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름다운 신부 (95)화 (95/97)

신의 기사인지 신의 대적자인지 모를 기이한 분위기를 가진 침입자는, 제국의 황태자였다.

입이 있는 자 모두 말을 잃었다. 오직 티티만이, 갑자기 전쟁이라도 난 거냐며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까닥였다.

‘……아사드가 왜 여기에 있지.’

말을 잃은 건 케이든 역시 마찬가지였다. 지금 자신이 서 있는 곳이 해가 자취를 감춘 사막의 한가운데인지, 평온한 피마인지 헷갈릴 정도의 기시감이 그를 찾아왔다.

아사드는 어느덧 케이든의 지척에 섰다. 아사드는 그가 남단으로 떠나기 전, 케이든이 의상실에서 시착 중이던 그를 마주 봤을 때와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회담에서 입을 의상 중 하나라는 흰 제복은 감탄이 나올 정도로 아사드와 잘 어울렸었다.

제복은 모래 먼지를 뒤집어썼음에도 여전히 희게 빛나고 있었다. 제 눈에 들어오는 모든 것이, 도통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어쩌면 꿈을 꾸는 중인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애초에, 아사드가 이곳 피마에 말을 타고 올 일이 없지 않은가. 저렇게 제복을 차려입은 채로 말이다.

피마에서 보름가량을 머무르게 됐다 알리는 제 편지는 이미 사흘도 더 전에 황궁에 당도했을 것이다. 피마의 마법사가 그린 마법진을 통해 황실 마법사에게 전달됐으니 말이다. 아사드가 아크에 들렀다면, 제가 부친 편지를 보지 못했을 리 없었다.

멍청한 얼굴을 하고 있던 케이든은 물러난 리헤트의 자리를 차지한 아사드에게 두 팔이 붙들렸다. 그제야, 케이든은 상념에서 깨어나게 됐다. 자신이 선 곳이 꿈속이 아니라는 걸 알아채게 됐다.

“아…….”

케이든은 그도 모르게 앓는 소리를 냈다. 통제가 되지 않고 날뛰는 아사드의 페로몬이 따가웠다.

그런 케이든의 모습에 아사드는 당혹감을 느꼈다. 저절로 낯이 찌푸려졌다. 하지만 붙잡은 케이든을 놓아줄 생각은 없어 보였다. 물러설 생각은 더더욱 없었다.

“전하…….”

케이든은 속으로 탄식했다. 타인의 페로몬에 무딘 편인 저마저 살갗에 두꺼운 바늘이 꽂히기라도 한 듯 아릿한 고통을 느꼈다. 어쩌면, 훈련장에 모인 알파와 오메가 전부가 아사드의 페로몬에 고통받고 있을지도 몰랐다.

아사드는 페로몬을 갈무리하지 못하는 알파며 오메가들을 경멸하던 남자였다. 그런 그가 일부러 페로몬을 내보일 린 없었다. 건강에 문제가 생겨 이러는 걸지도 몰랐다. 페로몬이 통제되지 않는 이유가 그것 말고 무엇이 더 있겠는가.

“몸이 안 좋으십니까?”

케이든은 황급히 아사드의 낯을 살폈다.

아사드는 오랜 시간 잠에 들지 못한 사람처럼 두 눈이 시뻘겠다. 안색 역시 좋질 못했다.

혹시나, 회담에서 나쁜 일이 생긴 걸까? 정신적인 문제가 아사드의 몸까지 힘들게 하는 걸 수도 있었다. 아사드를 보는 케이든의 눈빛에 걱정이 한가득 묻어나게 됐다.

“내가 그랬잖아. 당신이 어디에 있건 찾아낼 거라고.”

침묵하던 아사드가 입을 열었다. 하나 케이든의 물음에 답을 준 것은 아니었다. 아사드는 그의 건강 문제나 갑작스러운 방문의 목적 따위와는 조금도 관계가 없는, 의아하기만 한 이야기를 내뱉었다.

“황태자님. 일단, 가능하시다면 페로몬 갈무리를 먼저…….”

아사드가 뒤이어 내놓을 이야기를 잠자코 기다리려던 케이든은 제 뒤편에 서 있을 마르주를 가까스로 떠올렸다. 몸이 아픈 오메가가 아사드의 페로몬에 영향을 받으면 어쩌나 싶었다.

“고장 났어.”

“…….”

“아프게 해서 미안해.”

“저는 괜찮습니다. 하나도 안 아픕니다.”

고장 났다니. 무슨 일인가 싶었다. 하나 자신의 의아함은 숨기고, 케이든은 먼저 아사드를 달래는 편을 택했다.

“……거짓말.”

중얼거린 아사드는 차양 아래에 서 있는 마르주를 힐긋 봤다. 어느 틈에 자리를 옮겨 온 자한에게 몸이 반쯤 가려져 있는 마르주의 낯에서, 놀란 기색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건 자한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사드가 올 줄 알았다는 모습들이었다.

하나 아사드의 생각이 길어지지 않았다. 그는 그들에게서 곧장 신경을 껐다. 지금 아사드에게 중요한 것은, 오직 케이든뿐이었으니 말이다.

“그래도 이제 괜찮아. 당신이 내 앞에 있으니까. 페로몬도, 금세 숨겨질 거야. 말을 타고 오는 내내 당신을 생각했더니…… 잠깐 주체가 안 되는 것뿐이거든.”

“몸이 좋지 않은 건 아니고요? 그리고 말을 타는 내내라니, 도대체 언제 마차에서 내리신…… 아니, 설마…….”

“케이든. 나는…….”

케이든의 말을 끊은 아사드가 더 가까이 거리를 좁혀 왔다. 그러나 말을 이어 가지는 못했다. 비명과 같은 소음이 아사드의 말끝을 뭉개 버렸으니까.

아래로 추락한 유리병들이 바닥에 부딪히고 박살 나는 요란한 소리가, 훈련장에 울려 퍼졌다.

의도치 않게 아사드의 말을 끊어 먹게 된 이는, 황태자비의 주치의인 라몬이었다. 박살 난 시약병들이 토해 낸 약에 라몬의 신발이 흥건하게 젖어 들어갔다. 모두, 혹시 생길지 모를 부상자를 돌봐 주기 위해 챙겨 들었던 것들이었다.

“화, 황태자님! 전하!”

내려간 안경을 추켜올릴 생각도 하지 못하고 라몬은 아사드를 향해 달려갔다. 그를 보는 아사드의 두 눈이, 불편한 심기를 숨기지 않고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는 것마저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당황해서였다.

“황태자비님을 그렇게 꽉 붙잡으시고! 이, 이런 끔찍하게 날카롭고, 폭력적인 페로몬을 내뿜으시고, 어떻게 그러실 수 있습니까! 그러시면 안 됩니다!”

케이든을 붙잡은 아사드의 두 손을 차마 떼어 내지는 못하고 라몬은 말했다. 아니, 외쳤다.

“무슨…….”

“임신부에게, 그것도 전하의 아이를 가지신 분께 어찌 이러십니까!”

열이 오른 라몬의 목소리가 훈련장 구역 전체에 울려 퍼졌다. 평소의 웅얼거리던 말투가 생각나지 않을 정도로 크고 똑바르게 쏘아붙인 말이었다.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정적이 찾아왔다. 일대의 공기가 얼어붙었다고 해도 무방했다.

비명처럼 말을 내지른 라몬을 포함한 모두가, 눈만 도르륵 굴리며 자리를 지키고 서 있던 모두가, 약속이라도 한 듯 입을 다물었다. 깜짝 놀란 누군가가 내뱉은 탄식마저 다른 이의 손에 가로막혀 사그라들었다.

“전하의 아이요?”

영원히 이어질 것만 같던 침묵을 깬 건 케이든이었다. 케이든은 그 속을 모를 얼굴을 하고 라몬에게 물었다. 언뜻 차가워 보이는 인상을 지녔음에도, 왜인지 항시 부드럽게만 느껴졌던 케이든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그 낯처럼 어두워졌다.

“……네. 제가 괜히 케이든 님을 따라온 게 아닙니다. 회임하신 황태자비님을 극진히 돌봐 드리란 폐하의 명을 받았습니다.”

병을 앓는 사람처럼 창백해진 케이든의 눈치를 보며 라몬은 말했다.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했지만, 항시 군말 없이 제 말을 따라 주던 케이든에게 거짓말을 했던 일이 미안해서였다.

“페로몬에 문제가 생긴 게 아니라…… 아이를 갖게 된 거였군요. 왜 말을 안 하셨습니까?”

“황제 폐하께서, 비밀을 지키고 있으라 명하셨습니다. 대략 보름 정도만요.”

핏기가 사라진 케이든의 얼굴을 걱정스레 바라보던 라몬은 고백했다. 입매가 굳은 채 침묵 중인 아사드를 곁눈질하면서였다.

“어머니가 농간을 부리셨구나.”

아사드의 중얼거림에 라몬은 차마 긍정도 부정도 하지 못하고 민망해할 수밖에 없었다. 황태자 역시 케이든의 회임 소식을 몰랐다는 것에 관한 놀라움이 함께였다.

“황태자비의 건강엔 문제가 없나?”

“예.”

“아이 쪽은……. 아니, 됐어. 케이든이 건강하면 그 애도 건강하겠지.”

잠시 라몬에게 시선을 줬던 아사드가 조금은 넋이 나간 사람처럼 두 눈을 깜빡였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숙이고 있는 케이든에게로 곧장 시선을 돌렸다.

두 사람 사이의 거리가 한결 더 가까워졌다. 어느덧, 아사드의 페로몬은 완전히 갈무리되어 있었다.

“케이든.”

아사드의 입가가 부드럽게 호선을 그렸다. 그는 웃었다. 이 세상의 모든 꽃을 모아 봐도 저 웃음엔 비견할 수 없을 거란 생각이 들 정도로, 예쁘게 웃었다.

하지만 라몬의 눈에는 왜인지 황태자의 웃음이 음습하고 징그럽게 느껴졌다. 모래 뱀 소굴에 발을 잘못 디디기라도 한 것처럼 목덜미가 서늘해졌다.

라몬은 뒷걸음질을 쳤다. 자신이 빠져야 할 때임을 본능적으로 알아챈 거였다.

“황태자님…….”

케이든이 아사드를 불렀다. 그는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아사드에게 화답한 것이 아니었다. 하고 싶은 말이 있어 아사드를 부른 거였다.

그 미묘한 차이를 느낀 아사드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아사드의 손에서 무심코 힘이 풀릴 정도로, 케이든의 낯빛이 좋지 않았기에 더욱 그랬다.

아이. 그 단어를 라몬이 입에 담은 순간부터, 케이든은 눈앞이 캄캄해진 상태였다. 물에 잠기기라도 한 듯 숨을 똑바로 쉴 수가 없었다.

“사소한 애착 때문에 저를 붙잡았다간, 결국 후회하시게 될 거라고…… 제가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제게 발목을 잡힐 거라고, 저는 말씀드렸습니다.”

“…….”

「어떻게……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뭘 해야 할지, 아무 생각도 나질 않습니다. 제가…… 뭘 해야 할까요.」

차마 아사드의 얼굴을 마주하지 못하고 케이든은 중얼거렸다. 그는 홀로 감당하지 못할 혼란에 빠져 있었다.

“케이든.”

“저는…… 아이만 두고 떠날 순 없습니다.”

간신히 고개를 든 케이든이 아사드와 눈을 맞췄다.

“환영받지 못할 아이니까요. 저는 사랑받지 못한다는 게…… 무관심 속에서, 아니, 미움을 받으면서, 그대로 몸만 자란다는 게, 얼마나 서글픈 일인지 잘 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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