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한의 옆에 선 이는 마르주였다. 황실 사람들 사이에서 유명인이 된 마르주는, 자한의 연인이었다. 제 사랑을 포기하지 않은 자한이 오랜 시간을 들여 다시 찾아낸 그의 첫사랑이자 유일한 사랑이었다.
오직 마르주에게만 닿아 있는 자한의 시선과 달리, 마르주의 눈은 허공을 헤매고 있었다. 그는 장님이었다. 불투명한 뿌연 막이 낀 두 눈에는 빛이 들지 않았다.
〈마르주. 그 남자가 눈이 먼 건, 우리 아버지 때문이지.〉
피마로 떠나기 전 다시 독대해야 했던 황제는, 케이든에게 말했었다. 황궁의 고위 마법사들도 이전으로 되돌리지 못할 장애를 얻은 채로 남은 평생을 살아가야 할 거라며 고개를 저었었다.
앞이 보이지 않아서인지 아니면 피마에서의 생활이 여전히 낯설어서인지, 마르주는 바짝 긴장해 있었다. 자신의 행복을 조금도 숨기지 않고 드러내고 있는 자한의 모습과 대조적이었다.
하지만 그런 마르주도 이내 케이든의 기척을 알아채고는 굳었던 얼굴을 풀었다. 부드럽게 눈을 접어 웃어 보였다.
“황태자비님이 오셨군요.”
반가움을 머금은 마르주의 목소리가 다정했다. 자한이 염려했던 어색함은 찾아볼 수 없었다.
케이든은 아문에게 받았던 가르침을 떠올리며 마르주에게 예를 갖춰 인사를 건넸다. 쑥스러워하면서도 케이든에게 인사를 되돌려 주는 마르주를 보고, 자한은 기뻐했다.
만찬의 분위기는 자한의 주도 아래에서 밝고 가볍게 흘러갔다. 성의 주인이 자리해야 할 상석을 비워 두고 사이좋게 붙어 앉은 자한과 마르주의 모습이 보기 좋았다.
마르주에게 인사를 건넸을 때처럼, 케이든은 배웠던 식사 예법을 계속해 떠올리며 음식을 노려보기도 했다. 하나 그런 고민도 금세 무색해졌다. 정작 성의 주인인 자한이, 예법 따윈 상관없다는 듯 자유롭게 먹고 마셨기 때문이었다.
케이든은 금세 긴장을 풀게 됐다. 마음 편한 시간이 이어졌다.
자한이 케이든에게 슬쩍 말을 건네 온 건, 꿀에 절인 과일이 올라간 디저트를 앞에 두고서였다. 사람 좋아 보이는 웃음이 곧장 자한의 입가에 떠올랐다.
“황태자비님을 따라온 시종들에게, 피마에서 얼마나 머무를지 알고 온 것이냐 물어봤습니다. 일주일 정도를 지내게 될 것으로 알고 왔다고 답해 주던데요.”
“……네, 맞습니다.”
“하지만, 일주일은 너무 짧은 감이 있죠.”
“…….”
“눈 깜빡할 사이에, 너무 빠르게 흘러가 버리지 않습니까. 나는 당신이 이곳에서 보름 정도는 더 머무르다 갔으면 해요. 더 느긋하게.”
자한은 케이든에게 예상치 못한 제안을 건넸다.
“보여 드리고 싶은 게 많거든요. 아. 황태자비께서도 낯이 익을 손님들이 조만간 이곳을 방문할 예정이니, 적적하지도 않을 겁니다.”
입만 달싹이는 케이든과 시선을 맞추며 자한은 부드럽게 말을 이어 갔다.
“또한, 너무나 귀중한 선물들과 함께 오지 않으셨습니까. 내게 이리 열렬한 축하를 보낸 누님께 확실한 보답을 하고 싶어요.”
“…….”
“폐하께 안겨 드릴 선물을 준비할 시간이 필요해요. 대략 보름 정도면, 준비가 끝나려나?”
나는 황제를 위한 일을 해야 하니, 너는 내가 일을 마칠 동안 피마에 머무르며 기다려라. 자한은 이렇게 말한 것과 다름없었다.
자한은 케이든에게 부탁을 하는 게 아니었다. 그저 예의상 뜻을 물어봐 준 거였다. 케이든이 거절할 수 없는 제안임을 자한 역시 잘 알고 있으니 말이다.
“…….”
그러나 케이든은 자한에게 쉽게 답을 주지 못했다. 아사드에게 아무런 말도 남기지 않고 피마에 왔다는 사실이 마음에 걸려서였다.
남부로 향한 아사드의 일정은 열흘 정도면 끝이 날 것이다. 제가 피마에서 보름가량을 머문다면, 저는 아사드가 회담을 끝마치고 아크로 귀환할 때까지도 이곳 피마에 있게 될 거다.
“황태자 전하께선…… 제가 피마에 온 걸 모르고 계십니다. 회담 준비로 바쁘신 분께 방해가 될까 따로 말씀을 드리지 않았어요.”
“음. 아주 좋은 선택을 하셨습니다. 아사드가 알았다면, 이런 평화로움을 느끼지 못했겠죠.”
“아뇨. 그, 그러진 않았을 겁니다.”
“그럴까요? 나는 아니라고 보는데.”
“저는…… 전하께서, 제가 보이지 않아 마음이 상하시지 않을까 걱정이 듭니다. 일정을 마치고 궁으로 돌아오신 후에요.”
“황태자가 토라질까 봐 걱정된다는 말이군요.”
자한이 가볍게 웃으며 대꾸했다.
“아닙니다. 그저, 놀라서 저를 찾으실 것 같아 마음이 쓰입니다. 제가 그분께 거짓말을 했다는 걸 알면 더 기분이 상하실 테고요…….”
토라지다니. 케이든은 그럴 리 없다고 말하고 싶었다. 아사드는 그의 또래들에 비해 아주 어른스럽지 않은가. 제 부재에 토라지는 게 아니라, 제가 한 거짓말에 실망하게 될 거다.
“에이. 그거야, 마법사들에게 부탁해 말을 전해 두면 해결될 문제가 아니겠어요. 당장 수도로 편지를 보내 두죠. 회담장으로 곧장 보내긴 그렇고요. 엄청 신경 쓸 것 같거든요.”
“……알겠습니다.”
“하지만 애도 아니고, 고작 며칠을 홀로 기다리지 못하겠습니까. 편히 기다리지는 못할 듯싶지만요.”
“…….”
“이 기회에, 반려자에게 종일 들러붙어 있으려 드는 고약한 버릇을 고쳐 보라고 합시다. 떨어져 있을 줄도 알아야죠. 황태자비를 귀찮게 하지 않는 법이나 배우고 있으시라, 편지에 써야겠습니다. 어차피 회담 뒷정리를 하느라 피마엔 오지도 못할 테니, 꼴좋군요.”
쯧쯧. 자한은 혀를 찼다. 그 모습이 그의 누나인 헤세트와 퍽 닮아 있었다.
“자한, 당신도 내 옆에만 있으려고 하잖아요. 나와 보름 넘게 떨어져 지낼 수 있어요?”
자한의 말을 귀담아듣던 마르주가 목소리를 냈다. 차분한 미소와 함께였다.
“보름이요? 하루도 힘들어요.”
“그걸 알면서, 황태자 전하껜 왜 그리 냉정하게 구세요.”
“나랑 그 애는 다르죠. 나는…… 당신이 너무 아름다워서 어쩔 수가 없어요. 당신을 볼 수 없는 일분일초가 아까운 걸 어떡합니까. 무례한 개잡놈이 당신을 나 몰래 훔쳐볼까 봐 걱정된다고요.”
“전하께서도 당신이랑 같은 생각을 하실 거예요. 어여쁜 황태자비님을 걱정하고 계시겠죠. 지금도요.”
케이든은 자신이 아무것도 마시고 있지 않아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입에 무언가를 머금고 있었다면, 마르주의 말을 듣고 깜짝 놀라 입에 든 것을 모조리 뱉어 내게 됐을 테니 말이다.
아무래도…… 마르주가 제게 큰 오해를 갖게 된 것 같았다. 자한이 자신의 연인과 처지가 닮은 제 외모를, 저와 아사드의 관계를, 마르주에게 더 좋은 쪽으로 부풀려 전한 게 틀림없었다. 한껏 꾸민 이야기를 들려준 거다.
당황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 저를 보며 소리 없이 웃는 자한이, 케이든은 어딘가 얄밉게 느껴졌다.
마르주가 제 얼굴을 눈에 담지 못한다는 걸 알면서도 케이든은 민망해 그의 시선을 피했다. 하나 마르주가 가지고 있을 오해들을 정정할 생각은 없었다. 마르주가 제 외모를 아름답다 오해하는 편이, 저와 아사드 사이를 그와 자한처럼 사랑이 가득하다고 여기는 편이 나았으니까.
자한이 마르주와 저를 닮았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마르주 역시 저와 그가 닮았다고 여기고 있을지도 몰랐다. 훗날 그 오해가 깨진다고 한들…… 당장은 마르주에게 희망을 주고 싶었다. 황태자의 옆에 있는 황태자비처럼, 가진 것이 없는 자신 또한 자한의 곁에 머물 수 있다는 희망 말이다.
“미운 조카님께 황태자비님의 안부를 더욱 상세히 전해 보죠. 놀리지도 않겠습니다. 그럼 괜찮겠어요?”
“……네, 감사합니다.”
자한의 물음에 케이든은 순순히 답했다. 어딘가 멋쩍은 기분이 들었다.
“피마에 오래 머물러 주신다니 기쁩니다. 자한에게 황태자비님의 이야기를 전해 들은 후로, 계속 만나 뵙고 싶었어요.”
맞은편에서 아주 어슴푸레하게 느껴지는 인영을 향해, 마르주는 말을 건넸다.
“내일은 더 오래 대화를 나눠 볼 수 있으면 좋겠어요.”
“그럼요. 제가 재밌는 사람은 아니지만…… 원하시는 만큼 옆에 있어 드리겠습니다.”
마르주를 따라 케이든은 슬며시 미소 지었다. 제 표정을 마르주가 알아채 줄 거란 생각이 들어서였다. 어딘가 뾰족한 낯이 된 자한의 눈치는 보였지만 말이다.
“하하. 나이 차이는 조금 나지만, 두 분이 가까운 친우가 되길 바라겠습니다.”
자한 역시 싱긋 웃어 보였다. 정작 그의 두 눈에선 웃음기를 찾아볼 수 없었어도.
어딘가 불퉁한 자한의 얼굴을 보니, 자연스럽게 아사드가 생각났다. 제가 그 모르게 피마에 왔다는 사실을 전해 들은 아사드 역시 저리 불퉁한 얼굴을 할 것이 분명했다.
〈나는, 당신이…… 내 눈앞에서 사라지는 게 싫어.〉
어두운 밤의 사막에서, 아사드는 제게 말했었다. 한편에 두려움을 품은 목소리로 간신히 속마음을 내뱉었었다.
‘……편지를 써야겠다.’
케이든은 마음을 바꾸게 됐다. 자한이 제 소식을 아사드에게 가볍게 알려 주는 것보단, 제가 직접 아사드에게 말을 전하는 편이 나을 듯했다.
아사드에게 제 편지도 함께 전해 달라고, 식사가 완전히 끝난 후 자한에게 부탁해 봐야 할 듯싶었다. 호들갑을 떨 일도 아닌데 괜스레 마음이 조급해졌다.
* * *
지지부진하게 이어졌던 지난 회담과 달리, 올해 여름의 평화 회담은 빠르게 진행됐다. 새롭게 생겨난 문제들에 관한 두 나라의 이해관계가 잘 맞아떨어졌기 때문이었다. 각 나라를 대표하는 후계자 모두가 회담을 빨리 끝마치고 싶어 하기도 했고 말이다.
이제 막 20대 후반에 접어든 연국의 왕세자는 이른 나이에 반려를 맞는 나라의 풍습을 등진 이였다. 웃는 낯을 한 순한 인상의 미남자는, 그가 가진 분위기와는 영 어울리지 않는 과격한 반항을 하며 꽤 오랜 시간 혼례를 올리는 걸 피해 왔다.
그리고 드디어, 본인이 원하던 이와 혼인을 할 수 있게 됐다더니…….
왕세자의 반려 자리에 앉게 될 자가, 오래전부터 그의 뒤를 따라다니던 보좌관이었을 줄이야.
이제는 티를 내도 괜찮다는 듯 대놓고 손을 잡고 속닥거리는 두 사람을 보며, 아사드는 제 앞에 놓인 유리컵을 깨부술 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