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엠마의 편지
사랑하는 내 친구, 케이든. 너의 가장 절친한 벗 엠마 자렌이 창밖에 내리는 비를 바라보며 편지를 쓴다.
너한테 편지를 보낸 지, 벌써 하루하고도 3시간가량이 지났네. 답장도 못 받았으면서 왜 또 편지를 보낸 거냐고 의아해하지 마. 내가 미리 대답해 줄 테니까.
이 편지는, 조만간 널 만나게 될 거라는 사실이 기분 좋아서 보내는 편지야. 아크에 갈 생각을 하면 내 마음은 한여름 정오처럼 쨍쨍해지거든. 정작 루아나엔 오늘도 비가 내리는데 말이야.
지난 편지에도 똑같은 말을 쓴 건 알아. 하루 만에 기분이 더 좋아졌다고 치자. 우리가 만날 날이 하루만큼, 정확하게는 하루하고도 3시간만큼 더 가까워진 거니까.
아무튼! 심심해서 휘갈기는 편지는 아니야. 알아줬으면 해.
내 편지가 귀찮다면 아문을 탓하렴. 네 후배가 대단한 마도구를 보내 준 덕분에 내가 편지 쓰기의 달인이 되어 가는 게 아니겠니. 마도구를 통해 곧장 편지를 주고받을 수 있다니. 세상 참 좋아졌다. 그치?
알리나 말로는, 이 마도구가 엄청 비싼 거래. 부르는 게 값이라더라.
케이든. 아무래도 네 후배는, 사막의 높으신 분을 부모로 둔 것 같아.
잠시 놀이 삼아서 상단 일을 하는 거 아냐? 돈 많은 사람들이 가끔 이상한 방향으로 미친 짓을 저지르곤 하잖아. 상단에서 일하는 것 정도야, 아주 건전하고 건강한 일탈이긴 하지만.
어찌 됐건, 아문에게 잘 보여서 나쁜 일은 없을 거라고 봐. 계속 친하게 지내. 꼭. 그러다 선후배 사이의 선을 넘어도 좋고.
이미 둘이 사귀고 있는 건 아니지? 내가 닦달할 필요도 없었던 거라면 좋겠다. 너는 이런 소리에 질색하겠지만, 아문은 내 말을 듣고 좋아할걸? 장담해.
‘날 보고 조금 놀랄 수도 있어. 미안해.’
네가 얘기한 놀랄 만한 무언가가, 내가 원하는 아주 짜릿한 풍경이면 참 좋을 것 같아.
농담이야.
어차피, 네가 써 보낸 말을 보고 이미 기절할 만큼 놀랐어. 왜 그런 얘길 꺼냈을까. 진짜 고민되더라.
케이든. 나, 네 기준의 놀랄 일이 뭔지 궁금해서 미칠 것 같아. 너는 그런 말 정말 안 쓰잖아. 조금 놀랄 수도 있다고? 조금은 무슨, 난 기절할 거야. 분명해.
역시 아문과 사귄다는 이야기일까? 아니지, 놀랄 일이라면 이미 결혼을 약속했다는 것 정도는 돼야겠다. 혹시나 아문이 아닌 다른 사람이 네 옆에 있다고 해도 괜찮아. 네가 행복하다면 누구든 상관없어.
아니. 사실 거짓말이야.
아문이 아닌 사람이 너와 함께한다면 실망할 거야. 난 이미 아문에게 정을 줘 버렸거든. 네가 데려올 사람의 얼굴이 아문처럼 예쁘고 잘생겼다면 조금 혹할 수도 있겠지만.
그런데, 그 대단한 얼굴을 대체하는 게 가능한 일인지 모르겠어. 물론, 세상에서 가장 예쁘고 잘생긴 우리 알리나만큼은 아니지만. 그 점은 케이든 너도 인정하리라 믿는다.
내가 이번 편지는 정말 짧게 쓰려고 했거든? 그런데 왜 자꾸 말이 길어질까?
알리나는 내가 네 일에 너무 조급해하는 것 같대. 맞는 말이야. 그런데 왜 이렇게 널 귀찮게 하고 싶은지 모르겠어. 자꾸 말을 걸고 싶어져.
연락이 끊겼던 적이 있어서 그런 거겠지? 그때, 내가 너한테 편지를 얼마나 많이 보냈는지 다 세지도 못해. 그런데 넌 내 편지를 단 한 통도 받질 못했고. 알렉스 그 개자식이 중간에서 가로챈 게 분명해. 내 편지를 모아다 땔감으로 썼을 거야.
그런 작자랑 백작가가 한 번에 망하다니! 얼마나 기쁜 일인지 몰라. 알리나한테 그놈들 망한 얘기를 전해 듣고 너무 좋아서 울었다니까.
너에게도 소문이 닿았으려나? 내가 지난 편지엔 말하지 못한 얘기야.
케이든, 서먼 백작은 파산했어.
망했대. 그 징글징글한 농장도 빚이 감당이 안 돼서 팔아 버렸대. 바로 주인이 바뀌었다나 봐. 일하는 사람들도 물갈이 됐고. 너 괴롭히던 고참들도 마찬가지야. 죄다 실직자 됐어.
백작가 사람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자세한 건 몰라.
그 부부가 아직 죽지 않은 건 확실해. 그런데 충격을 받아서 정신이 온전치 못한 상태라고 해. 당연히 몸도 안 좋고.
그리고, 정신 나간 사람이 또 있지. 우리 대단한 도련님께서도 머리가 반쯤 돌았다나 봐. 입만 열면 헛소리 또 헛소리래. 그 정신머리로 길을 헤매다 이상한 사고가 나서 이젠 자기 아버지처럼 누워만 있다고 하더라.
누가 그런 놈을 돌봐 주려나? 아무도 없을걸. 신도 해내지 못할 일이야.
케이든. 나는, 그 사람들 다 늦게나마 벌을 받게 된 거라고 생각해. 하나도 안타깝지 않아. 케이든 너도 이 소식에 웃었으면 좋겠어. 나처럼 좋아서 우는 것도 괜찮고!
아아.
이만 내용을 줄여야겠다. 나는 아직도 할 말이 많은데 잉크가 다 떨어졌어. 내일부턴 서랍에 잉크병을 꽉 채워 놔야지.
내가 케이든 네 덕에 글쓰기가 아주 빠르게 는다. 널 만나러 아크에 가려면 이제 제국어도 배워야지. 알리나가 가르쳐 준다고 했어.
너는 누구한테 제국어를 배우고 있니?
부디, 아문이 너의 선생님이길 빈다.
자꾸 아문 얘기를 하는 내가 지긋지긋하지? 세뇌가 바로 이런 거야.
케이든. 답장은 다음 주 주말을 넘기고 보내 줘. 네가 답을 일찍 주면 다시 편지를 쓰고 싶어질 것 같으니까. 하루에 한 장씩 말이야.
그럼, 안녕! 다시 만날 날까지 건강해야 해!
추신. 아문은 너를 좋아해.
추신의 추신. 진짜야.
11. 아름다운 신부
황태자의 탄신일을 축복하기 위해 타라 광장으로 많은 인파가 모여들었다.
후계자의 탄신일이 매년 온 나라가 축복해야 할 날이 되는 건 아니었다. 후계자의 성인식과 함께 오는 열아홉 번째 탄신일과 그다음 해에 찾아오는 스무 번째 탄신일. 딱 두 번의 탄신일만이 나라의 기념일이 됐다. 자식이 귀한 황실에서, 그 누구도 아닌 황제의 후계자가 무사히 어른이 되었다는 걸 기뻐하는 뜻에서였다.
신전 아래의 광장은 황태자와 황태자비의 혼인식이 있었던 날처럼 사람으로 북적였다. 그 뒤로 축제가 이어지는 게 아니었음에도 그랬다.
제국민들은 황태자를, 그리고 황태자비와 미래의 후계자 모두를 축복하기 위해 수도로 모여든 것과 다름없었다. 황태자비가 이른 회임을 했다는 소식이 헬리오 전역에 퍼지게 된 지 오래였으니, 혼인식 때처럼 사람이 몰린 게 당연했다.
광장을 스쳐 지나가는 바람이 그 품에 달달한 꽃내음을 품고 있었다. 사람들의 손에 들린 노란 꽃 데이옌의 향기가 아니라 주택가에서 건너온 보다 부드러운 향취였다.
돌로 지어진 반듯하고 단정한 귀족들의 저택과 그보단 둥근 모양새를 가진 민가의 집들 모두, 축복하는 마음을 담아 벽이며 지붕을 꽃으로 꾸며 둔 상태였다. 사방에서 불어오는 모든 바람이 달콤할 수밖에 없었다.
“이제 사막 사람이 다 되셨네. 잘생긴 얼굴 다 드러내고 계시니 얼마나 좋아.”
신전의 발코니 위에 선 황태자비를 보며 누군가 말했다. 약 1년 전, 두 사람을 보기 위해 수도 광장에 발을 들였던 이였다.
“아. 그때…… 베일 때문에 얼굴 안 보여서 난리였지. 나, 발 들고 있느라 종아리에 쥐 났잖아.”
일행의 답변을 훔쳐 들은 주변 사람 몇몇이 고개를 끄덕이며 소리 없는 동조를 보냈다.
광장에 모인 이들은 그들이 황태자 부부의 혼인식 날 봤던 풍경을, 어색하게 붙어 서 있던 아사드와 케이든의 모습을, 저마다의 기억에 의지해 읊어 댔다.
하나 수다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말은 모두 같았다.
“오늘은, 황태자비님이 웃고 계시네. 보기 좋다.”
그 말 뒤로 간지러운 웃음들이 따라붙었다.
저 위, 신전의 발코니에서도 누군가 달뜬 목소리로 말을 늘어놓고 있었다. 광장에 모인 이들에게 감사 연설을 마치고 돌아온 아사드였다.
“꿈에 쥐방울만 한 여자애가 나왔어.”
아사드는 찰싹 달라붙었다는 표현이 걸맞을 정도로 케이든에게 가까이 붙어 섰다. 제 신부의 손을 만지작대며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아래에 모인 이들을 향해 남은 한 손을 흔들어 보이면서였다.
“어릴 때의 나랑 똑같이 생긴 애였어. 뭐, 나를 너무 빼닮은 건 조금 그랬지만…… 보는 순간 알았지. 저 애가 당신과 내 아이일 거라고 말이야.”
오전 내도록 본궁 도서관에 처박힌 채로 황제가 될 여성에게 걸맞을 이름들을 찾아 헤맸다는 얘기가 덧붙었다.
“뭘 그렇게 숨기시는 건가 했더니, 그런 꿈을 꾸셨군요.”
맥이 빠진 목소리로 케이든은 중얼거렸다.
오늘 아침. 잠에서 깬 아사드의 굳은 낯이 너무나 심각해 보였었다. 악몽이라도 꾼 사람처럼 다짜고짜 저를 끌어안고 오래도록 놔주질 않기까지 했다. 아침 식사를 할 때도 어딘가 어색하게 굴었었다. 평소엔 입에도 대지 않는 쓴 음료를 마시기까지 했고 말이다.
무슨 일이 생겼나 싶어 마음이 쓰이던 참이었는데…… 괜한 걱정을 한 모양이었다.
“아이에게 어울릴 이름 스물일곱 개를 준비해 뒀어. 어떤 이름이 좋을지, 꽤 오랫동안 함께 고민해야 할 거야.”
참으로 자신만만한 목소리가 케이든에게 닿았다.
케이든은 저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아사드가 골랐을 스물일곱 가지의 이름은 모두 하나같이 그 뜻이 좋고 아름다울 것이다. 그와 닮은 아이에 관한 이야기를 입에 담을 때 반짝이던 눈동자처럼 어여쁜 빛이 날 게 분명했다. 그런 생각을 하니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아이의 이름을 함께 고르려면…… 오늘도 같은 침대를 써야겠군. 오고 갈 대화가 길어질 테니 어쩔 수 없지.”
“네. 그렇게 알겠습니다.”
맞닿은 아사드의 손이 더 뜨거워진 것을 느끼며 케이든은 긍정을 건넸다. 아사드가 내놓은 핑계를 가볍게 받아 줬다.
“케이든. 나는 이 헬리오에서, 아니 이 세상에서, 가장 믿을 만한 배우자가 될 거야. 좋은 아버지가 될게. 이 나라를 위해서가 아니라, 당신을 위해서.”
아사드는 말했다. 보다 속삭임에 가까운 것이었다.
맹세의 입맞춤을 나누는 모습을 사람들에게 보여 주기 위해 아사드와 함께 섰던 자리에, 1년 만에 다시 서게 됐다. 저는 알아들을 수 없었던 제국어로 사나운 말을 내뱉던 남자가, 이제는 입에 넣으면 녹아내릴 설탕 과자처럼 단내 나는 말만을 귓가에 속삭여 주고 있었다.
그 변화가…… 케이든은 참 신기하게만 느껴졌다. 조금은 쑥스럽고 또 조금은 기쁘게 느껴졌다.
연설은 완전히 끝이 났다. 손을 흔들며 소리 없는 인사를 마친 두 사람은 광장에 모인 이들에게 화목한 모습을 보이며 퇴장해야 했다. 아사드의 비서관이 바라는 그림이었다.
비서관이 원했던 대로 아사드는 케이든의 뺨에 짧게 입을 맞췄다. 하지만 그 뒤로 이어진 말은, 오직 아사드만이 원했던 거였다.
“당신에게 영원한 사랑을 맹세합니다.”
아사드는 헬리오의 혼인 서약을 입에 담았다. 짧은 한마디로 끝을 맺는 영원의 맹세였다. 1년 전, 이미 케이든이 들어 본 것이었다.
하나 지금 아사드가 내뱉은 맹세는 신에게 등 떠밀려 혼인식을 올렸을 때의 그가 무감하게 읊었던 것과는 달랐다. 그걸 알아챈 케이든의 귀 끝이 붉어졌다.
여전히, 케이든은 욕심이 없었다. 쉽게 지워지지 않을 불안을 마음 한편에 품고 있었다. 그는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않았고, 자꾸만 부정적인 생각에 갇혔다.
그러나 케이든은 아사드를, 제 유일한 반려이자 벗을 믿었다. 그 믿음이 훗날을 꿈꾸는 방법을 케이든에게 알려 줬다.
케이든은 시간이 지나 성년이 된 아이가 아사드와 제 사이에 선 모습을 그려 봤다. 저 아래의 고마운 사람들을 향해 기쁘게 손을 흔드는 모습을 상상했다. 그저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지는 풍경이었다.
“저 역시…… 영원한 사랑을 맹세합니다.”
차마 아사드와 시선을 마주하진 못하고 케이든은 어설프게 답했다.
하나 이내 용기를 내 고개를 들었다. 케이든은 아사드를 향해 웃어 보였다. 마주한 아사드의 머릿속을 텅 비게 하는, 밝은 웃음이었다.
참지 못한 아사드가 케이든과 입술을 맞댔다. 그의 비서관이 바라던 것과는 다른, 어딘가 질척한 입맞춤이었다. 하지만 저 멀리 있는 사람들의 눈에는 그저 좋게만 보이는 입맞춤이기도 했다.
입맞춤의 순간, 사람들의 손에 들려 있던 샛노란 꽃이 그 속에 다정한 축복을 품은 채 하늘을 향해 던져졌다. 우레와 같은 함성이 함께였다.
〈아름다운 신부, 본편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