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을 맞춘 사람도, 희락기를 함께 보낸 사람도 다 제가 처음이라, 그래서, 저라는 사람까지 애틋하게 느끼시는 걸지도 모릅니다.”
“…….”
“장난감이나 인형 따위에게 생긴 애착과 진짜 부부 사이에 생길 애착은 다를 겁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품는 감정은 그 무게부터 차이가 날 테니까요.”
케이든은 말을 이어 갔다.
“언젠가, 저를 붙잡은 걸…… 후회하게 되실 거예요. 정말 사랑하는 분을 만나시게 되면, 저 같은 건 더 빨리 치워 버렸어야 했다고 후회하게 되실 겁니다. 내가 아주 큰 착각을 했었다고 후회를…….”
아사드의 눈을 마주하던 케이든의 시선이 아래로 떨어졌다. 진실을 머금은 혀끝이 아팠다.
무슨 일이 있어도 당신을 떠나지 않겠단 거짓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
아사드를 사랑하기에 더더욱 그의 곁을 떠나야 했다. 아사드가 진짜 사랑에 빠지는 모습을, 케이든은 보고 싶지 않았다. 그 사랑 때문에 저를 원망하고 후회하는 모습을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정해진 시간 내에 황궁을 떠나게 된다면, 적어도 아사드의 웃는 모습만을 마음에 품고 갈 수 있을 거다. 케이든은 그렇게 생각했다.
“장난감?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난 그딴 것들한테 집착해 본 적 없어.”
“…….”
“당신은 좋으나 싫으나 다시 별궁으로 돌아가야 해. 나와 얼굴 맞대고 살아야지. 당신은, 내 신부잖아.”
아사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신이 내려 준 하나뿐인 반려잖아.”
“황태자님…….”
“남은 평생, 다신, 당신한테 거짓말 같은 거 안 할게.”
케이든을 붙잡은 아사드의 손에 다시 힘이 들어갔다.
“당신 앞에선 절대 모습을 바꾸지 않을 거야. 아문도 그 누구도 되지 않고, 아사드 메케리우스만으로 살게.”
아사드의 목소리에 떨림이 묻어났다. 그와는 조금도 어울리지 않는 연약한 음성이 떨렸다.
일어나선 안 될 일이 벌어질 것만 같은, 그러한 예감이 들었다. 케이든은 두려웠다. 겁을 집어먹은 심장이 요란하게 뛰었다.
“케이든, 나 이제 알아. 나는 당신을…….”
아사드는 케이든에게 무언가를 말하려 했다. 하지만 끝내 건네려던 문장을 완성하지는 못했다. 아사드는 침묵했다. 케이든과 눈을 맞추는 걸로 하지 못한 말을 대신했다.
“그러니까…….”
“…….”
“날 떠나지 마. 나 두고 가지 마.”
“황태자님.”
놀란 얼굴로 케이든은 아사드를 불렀다.
“전하, 우, 울지 마세요.”
안절부절못하며 케이든은 아사드의 뺨을 매만졌다. 아래로 뚝뚝 흐르는 아사드의 눈물을 제 손으로 닦아 냈다.
아사드의 숨만큼이나 뜨거운 눈물이 닿은 손이 벌벌 떨렸다. 케이든의 머릿속을 정신없이 맴돌던 모든 생각이, 아사드의 눈물에 잠겨 모두 형체도 없이 녹아내렸다.
“제가 잘못했어요, 잘못했습니다. 그러니까 울지 마세요.”
“말해 줘.”
“…….”
「나를 떠나지 않겠다고 해 줘.」
중얼거리는 아사드를 케이든은 끌어안았다. 항상 온도가 높던 아사드의 몸이 서늘했다. 그게 왜인지 속상했다. 아사드의 몸에 묻어난 차가운 바람의 향취가 아팠다.
“네. 그럴게요. 당장 궁을 떠나라고 하시기 전까지, 내도록 전하 옆에만 붙어 있겠습니다.”
저를 꽉 마주 안은 아사드의 등을 어루만지며 케이든은 몇 번이고 반복해 같은 말을 속삭여 줬다.
“……약속해 줘.”
아사드는 케이든에게 약속을 바랐다.
저를 사랑하십니까? 그래서, 이렇게 눈물을 보이며 저를 붙잡으려 하십니까? 케이든은 묻고 싶었다.
하지만 케이든은 묻지 않았다. 입을 다무는 편을 택했다. 답이 정해져 있는 물음을 내뱉을 용기가 나지 않았다.
‘아사드는 나를 사랑하지 않아.’
이미 알고 있는 답을 속으로 삼키며 케이든은 눈을 감았다.
“약속할게요.”
“…….”
“약속드리겠습니다.”
케이든은 말했다.
언젠가, 지금의 약속을 후회하게 될 거다. 아사드 역시 제게 약속을 운운한 걸 금세 후회하게 될지도 몰랐다. 그런데도…… 케이든은 약속을 말했다. 아사드의 눈물을 마주하는 게 싫어서,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덜컥 입에 담아 버렸다.
케이든은 아사드를 따라 울고 싶어졌다. 하지만 케이든은 웃었다. 묘한 안도감을 주는 아사드의 품속에서, 아사드를 안심시키기 위해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아미나와 전사들이 말을 타고 달려올 때까지. 케이든과 아사드는 서로를 끌어안은 채 차가운 모래바람을 맞았다.
사막의 밤은, 여전히 낮보다 아름다웠다.
* * *
우기 내내 가라앉아 있던 황궁의 분위기가 새로운 여름을 맞이하며 다시 활기를 찾아 가고 있었다. 활기를 찾은 건, 사람들의 입 역시 마찬가지였다.
황궁의 가장 낮은 곳에서부터 까마득하게 높은 곳에 이르기까지. 황제 헤세트가 그녀의 후계자와 크게 다퉜다는 이야기가 번지기 시작했다.
사람들 사이를 떠도는 소문은 이야기를 입에 담는 화자에 따라 그 내용과 끝맺음이 조금씩 달라졌다. 하지만 황제와 황태자 사이의, 더 친밀하게는 모자간의 다툼이 벌어진 원인에 대해선 모두가 입을 모아 같은 말을 했다. 언제나 여유작작한 황태자가 황제에게 불같이 화를 낸 이유가, 다름 아닌 황태자비 때문이라는 거다.
“갈라서고 싶어서 화를 낸 건가? 참다 참다 터져 버린 거지.”
목소리를 잔뜩 낮춘 남자 하나가 중얼거렸다. 세탁실 구석에 옹기종기 모인 시종들의 말까지 엿들을 사람은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랬다.
“아니.”
시종 아셀이 엄숙히 고개를 저었다. 그 난리가 벌어진 날, 때마침 알현실을 찾았던 황실 마법사단 소속의 학자를 애인으로 둔 이였다. 풀어 말하면 알현실을 빠져나갈 눈치가 없던 남자를, 마찬가지로 눈치가 없던 서너 명의 동료와 함께 구석에 처박힌 채 숨을 죽여야 했던 남자를 제 애인으로 둔 이였다.
“내 신부가 떠날 준비를 하게 만든 게 어머니냐고 성을 냈대. 눈빛이 어찌나 흉악한지, 무서워 죽는 줄 알았다더라.”
아셀은 자신이 애인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가감 없이 전했다.
“정말 무서웠던 거 맞아? 네 애인은, 막 태어난 거미 새끼만 봐도 비명을 지르잖아.”
“떠날 준비?”
“아, 난 알겠다. 진짜 떠나게 하려곤 했을걸? 타라 님의 뜻을 거부할 수는 없으니 일단은 부부로 맺어 주긴 했지만, 황비로 앉히긴 뭣한 인물이니까. 언젠간 쫓아낼 생각이었을걸. 아직은…… 조금 이른 감이 있지만.”
나이 든 시종 하나가 끼어들어 말을 보탰다. 황궁에서 30년 가까이 일한 여자였다. 경력이 그쯤 되면, 황실의 높으신 분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가 얼추 눈에 보였다.
세탁실에 모여 수다를 떨던 이들 몇몇 역시 나이 든 시종의 추측에 고개를 끄덕여 동조했다. 황궁에서 길게 일한 사람들이야, 황태자비가 아크에 오래 머무르지 못할 거라고 예상하던 차였다. 한때 별궁에 사는 유령이라고 불릴 정도였으니…… 그 결말이 빤하다 여겼다.
“그러면, 뭐가 문제라 화를 내신 거야? 자기가 싫어하는 사람이 떠나 주면 좋은 거 아닌가?”
“황태자님 입장에선 좋지 않았나 봐.”
다른 시종의 이야기에 침묵하던 아셀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내가 직접 들은 게 아니라 확신 있게 말하진 못하겠는데…… 어쨌든, 전하께선 황태자비님과 헤어질 생각이 없으신가 봐. 그래서 그 난리가 난 것 같대. 라크의 금붕어만도 못한 기억력에 따르면.”
어깨를 으쓱해 보인 아셀의 말이 다른 시종들의 흥미를 잡아끌었다. 빤한 이야기일 줄 알았는데, 아주 뜻밖의 전개가 아닌가. 내도록 뚱한 얼굴을 하고 있던 시종 하나도 이어질 말이 궁금하다는 듯 더 가까이 다가왔다.
“황태자님이, 폐하께 꼭 사춘기 소년처럼 화를 내셨다더라. 뭐라고 말한 건진 나도 모르겠고.”
기억을 더듬으며 아셀은 말을 이어 갔다.
“폐하께선 전하께…… 대충, 음, 내가 아주 살짝 조미료를 더 쳐서 말해 보자면…… 네가 바라던 일인데 왜 두 팔 벌려 환영하지 않느냐고, 너 역시 그 사람이 탐탁지 않아서 지금껏 골리고 기만한 것이 아니었냐고 웃으셨대. 그리고 글쎄…….”
“글쎄?”
“그렇게 말씀하시고 나선, 전하께…… 설마, 사랑에 빠지기라도 한 거니? 그렇게 물으셨다는 거야.”
아셀의 말을 들은 시종들의 얼굴에 놀라움이 번졌다.
“너무 다정한 물음이었대. 알현실 분위기가 꽝꽝 얼어붙었을 만큼. 열을 식혀 줄 마법석도 필요 없을 정도였다고 하더라.”
“……그래서? 그다음엔?”
그새 목소리를 더 낮춘 시종 하나가 아셀을 툭툭 치며 물었다.
“그러면 안 됩니까?”
“…….”
“황태자 전하께서 그렇게 되물으셨다지?”
그 말을 들은 누군가가 외마디 탄식을 내뱉었다.
“황태자님과 사랑이라는 말이 같이 놓일 수나 있는 거니?”
“그러니까.”
“그 예쁜 재상 아들부터 털 부숭부숭한 강아지랑 고양이들까지, 아니, 아니지, 그냥 이 세상 모든 걸 길가에 굴러다니는 돌멩이 보듯 보시는 분이…… 누굴 좋아할 수가 있는 거야?”
“됐어. 잡설은 그만하고, 그다음은?”
저마다 한마디씩 말을 보태는 이들의 등짝을 가볍게 한 대씩 치며, 누군가 분위기를 환기했다.
“어, 그다음은…… 나와 그 사람 일에 참견하지 마세요, 그 말을 끝으로 대화를 끊어 버리셨대. 그러곤 알현실을 박차고 나가셨고.”
장난스럽게 손을 털어 보이며 아셀은 입을 다물었다. 제가 가진 이야기의 끝을 알린 거였다.
“그게 다야?”
“응. 이게 다야.”
에이. 시종들은 말소리에 집중하기 위해 앞으로 굽혔던 몸을 폈다. 아쉽다는 듯 고개를 젓기도 했다. 수다스러운 새들처럼 조잘대면서였다.
“황태자 전하가 못생긴 황태자비를 그렇게, 그렇게, 구박한다더니. 믿을 소문 하나 없다. 그렇지?”
“못생기긴. 아주 미남자시래. 센 알지? 쪼그만 애. 걔가 그랬어.”
“정말?”
“그래! 걔가 제비뽑기 실패해서 마물 토벌 따라갔다가, 사고 나서 황태자비님이랑 고립됐었잖아. 센이 황태자비님이 너무 잘생겨서 깜짝 놀랐다더라. 어디 왕국의 왕자인 줄 알았대.”
더 정확하게는, 어느 망국의 사연 많은 왕자님이었다. 적어도 센은 그렇게 말했었다.
“뭐야. 그런 소리 들으면 괜히 궁금해지잖아. 별궁엔 갈 일도 없는데.”
“그 재수 없는 마탄을 한 방 먹여 줘서 더 잘생겨 보였을지도 모르지.”
마탄. 두 다리가 모두 부러져 침대 생활 중인 짜증 나는 황족의 낯짝을 떠올리며 아셀이 혀를 찼다.
“그건 또 무슨 얘기야?”
시종들이 아셀을 향해 또 한 번 몸을 굽혔다. 아셀을 보는 두 눈에 호기심이 일렁이고 있었다.
“마물 토벌 때 일 말이야.”
“나는 몰라.”
“아, 귀를 닫아 놓고 사시나들. 아니, 토벌대가 떠난 그날, 토벌대 야영지에 마물이 쳐들어와선…….”
다시 목소리를 낮춘 아셀이 과장된 손짓과 함께 말을 이어 갔다.
헬리오의 황태자와 황태자비를 둘러싼 소문은, 그렇게 사람들의 입과 입을 옮겨 다니며 바람을 탄 듯 멀리 더 멀리 퍼져 나갔다.
별궁을 기웃대는 이들이 많아진 건 조금 더 뒤의 일이었다. 모두, 황태자를 사로잡았다는 황태자비의 잘난 낯을 보길 원했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