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울했다. 저는 왕세자가 미혼인 탓에 케이든과 장장 열흘을 동떨어져 있게 됐는데, 저 뻔뻔한 인간은 자신의 반려자를 하나뿐인 보좌관이랍시고 회담장에 데려왔으니 말이다.
“보기 불편했다면 미안합니다. 하나 자리를 비운 사이, 나의 반려가 다시 내게서 멀어져 버릴까 걱정이 돼서요. 차마 홀로 올 수가 없었습니다.”
왕세자는 그의 보좌관이 잠시 회담장 밖으로 나간 사이에, 아사드에게 먼저 말을 건네 왔다. 아사드의 불편해하는 기색을 알아채고서였다.
아사드는 남자를 향해 마주 웃어 줬다. 비웃음에 가까운 것이었다. 왕세자가 우스워 그랬다. 자신의 보좌관이 자리를 비우자마자 별안간 유려한 제국어를 쓰기 시작하는 모습이, 참으로 가증스럽지 않은가.
“그와 혼인을 약속하게 된 과정이 순탄치 않았기에 그렇습니다. 한 나라의 지존이 될 내가 은애하는 이와 혼인을 하겠다는데, 어찌나 방해들을 해 대던지요.”
“……이해합니다. 그것들을 다 죽일 수도 없고. 답답하셨겠죠.”
아사드는 왕세자의 말에 가볍게 답했다. 어느 정도 공감되는 부분이 있어 응해 준 것이었다.
“제국의 황태자께서 나를 이해해 주실 줄은 몰랐습니다.”
“나 역시 조만간, 비슷한 상황을 맞게 될 듯해 그렇습니다. 뭐, 걱정은 없습니다.”
“네. 잘 헤쳐 나가실 겁니다.”
아사드와 시선을 맞추며 왕세자는 말했다. 부드럽게 눈을 접어 웃으면서였다.
“왕세자께서도, 혼인식 전에 한 번 더 경고를 해 두셔야겠군요.”
“그렇지요. 기쁨만이 가득해야 할 날에, 이 손에 피를 묻힐 순 없으니까요.”
그렇게 말했던 왕세자는 제 보좌관이 다시 모습을 보이자마자 순한 얼굴로 눈웃음을 지었다. 제국어가 어색한 척을 하며 보좌관에게 통역을 부탁했다. 정말이지, 그 낯만이 멀끔한 인간이었다.
떫은 얼굴을 한 아사드를 향해 작게 웃어 보인 왕세자는 보좌관이 바쁜 틈을 타 말 한마디를 덧붙였다. 속삭임에 가깝게 목소리를 낮춘 뒤였다.
“다음 회담에선, 저 또한 황태자께서 은애하시는 분을 뵙게 되겠군요.”
“…….”
“아무쪼록 소원하시는 일이 잘 풀리길 바랍니다.”
이어진 말은 제대로 들리지도 않았다. 은애. 여전히 어색하게만 느껴지는 그 말이, 아사드의 머리를 굳게 했다. 꼭 약점을 들킨 사람처럼 입이 말랐다. 머릿속이 하얗게 변했다. 심장이 제멋대로 뛰었다.
하지만 끝내, 아사드는 왕세자의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남자의 말을 부정하는 것이 그의 말을 듣고 떠올린 남자를 부정하는 것과 다름없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리고…… 더는 제 마음을 부정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그래서 아사드는 침묵했다.
돌아간 숙소에서, 아사드는 오래도록 케이든을 생각했다. 지난 일주일 내내 시도 때도 없이 떠올렸던 남자의 얼굴을 다시금 그려 보게 됐다.
침대에 등을 기대 누운 채로 아사드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어둠에 잠겨, 케이든을 향한 그리움 사이를 유영했다. 눈을 감았다 뜨길 반복하며 여전히 낯설고 어렵기만 한 진실을, 하지만 끝내 인정하게 된 제 마음을 들여다봤다.
아름다운 사막의 밤하늘 아래에서 아사드는 자신이 케이든에게 품은 감정이, 욕심이 무엇인지를 완전히 깨우치게 됐다. 오랜 금기에 발을 들이게 됐다는 걸 인정해야 했다. 사랑. 끝끝내 모른 척했지만 더는 숨길 수 없이 새어 나오게 된 마음이 전신을 흠뻑 적셨었다.
하지만 그 사랑을 차마 입에 담을 순 없었다. 케이든에게 제 마음을 전하지 못했었다.
이런 어설픈 마음을 드러내느니 입을 닥치고 사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랬다. 도통 실감이 나질 않아 두렵기도 했다.
제 사랑은 이제 막 태어난 애처럼 바보 같고 엉성했다. 마물들처럼, 힘만 세고 과격했다. 이딴 걸 자랑스럽게 내보였다간 케이든이 질겁하고 제게서 등을 돌릴지도 몰랐다.
어쩌면, 도망쳐 버릴지도 몰랐다.
아사드는 저와 케이든 사이에 시간이 필요하다고 여겼다. 제 꼴이 이래서야, 사랑은 황제를 멍청하게 만든다는 말을 증명하는 것밖엔 안 됐으니까.
하지만…….
‘언제까지 뒷걸음질만 칠 생각이지?’
감겨 있던 아사드의 눈이 느릿하게 뜨였다. 불빛을 받은 속눈썹이 반짝였다.
저는 케이든이 제 말을 믿어 줄지부터 걱정해야 했다. 그리고 케이든이 저를 믿어 주길 바란다면, 먼저 제 마음을 숨김없이 보여 줘야 했다. 케이든은 눈치가 좋은 듯 없는 사람이니 제대로 보여 줘야 할 것이다.
〈아무리 신이 원하는 일이라고 해도, 결국 저 같은 사람은…… 그런 고귀한 자리에 앉을 수 없다는 걸 압니다.〉
〈그런 일이 일어날 수도 있겠죠. 사람들이 좋아하는 이야기처럼, 황제와 황비가…… 두 사람이, 서로를 진심으로 사랑하면요.〉
〈하지만 전하께선……. 전하께선, 저를 사랑하지 않으시니까요. 제겐……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겠죠.〉
아사드는 케이든이 제게 간신히 쏟아 냈던 말들을 되새겨 봤다. 비를 맞아 흠뻑 젖은 얼굴을, 제게 배신감을 느끼던 이의 얼굴을 떠올렸다.
아팠다. 그저 떠올리는 것만으로, 마치 비처럼 쏟아지는 날붙이들을 몸으로 맞는 듯 괴로웠다.
사랑을 말하면, 케이든이 평생 내 옆에 남아 줄까?
저는 케이든이 아니니 그 답을 알지 못했다. 그에게 거절을 당할지도 몰랐다. 자신이 말한 조건은 두 사람의 사랑이지 당신 한 사람의 사랑이 아니라며, 황비 자리에 오르길 거부할 수도 있었다.
하나 거절을 당하는 게 케이든이 가진 오해를 그대로 내버려 두는 것보단 나으리라. 그가 받은 상처를 모른 척하는 것보다 나았다.
이제야 그런 생각이 들다니. 아사드는 케이든의 앞에서만 튀어나오는 자신의 어리숙함이 지긋지긋했다.
아사드는 제 손을 쳐다봤다. 약지에 끼워 둔, 제 신부를 닮은 반지를 빤히 들여다봤다.
“어울리지도 않게 겁을 먹었네.”
아사드는 스스로를 향해 혀를 찼다. 자신을 비웃었다.
케이든에게 마음을 전해야지.
그가 저를 원치 않는다고 한들, 아사드는 케이든을 놓아줄 생각은 없었다. 진작 그리 마음먹었으면서 웃기지도 않게 겁을 집어먹고 순한 양처럼 굴려고 들었었다.
“당장은 내 마음을 믿지 않아도 괜찮아. 평생을 걸쳐서 믿게 해 주면 되니까.”
걱정과 불안을 끌어안은 채로 같은 자리만을 빙글빙글 맴도는 건 제 성미에 맞지 않았다. 일단은 나아가야 했다. 아문이 아닌 아사드 메케리우스로서 말이다.
“언젠간 케이든도…… 나를 사랑해 줄 거야.”
백발노인이 된 뒤에나 저를 마음에 담아 준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섣부른 상상이, 케이든에게 입을 맞추고 싶다는 생각이, 아사드를 다시 한번 웃게 했다. 불안이 아닌 새로운 희망이 그의 마음께를 간질였다.
* * *
열흘간 이어질 것이라 예정되어 있던 회담의 일정이, 3일가량 줄어들게 됐다. 이 역시 새롭게 생겨난 문제에 관한 두 후계자의 이해관계가 잘 맞아떨어졌기에 가능해진 일이었다.
불편한 제복을 벗어 버릴 생각도 하지 않고 아사드는 황급히 수도 아크로 귀환했다.
동맹 관계인 제국에게 전하는 연국의 사려 깊은 선물들이 함께였으나, 정작 제국의 황태자는 그 선물들을 조금도 신경 쓰지 못했다. 다시 얼굴을 마주하게 될 자신의 반려자에게 전신의 신경이 쏠려 있어서였다.
본궁에 있을 황제를 알현하는 일을 뒤로 미루고, 아사드는 곧장 별궁으로 걸음을 옮겼다. 귀찮게 따라붙는 시종들과 호위들을 다 물려 버리고 다급히 움직였다.
이내, 아사드는 별궁 서관에 발을 들였다.
이른 귀환이었다. 케이든에겐 아직 제 소식이 가 닿지 못했을 거다. 갑작스러운 등장이 케이든을 기쁘게 할지 놀라게 할지, 아사드는 예측이 되질 않았다.
하나 그 속이 어떻든 케이든은 분명, 일단은 눈을 크게 뜨고 저를 올려다볼 거다. 그러다 다시 평소처럼 차분해지겠지. 아사드는 저를 보며 쑥스럽다는 듯 웃어 줄 제 신부를 머릿속에 마음껏 그려 봤다. 터무니없이 유치한 상상을 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들썩였다.
긴 다리로 성큼성큼 계단을 오르고 뛰듯이 복도를 걸어, 아사드는 황태자비의 침실 앞에 섰다. 다짜고짜 문을 열어젖히려다가 멈칫하곤 조심히 문을 두드렸다.
하나 케이든은 답이 없었다. 서관의 호위들이 반절이나 자리를 비운 걸 보아, 리헤트와 함께 외출 중일지도 몰랐다.
아사드는 제게 답을 주지 않는 커다란 문 앞을 서성였다. 그러다 결국, 참지 못하고 문을 열고 말았다. 자리에 없다는 걸 확실히 확인해 두고 싶었다. 그래야 곧장 찾으러 나설 수 있지 않겠는가.
예상대로 문 너머엔 케이든이 없었다. 아사드를 반겨 준 건, 그가 예상치 못했던 이질적인 풍경이었다.
아사드는 침묵했다. 그는 말을 잃었다. 뒤를 돌아 다시 케이든을 찾으러 갈 생각도 하지 못한 채 굳어 버렸다.
“…….”
황태자비의 침실은 아사드가 케이든과 혼인식을 올리기 전처럼 변해 있었다. 케이든이란 사람이 단 한 순간도 머무른 적이 없었다는 듯, 그저 텅 빈 상태였다.
* * *
회담을 마치고 귀환한 황태자가 본궁의 황제 알현실에 들어섰다. 아니, 들이닥쳤다.
알현실을 박차고 들어온 아사드 메케리우스는 회담에서 돌아온 재상들과 말을 나누는 중이던 황제를 빤히 바라봤다. 제 신부를 만난다는 기대감으로 반짝이던 황금색 눈이 차분히 가라앉아 있었다. 어딘가 소름 끼치는 구석이 있는 침착함이었다.
제 아들의 낯을 본 황비 카심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그는 눈치껏 재상들을 물렸다. 피곤한 설전이 이어지겠구나 싶어 미간을 찌푸리면서였다.
황제는 말이 없었다. 그저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무감한 얼굴로, 제 아들을 내려다볼 뿐이었다.
“제 신부를 어디로 빼돌리셨습니까.”
“네가 페로몬을 갈무리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다니. 이런 건 또 처음이구나. 여기까지 오면서, 얼마나 많은 사람을 숨 막히게 했을지.”
“…….”
“아사드. 지금 네 페로몬이, 사람 하나 찔러 죽일 것처럼 뾰족한 걸 아니?”
헤세트는 물었다. 하나 답을 원하진 않았다. 삐뚜름한 미소를 지으며, 황제는 곧장 말을 이어 갔다. 감정이 드러나지 않는 고저 없는 목소리와 함께였다.
“황태자비를 빼돌린 건 아니야. 그저 사라지게 한 것뿐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