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조심할게.”
순식간에 얼굴이 환해진 아사드가 기쁘게 웃었다. 긴장으로 굳어 있던 케이든의 어깨를 다독여 주는 밝은 웃음이었다.
“하지만 나보단, 마물들이 더 조심해야 할 거야. 내 눈에 띄지 않으려고 애를 쓸지도 모르지.”
그렇게 말하는 이의 목소리에도 웃음이 섞여 있었다.
무슨 일을 앞두었건, 아사드는 언제나 자신만만하구나 싶었다. 이른 새벽부터 지금까지, 제게 어색하게 구는 모습만 보다가 이렇게 밝게 웃는 걸 보게 되니 좋기도 했다.
“케이든. 잠들지 말고 기다려 줘.”
“…….”
“이제야, 다시 마주 볼 수 있게 됐잖아. 당신과…… 못다 한 말을 마저 하고 싶어.”
그렇게 말하는 아사드의 눈빛이 무거웠다. 웃음을 머금은 얼굴은 여전히 환하기만 한데 말이다.
아사드가 이야기하는 못다 한 말이 무엇일진 알 수 없었다. 아사드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저는 감히 예측할 수 없었다.
하지만 케이든은 그게 뭐든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두운 밤, 다시금 어색한 대면을 하게 되더라도 상관없었다. 협상에 관한 이야길 듣게 된다고 해도 괜찮았다. 적어도, 돌아온 아사드에게…… 수고하셨다는 말 정도는 전할 수 있을 테니까.
모래 위에 선 아사드가 단칼에 마물을 베어 낼 수 있기를. 아무쪼록 그가 무사히 돌아오기를. 케이든은 그것만을 바랐다.
몇 번이고 입을 여닫으며 망설이던 케이든은 간신히 입을 열었다.
“네. 기다리겠습니다. 다치지 않고 돌아오시길 바라면서…… 기다릴게요.”
차마 얼굴을 마주한 채 말을 건네기 어려워, 케이든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숙였다.
아사드는 케이든의 얼굴을 억지로 들어 올리지 않았다. 제멋대로 눈을 맞추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케이든의 두 손을 잡았다. 말없이 그의 체온을 느꼈다.
이전과 같으면서도 다른 적막 속에서, 케이든은 제 손을 감싸고 있는 뜨거운 손을 내려다봤다. 평소와 달리 장신구 하나 착용하지 않은 아사드의 손에서 홀로 빛을 내는, 테가 얇은 반지를 봤다.
* * *
예상치 못한 일은, 모래 능선 위로 노을이 불길처럼 번지기 시작한 이른 저녁에 야영지를 찾았다.
천막의 문이 거칠게 젖혀지는 소리가 케이든의 상념을 깨웠다.
문을 연 이는 허리춤에 검을 찬 키가 큰 여자였다. 여자는 그 어떤 물음도 안내도 없이 천막 안으로 덜컥 발부터 들였다. 그 낯이 데면데면한, 이름 모를 전사였다.
“경황없는 짓을 저지르는 걸 이해해 주십시오.”
어느덧 가까워진 여자가 고개를 숙여 절도 있는 인사를 건넸다. 여자의 얼굴은 그 목소리만큼이나 흔들림 없이 무감해 보였다. 하나 드러난 이마엔 땀이 흥건한 상태였다.
‘무슨 일이 생겼구나.’
케이든은 급히 몸을 일으켰다. 제 목에 걸린 억센 줄을, 그 줄에 매달린 짧은 호각을 자신도 모르게 손에 쥐었다.
“야영지를 벗어나셔야 합니다.”
여자는 케이든에게 말했다.
열린 천막 너머에서 쏟아져 들어온 바깥의 소음이 조금씩 거칠어지고 있었다. 황족인지 귀족인지 모를 이가 벌컥 성을 내는 소리가 야영지 전체에 쩌렁쩌렁 울렸다.
남자는 계속해 목소리를 높였다. 여기가 가장 안전하다더니, 왜 멋대로 사람을 끄집어내려 하느냐며 덜컥 화를 냈다. 제게 무슨 짓을 하려 드는 거냐고 비명에 가까운 신경질을 부리기도 했다.
언성을 높이는 이가 그자 하나만도 아니었다. 아주 끔찍한 노래를 다같이 합창 중인 것만 같았다.
슬쩍 뒤를 돌아봤던 여자가 참지 못하고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헬리오에서 처음 들어 보는 말이었으나, 그것이 욕설이라는 것 정도는 케이든도 쉽게 알아챌 수 있었다.
“……따르겠습니다.”
입을 연 케이든이 여자에게 말했다. 처음 본 여자를 완전히 믿기 때문은 아니었다. 그저, 아사드가 누누이 불쾌감을 표해 온 이들과 반대로 행동하는 편이 나을 듯해 여자를 따르기로 한 것에 더 가까웠다.
아사드가 남기고 가겠노라 말했던 호위가 제 앞의 여자이리란 예감이 들기도 했다. 여자가 짧게 내뱉었던 욕설이 아사드의 삐딱한 입버릇과 어딘가 비슷하게 들려서 그랬다.
“황태자님께 충성을 맹세한 전사, 아미나입니다. 황태자비님을 모실 수 있어 영광입니다.”
역시나. 아사드와 함께 일하는 이였다.
다시 깍듯하게 인사를 올린 아미나가 케이든을 이끌고 천막 밖으로 나섰다. 그녀가 등에 멘 화살통에 담긴 붉은 깃 화살이, 주인의 움직임을 따라 불안하게 덜그럭댔다.
아미나의 걸음은 조금씩 빨라졌다.
“외곽에 세워 둔 결계를 확인하던 마법사가 마물의 공격을 받았습니다. 전하께 잘 보이겠답시고 본인이 나설 필요가 없는 일에 굳이 나서선, 이런 사달이 났습니다.”
제게 상황을 설명해 주는 아미나를 케이든은 급히 따랐다. 번잡해진 야영지 풍경을 살필 새도 없었다.
“결계의 시전자가 입은 타격이 큰 탓에 야영지의 결계까지 함께 흔들리게 됐습니다. 다른 마법사들이 힘을 내 주고 있지만, 야영지에 진입하려 드는 마물의 기세가 강합니다. 결계가 깨지면 마물과 맞서는 수밖에 없는데……. 저는 곧 깨질 거라 봅니다.”
아미나의 낯이 순식간에 떫어졌다.
“저와 같은 토벌대의 전사들이 높으신 분들을 대피시킬 겁니다. 운이 나쁘면, 야영지를 빠져나가기 전에 죽게 되겠지만요. 전사들 말고, 저기 소리를 지르고 계신 분들이요. 하지만 모두 황태자비님과는 거리가 먼 일입니다. 걱정하실 필요 없으십니다.”
“그, 그렇군요.”
“저처럼 유능한 호위가 함께이지 않습니까. 무사히 야영지를 벗어나시게 될 겁니다.”
목적한 곳에 도착했는지, 잠시 자리에 멈춰 선 아미나는 무기 거치대에서 검을 뽑아 자신의 허리춤에 하나 더 매달았다.
활과 화살통을 등에 지고 허리춤에는 두 자루의 검을 찬 아미나가 케이든을 돌아봤다. 당황한 케이든에게 단검 한 자루를 건넸다.
얼떨결에 단검을 챙기게 된 케이든은 아문이, 아니 사실은 아사드였던 그가 제게 알려 줬던 단검 사용법을 느릿하게나마 복기해 봤다. 자한 사령관을 위해 열렸던 연회가 끝나고, 바로 다음 날에 억지로 배웠던 거였다.
“사막의 마물들은 대개 사람이 많은 곳을 좋아합니다. 그런 곳만을 노리고요. 저 어두운 모래 밑에서 기어 나온 것들답게, 눈 대신 다른 감각을 사용해서 그렇습니다.”
아미나는 묶여 있는 말들을 향해 갔다. 계속해 말을 이어 가면서였다.
“다만, 그 감각이란 게 아주 섬세하지는 않기에 사람 서넛이 함께 있는 정도는 감지하질 못합니다. 상단이 세운 야영지며 수비대의 군막, 유랑민들의 터전처럼 사람이 여럿 모이는 장소를 주로 습격하는 이유가 있죠.”
“……당장은 야영지에서 벗어나는 수밖에 없겠군요.”
“네. 홀로 있을 때 가장 안전한 곳이 사막이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닙니다. 지금은 야영지에서 최대한 멀어지는 게 위협에서 벗어날 유일한 선택지 같습니다. 뒷일은, 일단 저 혼란한 무리에서 벗어난 후에 차차 생각해 보겠습니다.”
이야기를 마친 아미나는 곧장 말 두 마리를 풀어 줬다. 그녀는 위험을 감지해 흥분하기 시작한 말들의 갈기를 다정히 매만졌다. 그들의 입에 단것을 넣어 주며 무어라 말을 속삭이기도 했다. 말들이 자신의 이야길 다 알아듣는다고 믿는 것처럼 말이다.
“홀로 말을 타실 수 있으십니까? 오전에 보니, 전하께서 황태자비님을 뒤에서 끌어안으신 채로 함께 말을 타시…….”
“잘 타진 못하지만 탈 줄은 압니다.”
케이든은 황급히 아미나의 말을 가로막았다. 다 큰 남자가 그보다 어린 남자에게 안겨 말을 타는 모습이 너무나 우스워 보였을 거다. 아미나가 그 이상한 광경을 되새기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면…….”
아미나의 말이 이어지지 못했다. 말을 잊게 하는 광경을 보게 돼서였다.
솨아아. 마치 물살이 갈라지는 듯한 소리가 멀리에서부터 들려왔다.
저 앞, 먼 곳에 자리한 모래 언덕이 갈라지고 있었다. 갈라진 틈 사이로 열사의 색을 품은 거대한 뱀이 머리를 드는 순간, 아미나의 입에서 다시 한번 욕설이 흘러나왔다. 뱀이 내놓은 검붉은 혓바닥이 눈이 따가울 정도로 선명해 보였다.
아직 멀게만 느껴지는 광경이었음에도 야영지 여기저기에서 탄식이 터져 나왔다. 뱀의 몸뚱이가 그것의 바로 앞에 있던 작은 보초용 막사를 덮치자 혼란이 더욱 커졌다. 누군가가 비명을 내지르기도 했다. 케이든도 얼굴을 아는 황실의 일원들이 내뱉은 소리였다.
“저 막사에 있던 전사들은 진작 대피해 전투를 준비하고 있으니, 괘념치 않으셔도 됩니다.”
“…….”
“이곳에 계신 입만 바쁘신 분들도 부지런히 움직여야 할 텐데요. 저 막사처럼 되고 싶지 않으면 말입니다. 뭐, 말들은 저자들을 안장 위에 태우려 들지 않겠지만요.”
“……시종들은 괜찮을까요?”
혼비백산하는 귀한 사람들 사이에서 고군분투하고 있는 이들이 걱정됐다. 마물 토벌에 따라붙은 시종들이 많지는 않았다. 몇 황족과 귀족들이 데려온 이들이 대다수였다.
일을 시작한 지 오래되지 않은 듯 보이는 남자애들과 여자애들을, 위험한 일이 생길지도 모르는 곳에 저렇게 많이 데려오다니. 급박한 와중에도 괜히 마음이 쓰였다.
“대부분 사막에서 태어나고 자란 이들입니다. 자기 몸을 지킬 방법 정도는 압니다. 그리고, 황태자비님…….”
아미나가 하얀 말의 고삐를 케이든에게 넘겼다.
“후에 전하와 계실 때만이라도, 꼭 제게 말씀을 놓아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멋쩍게 덧붙인 아미나의 부탁에 케이든은 답했다. 저를 지켜 주러 온 이에게 말을 놓는 게 영 쉽진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였다.
“자, 이제 가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