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름다운 신부 (85)화 (85/97)

“사냥은 끝났어. 야영지의 전투도 마찬가지야.”

“…….”

“따라오지 말라는 걸 귓등으로도 안 듣고 모르는 척 여기까지 꾸역꾸역 쫓아온 멍청한 놈들 따위, 야영지에서 죽거나 말거나 상관 없었…….”

중얼중얼 혼잣말을 늘어놓던 아사드의 목소리가 별안간 뚝 끊겼다.

아사드는 침묵했다. 자신이 만들어 낸 침묵 속에서 아사드는 그저, 저와 맞닿은 케이든의 온도만을 느꼈다.

“케이든.”

그리고 아사드는, 케이든을 불렀다. 어울리지 않게 자그마한 목소리로 내뱉은 부름이었다.

“……네.”

“당신을 찾지 못할까 봐 무서웠어. 찾아낼 수 있을 거란 자신이 있었는데도 그랬어.”

“…….”

“지금도 그래. 무서운 것 하나 없어야 할 헬리오의 황태자가, 꼴사납게 손을 떨고 있잖아.”

아사드의 품에 안긴 채로, 케이든은 제 반려의 말을 귀에 담았다. 뾰족한 구석 하나 없는, 그저 다정하고 달기만 한 페로몬이 저를 끌어안는 게 느껴졌다. 모래사막을 사납게 헤매던 남자의 것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부드러운 향이었다.

케이든은 슬쩍 고개를 들어 밤하늘을 바라봤다. 뜨거운 아사드의 몸을 끌어안고 보는 사막의 밤이, 이전보다 아름답게 느껴졌다. 참 신기한 일이었다.

“황태자님.”

여전히 저 위를 올려다보며, 케이든은 아사드를 불렀다.

“응. 나 여기 있어.”

그리고 케이든은, 제 말벗의 이름을 입에 담아 봤다. 아주 오랜만에 그를 불렀다.

“……아문.”

아주 따뜻한 이름이었다. 또 마음 한편을 시리게 하는 이름이었다.

“예술관에 걸린 그림 앞에서 나한테 알려 줬잖아. 사막의 밤은 낮보다 아름답다고 했어. 기억해?”

“…….”

“불 앞에 앉아서 저 하늘을 보는데, 아문 네가 해 줬던 말이 떠오르더라. 네 말대로였어. 사막은, 낮보다 밤이 더 아름다웠어.”

케이든은 말을 잃은 아사드의 등을 다시 한번 가만가만 두드려 줬다.

“아사드.”

“…….”

“너는 나를 속인 사람이야. 하지만 이 세상 그 누구보다, 나를 솔직하게 대해 준 사람이야.”

천천히. 케이든은 말을 이어 갔다.

“내 말벗을, 선생님을…… 나는 평생 잊지 못할 거야.”

제 앞의 아사드에게, 아문에게, 케이든은 솔직한 진심을 전했다.

“정말 고마웠어. 고맙다는 말을 꼭 해 주고 싶었어.”

제 마음을 전하는 케이든의 입가에 아사드는 보지 못할 자그마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리고, 바람을 앞에 둔 촛불처럼 위태로운 목소리가 케이든의 말꼬리를 붙잡아 왔다.

“……미안해.”

신에게도 마음을 굽히지 않던 남자가 케이든에게 무거운 사과를 건넸다.

아사드로부터 생각지도 못했던 말을 전해 들은 케이든의 몸이 굳었다. 저를 끌어안은 아사드의 표정을 볼 수 없다는 게 다행인지 불행인지 알 수 없었다.

“……시간을 되돌리고 싶어. 신탁을 받던 그날로, 되돌아가고 싶어.”

“…….”

“그럴 수 있다면, 그땐, 이딴 허튼짓 하지 않고 당신을 알아 갈 거야. 아문이 아니라 내가, 아사드 메케리우스가, 당신의 남편이 모든 걸 함께할 거야. 난…… 그래야 했어.”

아사드의 말 속엔 웃음기가 묻어 있었다. 자기 자신을 향한 자조였다.

〈당신을 떠나보내겠다는 그딴 생각, 다 잊은 지 오래야. 내가 얼마나 달라졌는지…… 당신도 잘 알잖아.〉

우기의 끝자락. 별안간 쏟아지기 시작한 비를 맞으며 아사드는 말했었다. 자신은 달라졌다고 외쳤었다.

케이든은 더는 아사드를 의심하지 않았다. 빛의 정원에선 믿지 못했던 말을 밤의 사막에서 완전히 믿을 수 있게 됐다.

아사드의 변화는 그저 원하는 걸 얻기 위해 꾸며 낸 게 아니었다.

‘이 넓은 사막을 헤매서…… 결국, 나를 찾아와 줬으니까.’

그런 사람을 어떻게 믿지 않겠는가.

제가 아문에게 인간적인 애정을 느낀 것처럼 아사드 역시 제게 인간적인 애정을 가지게 됐기에 변한 것이라고, 케이든은 그렇게 여겼다.

사랑은 바라지 않았다. 아사드가 가진 자그마한 애정이 진실하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세상을 가진 사람처럼 기쁘게 웃을 수 있었다.

설령 또 한 번 바보같이 속아 넘어가는 것이라 해도 상관없었다. 아사드의 속임수라면, 기꺼이 넘어가 줄 수 있었다. 걸려 넘어져 줄 수 있었다.

“조금은, 전하를 원망했습니다. 웃기게도 배신감을 느꼈어요.”

천천히, 케이든은 말을 이어 갔다.

“하지만 지금은…… 그 원망도 배신감도 다 사라졌습니다. 조금도 남지 않았어요. 전하께서 제게 써 주셨던 마음을 의미 없는 거짓말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헬리오에서…… 저는 행복했습니다. 살면서, 이렇게 많이 웃은 날이 없었어요. 그러니 황태자님이, 아문이 조금도 밉지 않습니다.”

“…….”

“전하께서 제게 원하시는 게 무엇인지는 모릅니다. 그래도, 그게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뭐든 하겠습니다. 당장은 제가 떠나는 걸 바라지 않으신다면, 계속 옆에 있겠습니다. 남은 시간만이라도 전하를 위해서…….”

케이든은 말을 끝맺지 못했다. 포옹을 푼 아사드가 갑자기 거리를 벌린 탓이었다. 하나 아사드의 손이 케이든에게서 완전히 떨어져 나간 건 아니었다. 그는 케이든의 두 팔을 붙잡았다. 자신의 앞에 있는 남자가 도망가기라도 할까, 잔뜩 조급해진 채였다.

“왜 떠난다는 소리를 해. 왜 자꾸, 그런 말을 해.”

“저는…….”

“남은 시간? 그딴 건 없어.”

케이든을 붙잡은 아사드의 두 손에 힘이 들어갔다.

“케이든. 나는, 당신이…… 내 눈앞에서 사라지는 게 싫어.”

“…….”

“당신은 내가 손 뻗으면 닿을 곳에 있어야 해. 당신을 끌어안고 있으면 마음이 편해서…… 보이지 않으면 마음이 불편해서, 당신과 떨어지고 싶지 않아. 멀어지고 싶지 않아. 어떻게 해서든 붙잡아서 옆에 둘 거야.”

핏기 없는 낯으로 아사드는 말했다. 두서없는 말을 느릿하게 질질 끄는 것이 그답지 않았다. 아사드는, 혼란에 빠진 상태였다.

“당신이, 지금처럼 슬퍼하는 얼굴 하는 것도 싫어.”

“…….”

“살면서 이렇게 많이 웃은 적이 없다고 했지? 앞으로도 그럴 거야. 웃을 일밖에 없게 해 줄게. 내가 그렇게 만들어 줄 거야. 그러니까…… 내 옆에 있어.”

참 다정한 말이었다. 제 앞에 있는 남자가, 아사드가 케이든은 너무나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그가 내놓은 말의 진심을 가늠하고 싶지 않았다. 저 역시 당신의 슬퍼하는 얼굴이 싫다고 말하고, 뺨을 쓰다듬어 주고 싶었다.

하지만 케이든은 그럴 수 없었다.

케이든은 아사드를 사랑했다. 그러나 허황한 꿈을 꾸는 몽상가는 아니었다.

그는 저를 향한 아사드의 애착을 오해하지 않고 제 주제를 파악하려 했다. 태어나 처음 꿈꿔 본 몽상이 얼마나 민망한 꼴로 박살 나게 됐는지, 이미 우기의 끝자락에 충분히 경험해 봤으니 말이다.

“그런 말은…… 소중히 아껴 두셨다가, 사랑하는 분께 전해 주세요.”

진짜 연인도, 평생의 반려자도 될 수 없는 사람에게 그런 달콤한 이야기는 하시면 안 됩니다. 케이든은 그 말을 에둘러 표현했다.

역시나. 사랑이라는 말을 입에 담자 아사드의 얼굴이 삽시간에 굳어 버렸다. 비가 내리는 빛의 정원에서 마주했던 모습 그대로였다. 입 안이 썼다.

“내가 새로운 신부를 맞을 거라고 생각해?”

“…….”

“아니면, 그걸 바라는 거야? 어쩔 수 없이 내 옆에 남아 날 어르고 달래 주면서, 속으론 내 재혼 걱정을 하다가…… 기회를 잡으면 미련 없이 날 떠나려고?”

표정 없는 얼굴로 아사드는 물었다.

케이든은 아사드에게 쉽게 답을 주지 못했다. 무어라 대답해야 할까. 어렵기만 했다.

재혼 걱정을 하며 살다가 미련 없이 떠날 거냐니. 애초에, 저와 아사드가 부부라는 이름에 묶여 보낼 시간이 한정되어 있었다. 고작 3년이었다. 그 시간을 정한 건 제가 아니라, 이 황실 사람들이기도 했다.

당황한 케이든은 입만 달싹였다. 그러나 이내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아사드의 입가에 삐뚜름한 웃음이 걸릴 때까지 말이다.

“어쩌지. 나는 고작 몇 년, 몇십 년 가지고는 안 되겠는데.”

아사드와의 거리가 다시 가까워졌다.

“케이든. 내가 원하는 게 뭐냐고 물었지. 당신이 날 떠나지 않는 거. 그게 내가 원하는 거야. 다른 건 아무것도 바라지 않아.”

“…….”

“도대체 누가 당신을 겁먹게 하는 거지? 누가, 당신이 나를 떠날 생각밖에 못 하게 만든 걸까. 어머니? 아버지? 아니면, 그 외 떨거지들?”

“황태자님, 전…….”

「케이든. 나는 당신이랑 갈라설 생각 없어.」

“…….”

「정 내게서 벗어나고 싶거든, 시도해 봐. 무슨 방법을 써서 도망쳐야 할지, 지금부터 잘 고민해 둬.」

얼떨떨한 얼굴을 한 케이든을 내려다보며 아사드는 속삭였다.

「외도를 저지르고…… 죗값을 치르겠다면서 법관 앞에 서는 방법은 안 돼. 내가, 당신 상대역을 해 줄 알파 새끼를 죽일 거거든. 그 사람은, 증인이 되어 법관 앞에 설 수 없을 거야. 그게 누구든.」

“…….”

「외도의 증거가 사라지면, 이혼도 불가능하겠지?」

“전하. 왜 그런 무서운 말씀을 하십니까.”

“내가…… 무서워?”

“아뇨, 그게 아니라…….”

케이든의 말끝이 흐려졌다.

진심으로, 케이든은 아사드가 조금도 두렵게 느껴지지 않았다. 아사드는 화가 난 게 아니었다. 그는 꼭 겁에 질린 것처럼 보였다.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저렇게 뾰족하게 가시를 세우는 거다.

그런 아사드를 앞에 두고, 케이든은 오래도록 속으로 말을 골라내야 했다. 적잖이 충격을 받은 얼굴을 한 아사드가 초조해하는 게 느껴져서, 괜스레 마음이 급해졌다.

“황태자님. 제가 보이지 않으면 싫다는 마음이 드는 건, 그저 저와 정이 드셔서 그런 겁니다. 신부랍시고 매일 얼굴을 맞대야 했잖아요.”

“……정?”

“입을 맞춘 사람도, 희락기를 함께 보낸 사람도 다 제가 처음이라, 그래서, 저라는 사람까지 애틋하게 느끼시는 걸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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