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름다운 신부 (78)화 (78/97)

“케이든, 나는…….”

아사드의 목소리가, 한결 거칠어진 빗소리에 조금씩 잡아먹혀 갔다.

리헤트의 경고를 들을걸. 괜히 밖을 나섰다가 이렇게 비를 맞고 말았다. 잠깐 사이에도 몸을 흠뻑 적신 거센 빗줄기를 원망할 수도 없었다. 경고를 듣지 않은 건, 다름 아닌 저였으니 말이다.

“비가 옵니다.”

“…….”

“이렇게 계속 빗속에 서 계시다간, 감기를 앓게 되실 겁니다. 그러니 돌아가세요. 협상 같은 건 비가 그치고 해도 되니까요.”

케이든은 웃어 보였다.

“시간이 오래 걸리게 하지 않을 겁니다. 번호를 매겨서 조건을 걸고, 보상을 원하고…… 그럴 생각도 없습니다. 언제든…… 전하께서 원하시는 때에 사라져 드릴 수 있으니 걱정하실 필요도 없습니다.”

빨리 놓아 달라는 듯 케이든은 자신의 손을 붙든 아사드의 손 위에 제 손을 겹쳤다.

아사드는 답이 없었다. 그는 케이든을 놓아주지 않았다. 아사드의 손이 자신에게서 도망치려는 남자를 올무처럼 조였다. 아사드 자신도 모르게 힘이 들어간 탓이었다.

“협상 같은 건 없어.”

가라앉은 목소리로 아사드는 말했다.

화가 난 것 같다. 하지만 아사드의 목소리가 차가워진 이유를 케이든은 알 수 없었다. 별안간 치솟는 불안이 두려워 케이든은 입 안을 짓씹었다.

“케이든. 당신은, 황성 밖으로 한 발자국도 못 나가. 내가 없이는 안 돼. 당신도 그걸 알잖아.”

케이든과 완전히 거리를 좁히며 아사드는 말했다. 열기가 사라진 그의 황금색 눈동자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미안하지만 어쩔 수 없어. 남은 평생…… 당신은 내 곁에 있어야 해. 내 눈이 닿을 곳에, 내 손이 닿을 곳에 있어. 그래야 해. 응?”

고저 없는 목소리가 케이든의 마음을 날카롭게 들쑤셨다. 곁에 있으라니. 아사드의 말을 되뇌던 케이든의 낯이 점차 어두워졌다.

“제가 보기 싫어 모습을 바꾸고…… 말벗을 자처하셨던 분이 왜 저를 옆에 두겠다고 하시는 건지, 저는…… 저는 모르겠습니다.”

“나도 모르겠어.”

“…….”

“하지만 그래야만 해.”

케이든은 아사드의 날카로운 눈을 마주했다. 그리고 허망해졌다.

아사드는 상반된 욕망 사이에서 헤매고 있었다. 자신이 왜 그러는지도 모르고, 저를 붙들고 있었다. 그런 아사드를 보며, 케이든은 한 가지 생각밖에 떠올릴 수 없었다.

오메가를 안는 게 처음이었던 황태자께선, 제 몸만은 마음에 드셨던 모양이었다. 도련님도 그랬었다. 쓸모 있는 거라곤 몸뚱이 하나밖에 없는 놈이라고 하질 않았던가. 결혼한 뒤에도 달라질 건 없다고, 저를 옆에 두고 찾을 거라고 했었다.

제 추측이 억측이건 아니건, 그게 뭐든 우습기만 했다. 제 몫이 아닐 서러움을 느끼며 케이든은 미간을 찌푸렸다.

“여기 헬리오에서, 황제의 곁을 지킬 수 있는 사람은 황비밖에 없음을 압니다. 그 사실을 알려 주신 분은 황태자님이십니다.”

“그래, 맞아.”

“다른 사람도 아니고 제가…… 황비가 될 거란 말씀인가요?”

케이든은 물었다. 허탈함에 잠긴 채로, 꼬인 물음을 내뱉었다. 아사드의 마음 근처에도 가 닿지 못할 뾰족함을 담아서였다.

“그래.”

“…….”

“내가 그렇게 만들 거야.”

황족 모두 제가 3년짜리 신부임을, 새로운 신부가 올 때까지만 자리를 지킬 이름뿐인 황태자비임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아사드는 저런 말을 했다.

케이든은 아사드의 말을 믿기 힘들었다. 아사드가 아문이었다는 사실만큼이나 믿을 수 없었다.

“아무리 신이 원하는 일이라고 해도, 결국 저 같은 사람은…… 그런 고귀한 자리에 앉을 수 없다는 걸 압니다.”

“…….”

“그런 일이 일어날 수도 있겠죠. 사람들이 좋아하는 이야기처럼, 황제와 황비가…… 두 사람이, 서로를 진심으로 사랑하면요.”

케이든은 아문에게 배웠던 ‘사랑’이란 단어를 입에 담았다. 겨울 날씨처럼 발음이 딱딱한 엘바의 ‘사랑’이 아니라, 부드럽게 혀에 감겨 오는 헬리오의 ‘사랑’이었다.

“하지만 전하께선…….”

끝내, 케이든은 말을 잇지 못했다. 저를 앞에 둔 아사드의 낯빛 때문이었다.

사랑. 고작 그 단어 하나를 입에 올린 것뿐이었다. 제대로 문장을 마치지도 못했다. 그런데도, 너무나 끔찍한 이야기를 전해 들은 사람처럼 아사드는 얼굴을 굳혔다. 그 모습이 꼭 제가 아주 잠시나마 입에 담은 사랑이란 말에 거부감을 느끼는 것처럼 보였다.

온몸의 피가 빠져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한참이 지난 후에야, 케이든은 미처 끝내지 못했던 마지막 말을 중얼거릴 수 있었다.

“전하께선, 저를 사랑하지 않으시니까요. 제겐……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겠죠.”

고작 한마디를 내뱉은 게 다인데, 마음이 아팠다. 저도 모르게 쌓아 올려 뒀던 기대가, 이제는 한낱 망상이 되어 버린 기대가, 한순간에 와르르 무너졌다.

우기에 겪었던 일들이 모두 이상한 꿈처럼 느껴졌다.

잠시나마 품었던 착각이 끔찍할 정도로 창피하게 다가왔다. 케이든은 부끄러웠다. 아사드와 밤을 보내며 행복을 느꼈던 자신을, 멍청하다 욕하게 됐다.

사랑한다, 은애한다. 끝내 아사드에게 제 마음을 내보이지 못했던 게 다행이었다. 그저 사랑이라는 말만 입에 담았을 뿐인데, 아사드는 기분 나쁘다는 듯 차갑게 얼굴을 굳혔다. 그런 아사드가 제 마음을 알아 버렸다면 어땠을까. 저를 정말 미워하게 됐을 거다.

케이든은 웃었다. 보기 싫게 우는 것보단 바보같이 웃는 게 나을 테니까. 그래서 웃었다.

아문을 앞에 두고 배웠던 제국어를 케이든은 다시 한번 떠올려 봤다. ‘나는 당신을 사랑해요.’ 아문은 너무나 부적절한 예문을 사용한다며, 혀를 차고 교재를 바꿔 버렸었다.

부적절하다. 그 말이 맞았다. 당신을 사랑한다는 이야기를 저는 평생 입에 담을 수 없을 테니까. 입에 담아서도 안 될 테니까.

어쩌면, 이렇게라도 모든 걸 알게 돼서 다행이었다. 잘된 일이었다. 아무것도 모르고 쫓겨나는 것보다는 모든 걸 알고 쫓겨나는 게 나았다.

무거운 침묵 속에서 케이든은 숨을 골랐다. 더는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하고 싶은 말 또한 생각나지 않았다. 머리가 어지럽기만 했다.

“저는……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케이든은 힘이 빠진 아사드의 손을 떼어 냈다. 사랑을 입에 담기 전만 해도 덫처럼 저를 쥐었던 손이, 저항 없이 떨어져 나갔다. 언제나 제게 억세게 엉겨 붙던 뜨거운 손이 미련 없다는 듯 저를 놓아줬다.

“나중에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케이든은 말했다.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그건 아사드 역시 마찬가지일 거다. 케이든은 그렇게 여겼다.

비에 젖은 눈이 따가웠다. 손등으로 대충 물기를 닦아 낸 케이든은 뒤돌아 걸었다. 비를 흠뻑 맞은 사람처럼 몸이 무거웠다.

아사드는 케이든을 붙잡지 않았다. 한참을, 빗속에 선 채로 작아져 가는 제 신부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더 긴 시간이 지난 후에는 케이든이 떠난 자리를 바라봤다.

“내가 왜…… 이런 멍청한 짓을 계속해 온 건지, 내가 뭘 바라는 건지…… 하고 싶은 게 뭔지, 나도 모르겠어.”

홀로 남게 된 황태자가 무거운 물음 속에 빠졌다. 사랑. 그 말도 안 되는 단어가 맴도는 머릿속으로 상처받은 신부의 얼굴이 떠올랐다.

〈전하께선, 저를 사랑하지 않으시니까요.〉

아사드는 케이든의 말에 반박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입을 열어 케이든의 말끝을 붙잡지도, 떠나려는 그의 손을 붙잡지도 못했다. 욕심을 내 끌어안을 수도 없었다.

“당신을 사랑한다…… 그런 얘기는 하면 안 되잖아. 잘못된 감정이고, 어그러진 말이니까.”

성이 난 빗줄기가 고개 숙인 아사드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것이 제 변명을 향한 신의 다독임인지 아니면 질책인지, 아사드는 알 수 없었다.

케이든을 쫓아가고 싶었다. 상처받은 남자를 끌어안고, 한 번만 더 나를 믿어 달라며 입을 맞추고 싶었다. 신이 아닌 제 신부의 앞에 무릎을 꿇고, 그에게 변명을 늘어놓고 싶었다. 케이든의 품에서 거꾸로 뒤집히고 말 제 세상을 겸허히 받아들이고만 싶었다.

하나 아사드는 그러지 못했다. 안개처럼 뿌옇고 밤처럼 까만 혼란 속에서, 나아가지 못하고 머뭇댔다.

“그래도…… 당신을 놓아줄 수는 없어.”

중얼거린 아사드는 눈을 감았다. 지금껏 단 한 번도 느껴 본 적 없던 후회가, 헬리오의 황태자를 끌어안았다.

* * *

언제 비에 젖었었냐는 듯 헬리오는 다시 건조해졌다.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청명했고 달처럼 새하얀 해는 아주 환하게, 때로는 몸서리치도록 따갑게 세상을 어루만졌다.

케이든은 빛의 정원 한가운데에 홀로 있었다.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연못가에 가만히 앉아, 햇살을 반사하는 수면의 반짝임을 눈에 담았다.

아문은…… 제게 빛의 정원을 소개하며, 찬란한 아름다움이 숨어 있는 공간이라고 말했었다. 뒤늦게나마 케이든은 아문의 말에 공감할 수 있게 됐다.

하나 빛을 품은 연못을 바라보는 일도 오래도록 이어지자 더없이 지루하게 변했다. 눈을 감은 케이든은 힘없이 고개를 떨궜다.

다시 별궁 안으로 돌아가야 했다. 자리를 너무 오래 비우면 사람들이 걱정할 테니까. 홀로 산책을 하려는 것뿐이라며 한사코 리헤트의 동행을 거절했으니, 그 말에 책임을 져야 했다. 바로 엊그제처럼, 소식이 없는 저를 찾느라 시간을 낭비하게 하고 싶지도 않았다.

가자. 마음을 먹은 케이든은 꾸물꾸물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가지런한 산책로로 찾아가 그 위에 섰다. 하나 쉽게 걸음이 떨어지질 않았다. 고작 서너 걸음을 걷다가 멈춰 서고, 다시 서너 걸음을 걷다가 멈춰 서길 반복했다. 조금 움직인 것뿐인데 피곤이 몰려왔다.

별궁으로, 서관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침실에서 저를 기다리고 있을 적막을 마주하기 싫었다. 조금이나마 시간을 끌어 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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