가 굵어졌다. 케이든은 자신의 뺨마저 적시기 시작한 빗물을 거칠게 닦아 냈다. 개들의 소리가 더는 들리지 않는 걸 보아 아사드와 마트는 비를 피해 응접실 안으로 들어간 듯했다.
케이든은 느릿하게나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자신이 왔던 방향으로 다시 나아갔다. 직접 아문을 봐야 한다는 생각이 케이든의 머릿속을 가득 메웠다.
하지만 이내 또 다른 힘에 붙들리게 됐다.
“케이든!”
자신의 손을 붙잡은 이를, 케이든은 돌아봤다. 얇고 긴 초록 잎을 타고 미끄러져 내려온 빗방울이 툭, 툭, 아사드의 머리카락 위로 떨어지고 있었다. 비에 젖게 된 백금색 머리카락이 어두운 금색으로 보였다.
급작스레 찾아온 침묵 속에서 케이든은 아사드를 빤히 바라봤다. 아사드의 아름다운 얼굴 위에 고스란히 묻어난 초조함과 영문을 모를 불안을, 벌어졌다 다물리는 입과 흔들리는 눈동자를 들여다봤다. 드러난 감정이 너무나 선명해서, 도리어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모를 아사드의 굳은 얼굴을 말없이 올려다봤다.
분명 아는 얼굴이었다. 어느새 익숙해진 표정이었다. 그런데 왜인지…… 너무나 낯설었다.
제가 안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한순간에 전혀 모르는 것으로 변했다. 지금껏 제가 품었던 모든 생각이, 한낱 망상 덩어리로만 느껴졌다. 지금 하는 생각 역시 또 다른 망상이 될 뿐이겠지. 그런 예감이 들었다.
케이든은 시선을 내렸다. 그 무엇 하나 정답에 가까워지지 못할 무의미한 추측을 그만두기로 했다.
대신, 케이든은 입을 열었다.
“전하께서…….”
“…….”
“정말, 아문이십니까?”
케이든은 아사드에게 물었다. 우스울 정도로 벌벌 떨리는 목소리를 숨길 생각도 하지 못하고 물음을 건넸다.
“맞아.”
케이든을 붙잡은 손에 힘을 주며 아사드는 답했다. 망설임 없이 내놓은 솔직한 긍정이었다.
“마법으로 모습을 바꾸고…… 말벗이 되어 주겠다고 저를, 저를 찾아오신 겁니까?”
“그래.”
일말의 주저함도 없이 아사드는 다시 한번 답했다. 케이든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그의 모습이 과할 정도로 조급해 보였다.
“케이든.”
“…….”
“……케이든.”
“비가 그치면…… 그 후에 다시 얘기하고 싶습니다.”
입을 여닫기만 반복하던 케이든이, 또 한 번 저를 부르는 아사드에게 간신히 뜻을 전했다.
너무 말도 안 되는 이야길 들어서인지 머리가 아팠다. 아문과 아사드의 얼굴이, 두 사람의 목소리가 케이든의 안에서 한데 뒤섞였다. 모든 게 엉망진창이었다.
“다시 비가 옵니다. 서관으로 돌아가야 할 것 같아요.”
작별의 말을 전한 케이든이 제 왼쪽 손목을 바라봤다. 함부로 뿌리칠 수도, 억지로 떼어 낼 수도 없는 남자의 손이 저를 단단히 붙들고 있었다.
케이든은 아사드가 건네려는 말을 당장 듣고 싶었다. 하지만 듣고 싶지 않았다.
아사드가 지금껏 숨겨 왔던 이야기들이, 어느새 그의 입가에 떠오르고 말지도 모를 비웃음이 너무나 무서웠다. 당장은, 그 위협적인 공포에서 도망치고 싶었다. 겁쟁이다운 행동이었다.
“안 돼.”
“…….”
“못 놔줘. 가더라도 나와 함께 가.”
“…….”
“이렇게 보낼 순 없어. 그러면 안 될 것 같아.”
이렇게 보낼 순 없다니. 아사드가 뭘 걱정하는 건지 케이든은 알 수 없었다.
굵어진 빗줄기를 그대로 맞으며 두 사람은 침묵했다. 무어라 말을 더하지도, 미처 걸음을 옮기지도 못하고 오직 서로의 눈만을 들여다봤다.
울렁이는 아사드의 금빛 눈동자 속에서, 케이든은 아무런 감정도 읽어 내지 못했다. 감히 그 속내를 짐작할 수도 없었다. 저는 무엇이 진짜이고 가짜인지도 구별하지 못하는 머저리니까.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자꾸만 케이든의 눈을 감기게 하는 빗물을, 아사드는 제 손끝으로 훔쳤다. 케이든의 손을 붙들고 있는 억센 손아귀와 대조적인 섬세한 손길이었다. 자신의 눈가를 감싸는, 영문을 모를 아사드의 다정함이 케이든은 두려웠다.
“왜.”
케이든은 결국, 다시 입을 열었다.
“왜, 왜……. 저를 속이셨습니까?”
절박함이 묻어 있는 물음을 받아 든 아사드는 이전처럼 쉽게 답을 주지 못했다. 목이 졸리기라도 한 사람처럼 핏기 없는 낯으로 얼굴을 굳혔다.
케이든의 뺨에 닿아 있던 손이 천천히 떨어져 나갔다.
“알아내고 싶었어.”
“…….”
“당신과 가까워져서……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내게 뭘 숨기고 있는지, 비밀이 있다면 그게 뭔지…… 다 알아내고 싶었어. 그래서 일단은, 당신이 겁을 먹지 않을 존재가…… 믿을 수 있는 사람이 돼야겠다고 생각한 거야. 언젠간 당신과 협상을 해야 한다고 여겨서…….”
아사드는 어울리지 않게 머뭇댔다. 말을 제대로 끝맺지 못하고 입을 다물기까지 했다.
“협상이요?”
“당신이 순순히 황궁을 떠나게 하기 위한 협상.”
“…….”
“그땐, 그런 생각밖에 하질 못했어. 갑자기 내 인생에 끼어든 신이, 그 신이 내 앞에 데려다 둔 당신이 마음에 들지 않았으니까.”
아사드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어떤 방식을 이용해서건, 가장 좋은 합의점을 찾아서…… 당신과의 혼인을 깨고 싶었던 거야. 다치는 사람이 나오지 않게, 최대한 평화로운 방법으로.”
“…….”
“하지만 케이든…….”
아사드가 다급하게 말을 이었다. 언어를 바꿔서였다.
「난, 이젠 그딴 생각 안 해. 아문으로 변하는 짓도 그만두려고 했어. 이 우기가 끝나기 전에, 내가 숨겼던 모든 걸 당신한테 솔직하게 내보이려고 했어.」
그는 침묵하는 케이든과 더 가까이 거리를 붙였다. 하나 평소처럼 제 신부를 끌어안지 못했다. 입을 맞출 수도 없었다. 심판을 기다리는 죄인의 심경이 어떤 것인지를, 아사드는 태어나 처음으로 알게 됐다.
다시, 세상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케이든은 아사드와 눈을 맞췄다. 아사드라고 불러야 할지 아문이라고 불러야 할지 모를 남자를 비추던 햇살이 거짓말처럼 자취를 감췄다.
리헤트의 말처럼, 다시 무섭게 비가 쏟아질 듯했다. 지금 제 옷을 적시고 있는 빗물이 장난처럼 느껴질 정도의 거센 비가 내릴 터였다.
“저는 신탁 때문에 잠시…… 전하의 반려가 됐을 뿐입니다.”
“…….”
“그런 제가…….”
“…….”
「주제도 모르고 전하의 마음을 구걸했나요? 인생 폈다고 생각해서, 거만을 떨었나요? 저는 너무 멍청해서 음흉한 생각 같은 건 하지도 못합니다. 수작, 그런 게 뭔지도 모릅니다. 사람들에게 손가락질당할 생각 같은 건 한 번도 해 본 적 없어요. 그런데 왜…….」
케이든의 목소리가 빗줄기에 꺾여 힘없이 고꾸라졌다.
“왜 이렇게까지 저를, 기만하셨습니까.”
저를 고작 3년도 옆에 두고 싶지 않아서, 아사드는 아문이 되길 자처한 것이란 말인가? 그러기 위해서, 제 시종 노릇을 했다는 것인가? 그런 수고스러운 일을 할 정도로 저를 꺼려서…….
케이든은 아사드의 마음을 이해했다. 그런데도, 충격이 가시질 않았다.
「당신이 욕심 없는 거 알아.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알아. 케이든. 거의 1년에 가까운 시간이 지났어. 당신을 떠나보내겠다는 그딴 생각, 다 잊은 지 오래야. 내가 얼마나 달라졌는지…… 당신도 잘 알잖아.」
아사드의 말이 맞았다. 그는 달라졌다. 하지만 그 변화는 그저, 그가 원하는 걸 얻어 내기 위해 시작된 게 아니던가. 아사드가 제게 내보인 다정함 역시 억지로 꾸며진 것일지도 몰랐다.
케이든은 혼란스러웠다. 아사드가 내놓은 말의 어디서부터가 진심이고 어디서부터가 거짓일까. 아무것도 알 수가 없었다. 굳어 버린 머리 탓에 더욱 사리 분별이 되질 않았다.
“정말 저를 내쫓을 생각을 접으셨다면, 제게 솔직해지고 싶으셨다면, 적어도…….”
케이든은 말을 멈췄다.
적어도. 제가 아사드 당신과 다시 몸을 섞고, 사랑이니 행복이니 하는 말도 안 되는 꿈에 잠겨 바보처럼 굴기 전에 진실을 말해 주셨어야 합니다.
헛웃음이 나오는 생각이었다. 아사드에게 따지기라도 하고 싶은 걸까? 저를 더 빨리 내쫓기 위해 얼굴부터 목소리, 체격과 신분까지 모조리 바꾼 분께? 선생님의 역할까지 해 준 이에게? 싫은 사람을 더 빨리 눈앞에서 치워 버리기 위해 다정함마저 꾸며 낼 수도 있다는 사실이 케이든은 놀랍기만 했다.
끝내, 케이든은 아사드에게 제 생각을 꺼내 보이지 못했다. 제 입을 통해 나올 말이 너무나 의미 없게 느껴져 그랬다.
그는 다른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었다.
“제가 뭘 숨기고 있는지, 그 속내가 뭔지, 가지고 있는 문제는 뭔지……. 결국, 전하께선 다 알게 되셨습니다.”
“…….”
“이제, 저와 어떤 협상을 하실 건가요.”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 뜬 케이든이 말 한마디를 덧붙였다.
“전하께서 원하시는 게 뭐든, 다 받아들이겠습니다.”
케이든은 아사드에게, 아문에게 배신감을 느꼈다. 하지만 그 배신감도 이내 케이든 스스로를 향한 자괴감으로 금세 모습을 바꿨다. 검처럼 날카로운 모양을 하고 가슴께를 푹푹 쑤셔 댔다. 언제나처럼.
‘나는 왜 이렇게 멍청한 걸까.’
분수도 모르고 아사드에게 사랑을 느끼고, 그의 다정함에 빠져 허우적거렸다. 그를 의지했다. 우스운 망상을 하며 욕심을 부리려 들기까지 했다.
그렇게 멍청하게 굴었으니, 이런 결말을 맞이하는 것도 당연했다. 저를 진심으로 끌어안아 줄 사람은 이 세상에 없다고 의심했어야 했는데, 그러질 않았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