엑스트라 파업 선언 13.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한서진과 나는 한마디 대화도 나누지 않았다. 나는 나대로 생각할 게 많았고, 한서진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바 아니었고.
방에 와서도 마찬가지였다. 슬쩍 한서진을 돌아보고는 내 방으로 향했다.
“나 들어간다.”
한서진의 방에 곁다리로 달린 내 방 문을 열고 들어가니, 침대 위에 선물 상자가 놓여 있었다.
“뭐야?”
상자 위의 리본 사이에 카드가 하나 꽂혀 있었다. 빳빳한 종이를 펼쳐 보자 휘날리는 글씨체로 짤막한 메모가 써져 있었다.
「추가 교재들입니다! 휴대폰 분실하셨다는 말 듣고 새것 발급받았어요. - 고운영」
상자를 열자 안에는 책들이 가득 들어 있었다. 가이딩의 기초, 가이딩의 원리…….
가이딩의 ‘가’ 자만 봐도 속이 울렁거려 빠르게 던져 버리고는 가장 아래쪽에 있는 손바닥만 한 기계를 꺼내 들었다.
휴대폰이라는 말을 보고 설렌 것도 잠시, 인터넷이나 기본적인 기능은 모두 막힌 채 에스퍼·가이드 전용 어플만 가능한 기계였다. 어플을 통해 문자와 통화 정도는 가능한 듯싶었다.
“지독하다…….”
센터에서 하루라도 빨리 튀어야겠다는 다짐이 다시금 공고해졌다. 쓸모없는 기계 역시 침대 한쪽으로 던져 치워 버리려다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에 멈칫했다.
“아, 맞다.”
주머니를 뒤지자 깊은 곳에서 구깃구깃 구겨진 종이가 만져졌다. 연승연의 연락처가 적힌 명함이었다. 호출기를 열어 번호를 입력한 후 문자를 적었다.
「나 의진.」
자연스럽게 본명을 써 버린 나는 전송 버튼을 누르기 직전에 이상함을 깨닫고 급하게 내용을 수정했다.
「나 호현.」
「휴대폰 생김. 연락 받아.」
문자가 가는 것을 확인한 후 그대로 침대 위에 벌러덩 드러누웠다. 미세하게 튕기는 매트리스의 스프링 소리가 신경에 거슬렸다. 어젯밤 내내 괴롭혔던 귀를 울리는 소리에 미간을 찌푸렸다.
“짜증 나. 불편해. 좁아.”
사실 이렇게까지 예민한 편은 아니었는데. 날 복잡하게 만드는 건 매트리스 스프링 따위가 아니라 지금 날 둘러싼 모든 현실들이었다.
안식을 얻을 줄 알고 눈을 감았다가 나랑 소름 끼치게 닮은 이상한 놈 몸에서 깨어난 것, 그 몸이 하필 국가 귀속 가이드라 어딘지도 모르는 인천 앞바다의 섬에 갇혀 쉽게 도망칠 수 없다는 것. 재수 없고 마음에 안 드는 팀원들에다 오늘 처음 겪은 가이딩의 개 같은 기억까지.
땅이 꺼져라 깊은 한숨을 뱉었다.
“일단…… 센터부터 나가자.”
***
밤이 깊은 시간, 나는 옆방에 있을 한서진의 눈치를 보느라 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몸부림을 쳤다.
눈이 벌게지고 아플 정도로 피곤해 죽겠는데 잠이 오지 않았다. 어떻게든 잠에 들려 노력해 봐도 나를 놀리듯 통통 튀는 스프링 소리가 잠을 깨웠고 머릿속에 가득 찬 잡념들에 두통까지 일었다.
“에이씨. 존나 구린 침대.”
결국 나는 벌떡 일어나 옆구리에 베개를 끼고 문으로 갔다. 문을 열자마자 모습을 보이는 한서진의 방에는 옅고 푸른 조명이 켜져 있었다.
‘잘 거라고 생각했는데…….’
침대에 기대 책을 읽던 한서진과 곧바로 눈이 마주쳤다. 한서진의 시선이 천천히 내 옆구리에 끼고 있던 베개로 향했다.
“안 돼요.”
“…….”
사실 마음 같아서는 한서진의 방을 갖고 싶었다. 넓은 방이 탐났다. 하지만 나도 양심이라는 게 있었다.
‘치사한 새끼. 나도 너랑 같이 자기 싫거든.’
여긴 한서진의 방이고. 방 바꿔 주지도 않을 것 같고. 그래서 대안으로 제시한 게 저 사람 다섯 명 누워도 될 정도로 넓은 침대 한쪽만 빌려 달라는 건데.
“……야.”
한서진은 나 보란 듯이 책을 탁 소리 나게 덮고 불도 꺼 버렸다. 꺼지라는 거지.
어둠 속에서 가만히 한서진이 누운 침대를 바라보다 슬금슬금 다가갔다. 그래도 사방이 넓은 방으로 나오니 머리도 안 아프고 숨통도 트이는 게, 이제 와서 저 깡통 같은 방에 들어갈 수 없었다.
결국 내가 선택한 건 한서진의 방 한쪽에 놓인 소파였다. 베개를 놓고 옆으로 돌아눕자 쿠션이 굉장히 푹신하고 살짝 튀어나온 등받이 덕에 적당한 압박감까지 느껴졌다.
‘훨씬 좋잖아? 하여간 싸구려 매트리스. 소파보다도 못하다니…….’
굳이 한서진의 침대를 탐내 싫은 소리 들을 필요 없이 소파에서 자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눈을 감을 때였다.
“지금 시위해요?”
“…….”
슬며시 눈을 뜨자 언제 일어났는지 짜증스러운 낯을 숨기지 않은 한서진이 날 내려다보며 말했다.
“왜 그러는 건데?”
나는 지금 주호현이고 여긴 한서진의 방이며 소파에나마 남아 있으려면 한서진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는 게 좋다는 생각이 순차적으로 떠올랐다.
“아니, 뭐…….”
철저한 계산 끝에 입을 열었다.
“침대도 존나 넓은데 같이 좀 자면 안 되냐? 치사한 새끼야.”
이성보다 감정이 앞섰는지, 감추려 했던 속마음이 튀어 나가 버렸다. 아차 하며 딴청을 피우자 한서진이 헛웃음을 흘렸다.
“……지금 겨우 그것 때문에 그러는 거라고요.”
“뭐, 나름 여기서 자도 될 것 같아.”
내 방으로 돌아간다는 선택지는 아주 지워 버리고 대안책치고는 꽤나 괜찮은 소파를 가리키며 말했다.
한서진은 대답이 없었다. 혹시 내가 아직도 침대를 노리고 있다고 생각하나 싶어 보란 듯 베개를 팡팡 두드려 폈다. 마지막으로 편히 누우려는데 어느새 다가온 한서진이 손목을 잡아챘다. 어둠에 가린 얼굴 중에서도 가라앉은 눈만 서늘하게 빛났다.
“……뭔데.”
“난 가이딩 받을 때 빼고는 침대에 사람 안 들여.”
음산하리만치 서늘한 목소리에 떨떠름하게 그를 바라봤다. 손을 빼려 했지만 잡힌 손목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아니, 그러니까 소파에서 잔다는데 지랄…….’
폭주라는 시한폭탄을 지닌 에스퍼들이 그를 잠재울 수 있는 가이딩에 집착한다는 것 정도는 워낙 유명한 소리라 알고 있었다. 그래, 결국 그거란 말이지…….
역으로 한서진의 손목을 붙잡고 단번에 몸을 일으켰다. 손이 닿자 한서진의 몸이 살짝 굳는 게 느껴졌다.
“무슨 짓…….”
“가이딩해 주면 되잖아!”
한서진의 입이 살짝 벌어졌다.
“……지금 그게 무슨 의민지나 알고 하는 말이에요?”
“뭐. 가이딩이 가이딩이지.”
남자 새끼 손을 잡든, 저 구린 고문 도구 위에서 잠을 자든 둘 중 하나란 소리잖아.
한서진이 말이라도 바꿀까 서둘러 베개를 챙긴 나는 우뚝 선 한서진을 뒤로하고 침대로 달려갔다.
“나 왼쪽 쓴다.”
한서진이 누워 있던 쪽 말고 반대편에 베개를 놓고 몸을 던졌다. 등을 대자마자 푹신한 매트리스가 몸을 감싸듯 빨아들였다.
“와…….”
저절로 입이 벌어지며 느른한 한숨이 흘러나왔다. 여기서라면 일 분 안에 잠들 수 있다.
온몸에서 힘이 빠져나가 꿈나라로 직행하려는 순간 오른편이 풀썩이며 무게감이 느껴졌다. 한서진이 옆에 누웠다는 것을 알았지만 한번 감은 눈을 뜨기가 힘들었다. 무시한 채로 몰려드는 수마에 몸을 맡겼다.
그렇게 막 잠에 들려는 내 이마에 간지러운 손길이 느껴졌다.
“…….”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도 없어 무시하고 있자니 앞머리를 간질이던 손길은 눈썹을 덧그리다 곧 볼을 따라 미끄러졌다.
간질거리는 감각에 잠에서 끌어 올려진 나는 눈썹을 찌푸리며 겨우겨우 천근같이 무거운 입을 열었다. 푹 잠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뭐 하냐. 나 잘 거야.”
“안 피하네.”
‘지가 만져 놓고선 지랄…….’
손 떼라는 의미에서 한 말이었는데 한서진은 대수롭지 않은 그 한마디만을 뱉고는 손을 떼지 않았다.
잘 때 머리를 만지는 느낌 정도야 익숙해 무시하고 잘 수 있었지만 얼굴을 주물럭대니 이건……. 도저히 잠에 들 수가 없었다.
결국 버티지 못하고 짜증스레 눈을 뜨자 그걸 기다렸다는 듯 어둠 속에서 나를 응시하는 새카만 두 눈동자와 곧바로 눈이 마주쳤다.
“잠 안 오냐?”
“생각할 게 있어서요.”
“그럼 혼자 생각하지, 왜 자는 사람을 귀찮게 해.”
귀찮음을 숨기지 않고 뱉은 말에 한서진의 입가에 이유 모를 미소가 그려졌다. 그를 의심스럽게 바라보자 한서진이 작게 웃으며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냥……. 원래 기억을 잃으면 사람이 이렇게 바뀌나 해서.”
“기억을 잃었으니까 바뀌지. 쓸데없는 소리 하네, 또.”
“원래는 손만 닿아도 굳었잖아.”
“……기억 안 나.”
“정신도, 몸의 반응도 모두 전과 다른데 이걸 같은 사람이라고 할 수가 있을까요?”
한서진의 말에 속으로 존나 놀랐다.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표정을 갈무리했다. 아직 얼굴에 닿은 손은 거둬지지 않은 상태였다.
‘눈치 빠른 새끼.’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불안해 입술이 바짝바짝 말랐다. 또 이상한 거라도 물을까 싶어 내가 먼저 팔을 들어 한서진의 손을 잡아 내리며 말했다.
“가이딩 안 해 줬다고 이러냐? 손 줘. 해 볼게.”
“가이딩 못하잖아요.”
“살만 닿아 있어도 된다며. 아, 맞다. 너 아까 그 짓하면 죽는다.”
한서진은 그저 아무 말 없이 나를 빤히 바라보기만 했다. 결국 반쯤 몸을 일으켜 한서진의 어깨를 잡아 억지로 눕혔다.
한서진은 별 반항 없이 풀썩 등을 대고 누웠고 영영 일어나지 말란 뜻에서 그의 목 아래까지 이불을 덮어 올려 가슴팍을 툭툭 두드렸다.
“이제 좀 자자. 어?”
“…….”
내가 다시 누울 때까지 한서진의 시선이 나를 따라왔다. 이불을 걷어차지도, 그렇다고 입을 열지도 않는 모습에 만족스럽게 누웠다. 원래 한서진의 자리보다 가까워진 것이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침대 자체가 워낙 넓어 옆으로 조금 가자 몸이 닿지 않을 정도까지 여유가 있었다.
“잘 자라.”
말하며 눈을 감았다. 이제 정말 자야…….
이불 아래로 꾸물대며 들어온 손이 팔을 툭 쳤다.
“손 줘요.”
“……므어?”
“손. 가이딩해 준다며.”
‘지독한 새끼. 가이딩 못 받아서 굶어 죽은 귀신이 붙었나.’
한서진의 집념에 혀를 차며 손을 뻗어 한서진의 손을 잡았다. 서늘한 감각이 생각보다 기분 좋게 느껴졌다.
하루 종일 이리저리 휘둘리며 고단했던 몸이 드디어 휴식을 맞았다. 그 편안한 느낌 사이로 손을 타고 흐르는 미약한 기운이 느껴지는 듯하다, 곧 수마에 잠겨 사라져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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