엑스트라 파업 선언 14.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휴대폰에 찍힌 연승연의 연락에 지체 없이 전화를 걸었다.
[네, 호현 님. 알아보긴 했어요. 다만 조금 더 확실해지면 말씀드리려고…….]
“아니. 지금 말해 줘!”
내 재촉에 결국 연승연이 머뭇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도 제 관할이 아니라 몰랐는데, 에스퍼를 감당하기엔 항상 가이드가 부족한 상태라 본래 가이드의 사표 수리는 어려운 편이라고 합니다. 잘 받아들여지지 않고요. 특히 호현 님은 한 팀에 속한 가이드잖아요. 필수 인력이라 더 어려워요.]
“나 가이딩 되게 못한대. 이래도 데리고 있겠대? 기억 영원히 못 찾아서 가이딩 못하면? 세금만 축내는 게 제 발로 나가겠다는데도?”
[네에……. 오히려 필수 인력이 아니라면 타지로 발령이 쉽게 나서 공용 가이드로 차출당하게 됩니다. 이러면 그만두기가 더 어려워져요. 사실상 종신이라……. 호현 님께도 당장 닥친 문제가 이겁니다. 제가 알아보기로는 세 달 이상 현장에 나가지 않는 가이드는 분기별 평가에서 쳐내져 공용 가이드로 등급이 내려간대요.]
“공용 가이드?”
[네. 기계적으로 계속 가이딩만 반복해야 하는 곳이라고 해요…….]
뭐야? 그럼 어쩌라는 건데.
방금 전엔 필수 인력이라 못 그만둔다더니, 또 필수 인력에서 내려오는 순간 공용 가이드가 된다고?
“그럼 어떻게 그만둬? 못 그만둬?”
[사실 가장 쉬운 방법은 그냥 호현 님 능력을 드러내면 곧바로 제조팀에서 스카우트 들어갈 거예요. 어떻게든 데려가려고 혈안이 될 테니 센터 측에서도 C급 가이드보다는 생산계 각성자로 보내는 게 더 이득이라 판단할 거구요. 가이드로 썩는 것보다 호현 님의 재능을 널리 펼치시는 게…….]
“그건 안 돼.”
단호한 목소리에 구구절절 이어지던 연승연의 목소리가 흐려졌다.
“말했잖아. 아무에게도 밝힐 생각 없다고. 내가 나가려는 이유를 모르겠어?”
[……죄송합니다. 제가 더 열심히 알아봤어야 했는데 마음이 급해진 것 같아요…….]
평생을 녹스에, 태제헌에게 묶여 있던 나였다. 이젠 어디에도 속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작업실을 차려 놓고 헌터들에게 비대면으로 물건이나 팔아야지. 그리고 조수도 이미 정해졌다. 생각보다 성실하고 쓸 만하고 재능도 조금 보이는 연승연으로.
휴대폰 너머로 전해지는 시무룩한 목소리에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수고했어. 너도 나랑 같이 나가야지.”
[……네!!]
언제 시무룩해졌냐는 듯 연승연이 신난 목소리로 답했다.
쉬엄쉬엄 돈이나 벌고 한가롭게 놀러 다니는 미래를 생각했더니 훨씬 기분이 좋아졌다.
“그래서, 당장은 어떻게 해야 한다고?”
[당장은 공용 가이드가 되지 않는 게 중요하니, 삼 개월이 지나기 전에 분기별 평가에서 실책 없이 넘어가야 합니다. 다른 방법이 더 있는지는 계속 더 알아보겠습니다.]
“알겠어.”
연승연과의 전화를 끊고 방에서 나오자 이제 막 옷을 걸쳐 입는 한서진이 흘깃 날 바라봤다.
“그때 그 연구원?”
“응.”
“……준비해서 나와요. 차 가져올 테니까.”
한서진이 먼저 나가고 나도 어제 새로 받은 교재를 챙겨 뒤늦게 따라 나갔다.
혼자 계단을 걸어 내려가는데 계단 아래 누군가 서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 호현아!”
“예성우?”
레이븐팀의 메인 가이드인 예성우였다.
마저 계단을 내려가자 예성우가 내게 다가왔다.
“혹시 시간 있어? 잠시 얘기 좀 하고 싶어서.”
“없는데. 지금 나가던 중.”
“아…….”
예성우가 약간 당황해 말끝을 흐렸다. 휴대폰의 시간을 확인하며 물었다.
“할 말 있으면 지금 해. 시간은 없지만 들어는 줄게.”
“……너 정말, 굉장히 많이 바뀌었구나.”
묘한 표정을 지으며 중얼거린 예성우의 태도가 미세하게 바뀌었다.
“혹시 어디까지 기억나?”
“어디까지라니?”
“예전 ‘그 사건’이라거나, 너 먹던 약이나. 아니면 수윤…….”
때마침 휴대폰이 울리며 한서진의 이름이 떴다. 빨리 나오라고 독촉하는 전화가 분명했다.
“참을성 없기는…….”
휴대폰을 집어넣은 채 예성우를 바라봤다.
“기억 안 나. 아무것도.”
“아무것도?”
“응. 할 말 끝났으면 나 간다.”
예성우를 뒤에 남기고 후다닥 현관으로 달려갔다.
***
자려고 누운 사이 어둠 속에서 뻗어 나온 손이 내 볼을 쿡 찔렀다. 그 손을 세게 쳐 내자 옆에서 웃는 듯한 숨소리가 흘러나와 짜증이 솟구쳤다.
“뭐.”
“가이딩 안 해 줘요?”
“필요 없다며. 존나 못한다며.”
“네. 그래도 그냥저냥 자는 데는 도움 돼요.”
연승연의 충고 이후 며칠 동안 나는 한서진에게 가이딩을 배우는 것에 꽤나 진지하게 임했다.
하지만 내 노력이 무색하게도 억지로 빼앗는 게 아닌 가이딩으로는 한서진의 갈급 해소에 조금도 기별도 가지 않았고, 한서진은 거짓말을 못한다는 게 문제였다.
심지어 어제는 처음으로 한서진의 손을 잡고 내가 먼저 가이딩을 하는 데 성공했는데….
-야! 방금!!
가이딩의 흐름을 처음 느끼고 신나서 한서진을 바라보자 의아한 표정으로 답으로 돌아왔다.
-왜요?
-나 방금 성공했잖아. 가이딩!
-아……. 미안해요. 너무 미약해서 못 느꼈어.
-……뭐?
내 자존심에 커다란 금이 갔다. 세계 유일의 S급 포션 메이커로 ‘마스터’의 칭호까지 받았던, 항상 내 뒤를 따라오던 감탄과 선망의 시선에나 익숙하던 나, 강의진을!!
아무리 내 스킬이 아니라 하나 여태껏 내가 바라는 성과를 얻지 못한 기억이 없었기에 더욱 실망스러웠다.
단단히 기분이 상한 나는 한서진한테 선언했다.
-나 너한테 가이딩 안 배워.
-……뭐라고요?
그리고 오늘이 처음으로 고운영을 만나 가이딩 실습과 가이딩에 이론에 대한 보충수업을 듣고 온 날이었다.
솔직히……. 한서진과 달리 기계를 앞에 두고 하는 가이딩은 존나 재미없었다. 이론 역시 8시간 중 7시간을 자서 지금 잠도 오지 않았다.
“그때 그건…… 장난이었다니까요.”
“웃기지 마. 너 같은 스킬은 없어도 나도 네가 거짓말하는 줄은 알거든?”
“그래서 계속 교육 센터에서 교육받을 거예요? 이론보단 실전이 나을 텐데.”
“…….”
“저한테 배워요.”
안 그래도 예상보다 훨씬 재미없는 수업에 하기가 싫어지던 찰나, 한서진이 저런 소리를 하자 마음이 조금 약해졌다.
하지만 한서진의 제안에 순순히 응하기가 싫어 말 걸지 말라는 듯 등을 돌려 누워 버렸다.
뒤에서 작게 웃는 소리가 들리더니 한서진이 다른 화제를 꺼냈다.
“내일 우리 팀 센터 밖으로 임무 나가요.”
“뭐?”
‘센터 밖’이라는 말에 나는 벌떡 몸을 일으켜 한서진을 돌아봤다.
“나는? 나도 나가?”
이 섬에서 벗어날 수 있다니. 틈을 봐서 도망칠 수도 있지 않을까? 아니면 잠깐 녹스의 동태를 살피거나, 아는 놈들을 만나고 올 수도……. 순식간에 기대와 설렘이 차올랐다.
내 과격한 반응에 잠시 놀란 듯 보이던 한서진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러나 그 입에서 나온 말은 기대를 산산이 부수는 것이었다.
“형은…… 못 가죠.”
“나는 왜 못 가? 팀 임무라며.”
“지금 던전에 들어가서 뭘 할 수 있는데요. 아직 몬스터 상대하는 법도 모르잖아. 가이딩도 겨우 배웠으면서.”
한서진의 입에서 나오는 팩트에 할 말을 잃은 나는 불만스레 입을 꾹 다물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나마 전에는 장비발이라도 세웠지만 스킬 사용도 할 줄 모르는 주호현의 몸으로 던전에 들어가 봤자 짐만 될 게 뻔하니.
‘결국 나가지 못한다는 소리잖아.’
밖으로 나갈 기회도 사라졌다는 사실에 힘이 쭉 빠져 그대로 뒤로 드러눕자 나랑 같이 덩달아 몸을 일으켰던 한서진이 나를 내려다봤다.
“나가고 싶어요?”
“당연하지.”
고민 없이 뱉어진 답에 한서진이 가만히 나를 응시했다. 무슨 생각을 했는지 한참 후에야 입을 뗐다.
“센터에도 부족한 건 없잖아요. 굳이 나가고 싶은 이유가 뭔데요?”
“너무 많아서 하루 안에는 말 못하겠는데.”
며칠 겪어 보지 않았는데도 에스퍼·가이드 센터에 산재한 적폐는 한두 개가 아니었다. 각성자의 상태창을 관리하는 것부터 시작해 가이드를 잡아 놓으려 이런저런 조항들로 퇴사까지 방해한다니. 외부에서 들으면 과장된 이야기 아니냐며 믿지 못할 수준이었다. 섬이 폐쇄적이니만큼 태제헌의 수색망을 피할 수 있다는 장점은 있었지만…….
그나마도 내가 강의진이라는 사실이 알려진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불 보듯 뻔했다. 별 이유를 다 들어 이 몸을 묶어 놓으려 들겠지. 호랑이 피하자고 늑대 아가리 속으로 뛰어들 수는 없었다.
당장 눈앞에 있는 너희, 에스퍼부터가 문제라는 생각을 속으로 삼키며 눈빛으로 말을 잇길 종용하는 한서진에게 대충 둘러댔다.
“궁금해서. 센터 바깥도 그렇고 던전이나 몬스터도 궁금하고.”
“……답답한 거예요?”
“어어, 그치. 답답해 죽겠다. 기억 돌아와야 나갈 수 있는 거야?”
만약 그렇다면 기억 돌아온 척이라도 해야 하나 하고 물은 말에 한서진이 긍정도 부정도 않으며 입을 뗐다.
“어쩌면요.”
“뭐야, 그 애매한 대답은.”
“형은 전에도 현장 잘 안 나갔어요.”
의아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그럼 우한세랑 박가인만 나갔다는 건가. 던전 내에서 살아남기엔 그 둘보다야 주호현이 생존 확률이 높을 것 같은데.
뭐, 이젠 상관없었다. 센터에서 도망치기 위해서는 뭐든 할 거니까.
자려고 눈을 감는데 답답하다고 했던 게 영 마음에 걸렸던 건지 한서진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 다녀오면 바다 보러 갈래요?”
“여기 셔틀 있다는 거 다 들었거든. 혼자 갈 거야.”
“같이 가요.”
내가 못 나가서 이러는 줄 아나. 속으로 투덜대면서도 조금 기분이 나아져서 손을 내밀며 고개를 까딱였다.
“잡아. 가이딩해 줄게.”
“……대체 그 자신감은 어디서 나오는 거예요?”
누가 들으면 가이딩 잘하는 줄 알겠어요.
한서진이 중얼거리는 소리는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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