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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신부 (96)화 (96/97)

“환영받지 못할 아이니까요. 저는 사랑받지 못한다는 게…… 무관심 속에서, 아니, 미움을 받으면서, 그대로 몸만 자란다는 게, 얼마나 서글픈 일인지 잘 압니다.”

케이든은 자신이 아이를 가졌다는 사실이 실감이 나질 않았다. 피마에 아사드가 찾아왔고, 놀란 마음을 가라앉히기도 전에 라몬에게서 아이에 관한 이야기를 전해 듣게 됐다. 그 모든 일이 꿈처럼 느껴졌다. 믿기지도 않고 혼란하기만 했다.

그런데도, 조금의 망설임 없이 말이 튀어나왔다.

“당장 헬리오를 떠나겠습니다.”

“케이든. 그게 무슨…….”

“아이에겐, 아버지가 누군지 알리지 않고 평생 비밀을 지키며 살겠습니다. 그러니까…… 아이를, 아이는 제가 키우게 해 주세요.”

가라앉은 목소리로 케이든은 말했다.

침묵에 잠겨 있던 훈련장의 분위기가, 발길질에 살얼음판이 깨지듯 사방으로 금이 갔다. 경악에 찬 얼굴을 하고 입을 벌린 이들이 숨을 삼키는 소리가 퍼져 나갔다.

“그러니까…….”

두서없이 늘어지던 케이든의 말끝이 흐려졌다.

다른 사람의 아이도 아니고, 제국 황태자의 피를 물려받은 아이였다. 케이든은 자신의 부탁이 받아들여질 리 없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저는 아이와 함께 궁을 나설 수 없을 것이다. 언젠가 쫓겨나게 되는 건, 오직 저 한 사람뿐일 거란 예감이 들었다.

“그래도 조금은 저를 아껴 주셨으니까, 지금도 그러실 테니…… 제게 조금만 자비를 베푸셔서…….”

자신 없는 목소리로 케이든은 말을 늘어트렸다. 다시 말끝이 흐릿해졌다. 다만, 이번엔 자신의 의지로 말을 끝맺은 게 아니었다.

“케이든!”

아사드 메케리우스는, 자신의 반려자 앞에 무릎을 꿇었다. 마치 왕국의 기사처럼 한쪽 무릎을 꿇은 남자의 두 손이 케이든의 떨리는 손을 황급히 그러쥐었다.

제국의 황태자가 다른 이에게 무릎을 꿇었다는 사실에 사람들은 다시금 경악했다. 이전보다 더 큰 충격이었다. 자한의 지시에 따라 빠르게 자리를 뜨면서도 도통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케이든.”

“…….”

“우리의 아이는 황제가 될 거야.”

당황해 어찌할 바를 모르는 케이든을 올려다보며 아사드는 말했다. 차가운 케이든의 손에 제 온기를 전하기라도 하려는 듯 더 강하게 그를 붙들었다.

“내가 어머니에게 황제의 관을 물려받을 그날, 당신은 제국의 황비가 될 거야. 우리의 아이는 지금의 나처럼 전하 소리를 듣게 될 테고. 그 애가, 내 후계자가 될 테니까.”

아사드가 차분히 속삭여 주는 말을 들으며 케이든은 입술을 짓씹었다.

제가 황비가 될 것이라 말하는 아사드에게선 이전과 같은 머뭇거림이 느껴지지 않았다. 황금색 눈동자 위에서 반짝이는 빛이 너무나 환하기만 했다. 거짓과 조롱, 기만 따위는 근처에도 가 닿지 못하고 부서질 아주 밝은 것이었다.

그 누구도, 지금 아사드가 제게 전해 온 말을 거짓이라 왜곡할 수 없을 것이다. 이상한 기분이 케이든의 눈가를 더듬었다.

“당신이 그랬잖아. 사랑이 있다면…… 그 어떤 사람도 황비가 될 수 있다고. 결국 황비로서 황제의 옆에 설 수 있을 거라고 했어.”

“…….”

“그렇지만, 그게 우리의 얘기는 될 수 없다고 여겼지. 내가 당신을 사랑하지 않으니까. 그럴 수 없다고 했잖아.”

아사드의 미간이 설핏 찌푸려졌다.

“아니었어, 케이든. 당신이 말한 황비의 조건은 이미 채워졌어. 그 사실을, 당신도 나도 몰랐을 뿐이야.”

“그게…….”

“우리 사이는 신이 보장하는 운명이기까지 하니 가산점이 붙겠군. 당신과 내가 함께할 평생을 반대하는 자가 있다면, 신성 모독을 물어 지하 감옥에 처넣을 수 있거든.”

아사드는 케이든의 손등에 입을 맞췄다. 흉터로 너저분한 살갗 위에 닿는 입술이 부드러웠다. 눈물이 날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따스한 입맞춤이었다.

〈당신이 말한 황비의 조건은 이미 채워졌어. 그 사실을, 당신도 나도 몰랐을 뿐이야.〉

내가 황비가 될 수 있는 조건.

하얗게 비워진 케이든의 머릿속으로 문득, 물음 하나가 떠올랐다. 지금껏 아사드에게 한 번도 꺼내 놓지 못했던 질문이었다. 끝끝내 입에 담을 수 없었던 너무나 초라한 것이었다.

“…….”

여전히 창백한 낯을 한 채로 케이든은 입을 달싹였다. 그리고 결국, 아사드에게 물었다.

“……저를 사랑하십니까?”

너무나 무거운, 그러나 한숨처럼 짧은 물음이었다.

케이든은 제게 황홀한 답이 돌아올 거란 기대를 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목소리가, 두 손이 볼썽사납게 떨렸다.

“그래.”

“…….”

“당신을 사랑해.”

굳어 버린 케이든의 손등에 뺨을 기대며 아사드는 말했다. 더없이 다정한 얼굴을 하고 몇 번이고 반복해 사랑을 속삭였다.

“내 눈이 닿는 곳에 당신이 있으면 좋겠어. 내 손이 닿을 곳에, 서로의 목소리가 닿을 곳에 당신이 있으면 좋겠어. 당장 끌어안고 입을 맞출 수 있을 만큼…… 가까이 있었으면 좋겠어.”

“…….”

“케이든. 나는, 당신이 내 옆에 있어 주길 바라는 마음이 사랑인 줄 몰랐어.”

케이든은 숨을 삼켰다. 누군가 제 심장을 마구 내려치기라도 한 것처럼 가슴께가 뻐근했다. 너무나 이상한 속도로 심장이 뛰고 있었다.

“다들 나한테 다른 사람을 사랑하면 안 된다고 했어. 그 누구도, 내게 사랑하는 방법 같은 걸 알려 주지 않았어.”

“…….”

“나는 당신을, 나 자신을 속였어. 하지만 이젠 아니야.”

아사드는 웃었다.

“알아서들 떠들어 대라고 해. 죽은 할아버지가 관을 열고 뛰쳐나온다고 해도 소용없어. 나는, 당신 옆에 들러붙어서 떨어지지 않을 거니까. 케이든. 당신을 사랑할 거니까.”

상스러운 말을 뇌까린 아사드의 얼굴이 자신만만했다. 그의 눈에선 아주 약간의 걱정도 불안도 느껴지지 않았다.

「케이든, 내가 당신의 영원한 반려자가 될 수 있게 해 줘. 당신 아이의 아버지가 될 수 있게 해 줘. 신탁 때문이 아니라 당신의 의지로…… 내 곁에 남아 줘.」

제 반려에게 가장 익숙할 언어로, 아사드는 미래를 말했다. 아사드의 금빛 눈동자 속엔 훗날을 생각하지 않는 케이든마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확신이 담겨 있었다.

생전 처음 느껴 보는 너무나 밝은 감정이, 낯선 희망이 케이든을 어지럽게 했다.

〈예전의 저는, 자한의 마음을 믿지 않았어요. 그 사람을 향한 나의 마음은 그토록 확신하면서 정작 자한의 마음은 들여다보려 하지 않았어요.〉

마르주는 케이든에게 말했었다.

왜 마르주가 저를 그와 닮았다고 여겼는지, 이제는 확실히 알 것 같았다. 마르주가 전해 준 이야기 속에서 케이든 역시 자신의 모습을 찾아내게 됐다.

저는 지금껏 아사드의 마음을 온전히 들여다보려 한 적이 없었다.

오늘에서야 마주하게 된 아사드의 마음은, 그의 손처럼 뜨겁고 그의 눈빛처럼 다정한 것이었다. 그와 나눴던 색사처럼 조금은 끈덕지고 어둡기도 했다. 밤이 내려앉은 사막에 피웠던 불처럼 여러 색깔이 뒤엉켜 아름다운 빛을 내고 있었다.

마르주의 후회를, 케이든은 다시 한번 입 안에서 곱씹어 봤다. 단 한 번만이라도 내 마음을 전해 볼걸. 내 마음을…… 아사드에게 단 한 번만이라도.

천천히, 케이든은 입을 열었다.

“저도…….”

“…….”

“전하를, 사랑합니다.”

후회 없는 사랑을 입에 담으며 케이든은 웃었다. 아마 우는 걸지도 몰랐다.

“당신과 함께 있고 싶어요.”

내도록 꾹꾹 눌러 담기만 했던 자신의 마음을 케이든은 온전히 내보였다. 오직, 아사드 한 사람만을 담은 마음이었다.

다급히 몸을 일으킨 아사드가 케이든을 끌어안았다. 모래바람을 맞아 부스스해진 짧은 머리카락이 케이든의 살갗을 부드럽게 간질였다.

“당신을 아문의 모습으로 처음 만난 날, 내가 했던 말 기억해?”

흥분과 기쁨에 젖어 떨리는 목소리로 아사드는 물었다.

〈전 케이든 님의 말벗입니다. 이야기를, 즐거움과 고독을 함께 나눌 수 있는 가장 가까운 시종이죠.〉

기척도 없이 침실 발코니에 들이닥쳤던 어린 시종은 퉁명스러운 낯을 하고 케이든에게 말했었다.

“케이든. 내가 당신의 즐거움과 고독을, 행복과 슬픔을 나눠 가질 유일한 사람이 될 거야. 당신도…… 나의 유일한 사람이 되어 줘.”

말도 안 되게 사랑스럽고 황홀한 제안이었다. 얼떨떨한 얼굴을 한 케이든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겠습니다.”

그럴게요. 같은 말을 계속해 중얼거렸다.

“케이든.”

자신의 유일을 끌어안은 아사드의 몸에 힘이 들어갔다.

“……내 반려. 단 하나뿐인 나의 보석.”

“…….”

“세상에서 가장 고귀하고 아름다운, 나의 신부.”

아사드는 케이든의 귓가에 속삭였다.

거짓말처럼 달콤한 진실을 느끼며 케이든은 눈을 감았다. 다급히 아사드를 마주 안았다. 가슴이 벅차 견딜 수 없었다.

어느새, 케이든의 얼굴에도 환한 웃음이 번졌다.

텅 빈 훈련장에서. 두 사람은 오래도록 서로를 끌어안고 있었다. 소리 없는 행복이 함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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