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름다운 신부 (89)화 (89/97)

“……약속이라. 아사드 그것이 옆에 남지 않으면 발목이라도 부러트리겠다고 협박하던가?”

“네?”

“아니면, 자네를 가둬 두겠다고 하던가? 아, 나를 떠나면 당장 목숨을 끊어 버리겠다고 설치는 쪽일지도 모르겠어. 어떤 식이건 자해 공갈 한번 거하게 했나 보군.”

놀란 케이든은 헤세트에게 답을 주지 못했다. 간혹 케이든은 아사드가 너무 극단적이고 과격한 생각을 한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었다. 아무래도, 그 과격함을 자신의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은 모양이었다.

소파 등받이에 편히 몸을 기대고 있던 헤세트가 삐딱하던 자세를 풀고 곧게 허리를 세웠다. 짧은 침묵을 밀어내며, 무심한 목소리로 물음 하나를 건넸다.

“아사드를 사랑하니?”

케이든을 보는 헤세트의 눈은 차갑고 뾰족하지도, 그렇다고 둥글고 따스하지도 않았다. 황제는 그저, 자신이 알고 싶은 사실을 케이든에게 물었다.

“이국의 신이 내린 신탁 때문에 알게 된 남자를, 사랑하고 있느냐 물었어.”

케이든은 쉽게 답을 할 수 없었다. 사랑. 그 말이 막막하기만 했다.

헬리오에서, 벌써 1년에 가까운 시간을 보냈다. 그 짧고도 긴 시간을 지나오며 제 안에 남은 낯설고도 따뜻한, 제겐 너무나 과분한 기억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가장 마지막에 떠오른 건, 아사드의 웃는 얼굴이었다. 평생을 마음에 품게 될 것이라 예감했던 눈부신 낯이었다. 그 순간, 아사드의 눈에 담겨 있던 사람은 그 누구도 아닌 저였다.

케이든은 거짓말을 할 수 없었다. 차마 자신의 마음을 부정할 수 없었다.

“……네. 그분을, 마음에 품고 있습니다.”

“…….”

“그분을, 황태자님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반쯤 넋이 나간 얼굴로 케이든은 말했다.

케이든은 가진 게 없었다. 평생 무엇 하나 제대로 쥐어 본 적 한 번 없는 팔푼이였다. 케이든이 아사드에게 품은 마음은, 그가 태어나 처음 가져 본 아주 귀한 것이었다.

제가 가진 유일한 보물을, 가장 아끼는 것을 케이든은 모른 척할 수 없었다. 그래서 자신이 가진 하나뿐인 보물을 황제에게 솔직히 내보였다. 조금만 더 아사드의 곁에 머물게 해 달라 구걸하는 편을 택했다.

황제는 오래도록 침묵을 지켰다. 그러나 이내 한숨과 함께 다시 입을 열었다.

“왜 그런 마음을 품게 된 건지, 내 머리로는 이해가 되질 않아. 하지만 자네의 입장은 기억해 두지.”

피마로 떠나는 날 나를 다시 찾아와. 그 말을 끝으로, 헤세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를 따라 황급히 몸을 일으킨 케이든이 꾸벅 인사를 건네자 괜찮다는 듯 손을 휘휘 저어 보였다.

그렇게 헬리오의 황제는 케이든을 떠났다. 색이 없는 응접실의 한가운데에 케이든은 홀로 남게 됐다.

“…….”

어정쩡하게 선 상태로, 케이든은 닫힌 문을 멍하니 바라봤다. 아사드가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 * *

“내 말 듣고 있지?”

아사드의 속삭임이 케이든의 귓전을 간지럽혔다.

“네, 아주 잘 듣고 있습니다.”

케이든은 순순히 답을 내줬다. 돌아온 답변이 만족스러웠는지 케이든을 끌어안은 아사드의 힘이 조금 더 강해졌다.

매일 저녁. 때로는 두 손을 단단히 붙잡힌 채로, 때로는 품에 안긴 채로, 케이든은 아사드가 읊어 주는 이야기를 들어야 했다. 또 가끔은 입을 열어야 했다. 부부 사이엔 많은 대화가 필요하다는 아사드의 주장에 따라 갖게 된…… 대화의 시간이었으니까.

아문이 사라진 자리를 그대로 메꾸겠다는 듯, 아사드는 매일같이 케이든을 찾아왔다. 심지어 아문이 하던 일을 자신이 물려받을 것이라며 나서기도 했다.

〈당신에게 가르칠 게 많아. 많아도 너무 많지. 평생을 써도 시간이 부족할지도 몰라. 그러니 어쩔 수 없지. 내가 다시 선생님이 되는 수밖에.〉

이전처럼 케이든의 선생 노릇을 하겠다는 소리였다.

아문의 일을 하려 드는 아사드가 케이든은 어색했다. 아문과 아사드가 그저 외관만 다를 뿐 같은 사람이란 걸 잘 알면서도 그랬다.

그래도, 새로운 선생님이 되어 주겠다고 애쓰는 아사드의 방문이 싫진 않았다. 아사드에게 무언가를 배우는 일 역시 그의 역할이 낯설게 느껴지는 만큼 좋기도 했다.

접견실이나 응접실이 아닌, 오직 침실에서만 진행되는 아사드의 수업은 회담 준비가 바빠지면서 잠시 중단된 상태였다. 부부라면 응당 가져야 한다는 대화의 시간을 명목으로 케이든을 찾아오는 일까진 멈추지 않았지만 말이다.

요즘, 케이든은 아사드의 말벗이자 안고 있기 좋은 커다란 봉제 인형 비슷한 역할을 함께 하는 중이었다. 지금도 그랬다. 푹신한 소파 위에서 아사드에게 얌전히 끌어안긴 채 그의 말을 들어 주던 참이었다.

아사드는 자신의 품에 저항 없이 안겨 주는 케이든에게 그가 지나온 일과를 가감 없이 전했다.

케이든은 아사드가 두런두런 내놓는 말을 듣는 게 좋았다. 그의 목소리를 듣는 게 좋았다. 가끔은, 아사드가 저 발코니 너머에서 종일 쫑알대는 작고 귀여운 새들처럼 느껴져 웃음이 나오기도 했다. 아사드에겐 비밀로 해야 할 생각들이었다. 그 또한 귀엽다는 말을 꺼릴지도 몰랐다. 아문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오늘도 힘들었어.”

케이든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며, 아사드는 지난 하루 자신이 얼마나 고생했는지를 털어놨다. 불쌍한 척을 하며 괜한 투정을 부리는 거였다.

“진짜야. 어찌나 말이 안 통하는지, 내가 개 얘기를 해 보자고 하면 고양이 얘기를 꺼내는 식이라니까? 하다못해 늑대도 아니고 고양이를. 일부러 그러는 건지, 멍청해서 그러는 건지.”

케이든은 제게 답답함을 토로하는 아사드가 안쓰러워만 보였다. 모든 걸 쉽게 해내는 아사드도 힘들 때가 있구나 싶었다. 어쩌면, 모든 것을 쉽게 해내는 듯 보여야 하기에 더 힘든 걸지도 몰랐다.

하나 그런 아사드를 위해 제가 해 줄 수 있는 건 없었다. 그저 손을 붙잡아 주고 도닥여 주는 일밖엔 하질 못했다.

맞닿은 두 손을 보며 아사드는 만족스럽다는 듯 웃었다. 그런 아사드에게 케이든은 미안함만을 느꼈다. 저는 아사드를 위해 현명한 조언을 전해 줄 수 있는 배우자도,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될 사랑스러운 배우자도 되지 못했다. 그 사실이 너무나 마음에 걸렸다.

“당신은 뭘 하고 있었어? 사소한 것 하나까지 다, 내게 말해 줘. 응?”

“저는…… 언제나 똑같습니다. 아미나 님께 승마를 배우고, 리헤트에게 글 쓰는 법을 배우고…… 전하를 기다렸습니다.”

케이든은 급히 말을 줄였다. 전하를 기다렸다는 말이 어쩐지 부끄럽게 느껴져서 그랬다.

“당신이 나를 기다리는 게 싫지 않아.”

“그런가요…….”

“하지만 이제, 나를 기다릴 시간이 없을 정도로 바빠지겠지. 황태자비의 일을 배울 때가 됐거든. 사반과 선생 몇이 당신을 도울 거야. 당연히 나도 당신을 도울 거고. 헷갈리지 않게 하나씩, 하나씩 가르쳐 줄게.”

아사드는 케이든의 뺨에 입을 맞췄다. 당연하다는 듯 그 아래의 입술 위로 이어지는 장난스러운 입맞춤이 간지러웠다.

그 간지러움이 좋아서, 케이든은 제 안에 떠오른 부정적인 생각을 얼버무리게 됐다. 언젠가 다른 사람이 이어받아야 할 황태자비의 업무에 손을 대기 무섭다고 말하지 못했다.

“어머니는, 어쩌다 만나게 된 거야?”

입술을 뗀 아사드가 가볍게 물었다. 하나 그 가벼운 물음을 입에 담은 이의 눈빛이 묘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아름다운 미소를 머금은 입술과는 그 색이 달랐다.

어떻게 알았을까. 케이든은 놀란 기색을 숨기기 위해 노력했다. 아무래도, 이 별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아사드의 귀에 들어가는 모양이었다. 아문 역시 제 일거수일투족을 모조리 파악하고 있지 않았던가.

리헤트에게 보고를 받았을지도 몰랐다. 아사드가 아문일 때도, 리헤트와 제법 친하게 지냈으니 말이다.

‘아문이 리헤트와 사귀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지…….’

친한 걸 넘어서 연인이 될 거라고 여겼었다. 지금 돌이켜 보면 정말이지 우습기만 한 망상이었다.

아사드에게 어떻게 답을 해야 할까. 망설이던 케이든은 헤세트가 제게 전했던 이야기를 되새겨 봤다.

〈피마에 있는 자한에게 나를 대신해 축복을 전하는 것, 아사드에겐 그 사실을 비밀로 하는 것. 이 두 개가 자네가 해내야 할 일이야.〉

케이든은 꺼내야 할 말을 침착하게 골랐다. 그리고 조심히 입을 열었다.

“자한 님께 아주 좋은 일이 생겼다고 알려 주셨습니다. 사령관님께서 제게 소식을 전해 달라 직접 부탁하셨대요. 그분의 연인께서도 저를 궁금해한다는 이야기도 해 주셨습니다. 하지만 두 분을 직접 뵙는 건 서너 달 뒤에나 가능할 것 같다고…….”

“아…….”

“황제 폐하께서 많이 아쉬워하셨습니다.”

케이든은 그가 오늘 헤세트에게 전해 받은 이야기를 적당히 잘라 내놨다. 아사드가 외삼촌인 자한 사령관과 마르주에 관한 이야기를 이미 알고 있으리라고 생각해 긴 말을 더하지도 않았다.

“축하드릴 일이지. 뭐, 삼촌이야…… 당장 뵙건, 몇 달 뒤에 뵙건 아쉬울 게 없지만.”

자한의 이름을 들은 아사드의 분위기가 거짓말처럼 차분해졌다. 어딘가 객쩍음을 느끼는 듯 보이기도 했다.

“어릴 땐, 삼촌이 미친 사람인 줄 알았어. 반쯤은 사막의 유령 같은 꼴을 하고 황궁을 돌아다니기도 했고. 또 할아버지께 어찌나 사납게 적대감을 내비치는지. 보기 좋은 모습은 아니었지.”

아사드의 말이 이어졌다.

“하지만 이제는…… 삼촌의 마음이 이해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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