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엑스트라 파업 선언-15화 (15/257)

엑스트라 파업 선언 15.

코를 스치는 상쾌한 샴푸 냄새에 기분 좋게 눈을 떴다. 흐린 시야로 막 씻고 나왔는지 젖은 머리를 털며 방문으로 다가가는 한서진의 모습이 보였다.

열린 방문 앞에는 어떤 남자가 서 있었다. 상체를 벗고 있는 한서진의 모습에 당황했는지 급히 시선을 돌리던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예성우였다.

요 며칠 내 주위를 맴돌던 것을 못 본 체하니 어제는 직접 다가와 기억은 괜찮냐며 걱정하던데. 주호현과 친했던 건가 싶었다.

‘알 바 아니지. 오히려 주호현을 잘 알면 더 귀찮아.’

나와 눈이 마주치고는 눈을 크게 뜨면 놀라는 예성우의 얼굴을 심드렁하게 바라봤다. 등을 보인 한서진이 문으로 다가가며 물었다.

“왜요? 곧 내려가려고 했는데.”

“호현이, 배웅해야 하는데 안 나오길래.”

“자고 있어요.”

“아, 그럼…….”

예성우가 힐긋 나를 바라보며 말끝을 흐렸다. 그때 뒤에서 팔이 쏙 나오더니 예성우를 제 품 안으로 끌어당겼다.

“뭐래요? 아직도 잔대?”

“아, 한세야…….”

“걘 대체 하는 게 뭐야? 임무도 안 나가, 가이딩도 못해. 지금 잠이 온대?”

팀원 중 내게 적대감을 가장 대놓고 표출하던 우한세였다. 머뭇거리는 예성우를 귀엽다는 듯 바라보던 우한세는 방안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예 등을 기대고 앉아 구경하고 있던 나를 발견하더니 황당하게 입이 벌어졌다.

“지금…….”

침대, 나, 그리고 한서진을 번갈아 보던 우한세가 공격적인 목소리로 소리쳤다.

“야, 한서진. 너 설마 주호현한테 가이딩받았냐?”

“어.”

“미쳤냐? 씨발 가이딩받을 게 없어서 저딴…….”

“주호현 가이딩 가르치는 게 내 역할이야.”

한서진의 담담한 말에 우한세는 오히려 발끈해 날 손가락질하며 말했다.

“너 지금 그걸 말이라고……. 아무리 그래도 쟤한테 가이딩받고 싶은 마음이 드냐?”

“자는데 시끄럽게 하지 말고 나가.”

“자긴 뭘 자? 나 왔을 때부터 일어나 있었는데.”

우한세의 말에 한서진이 뒤를 돌아봤다. 나를 보고 눈썹을 치켜올린 한서진이 다가오며 말했다.

“깼어요?”

“어. 시끄러워서 깼어.”

사실을 말한 건데도 찔렸는지 우한세의 얼굴이 왈칵 구겨졌다. 그러곤 한서진 너머 내게 소리쳤다.

“일어났으면 나와. 가이딩도 못하는 게 팀원들 나가면 배웅이라도 해야지.”

“배웅?”

내가 아는 그 배웅?

아까부터 배웅, 배웅 하는 게 신경 쓰여 중얼거리자 한서진이 머리를 넘기며 고개를 저었다.

“형은 아직 신경 쓸 필요 없는 일이에요.”

한서진의 말에 우한세가 날카롭게 반응했다.

“야. 한서진.”

‘싸우나? 싸워라. 싸워라.’

싸움 구경하나 싶어 설렜는데, 예성우가 금방이라도 한서진을 한 대 칠 것 같던 우한세를 말렸다.

“한세야, 싸우지 마. 내가 얘기할게.”

“성우 형.”

결국 우한세가 한발 뒤로 물러나고 예성우가 내게 말했다.

“호현아. 너도 일 층으로 내려와야 해.”

“나는 가지도 않는데 왜?”

“너 기억 잃기 전에는 원래 하던 일이야. 그리고 호현이 네가 현장에 가지 않는 만큼 다들 고생하니까 감사의 의미로 배웅 정도는…….”

“누구한테 감사해? 팀원?”

내 물음에 멈칫한 예성우가 말하다 결국 시선을 떨구고 입술을 깨물었다. 순식간에 상처받은 표정이 된 예성우는 곧 애써 표정을 갈무리하려 노력하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호현이 네가 싫으면 내려오지 않아도 좋아. 내가 어떻게든 잘 말해 놓을 테니까 걱정 말고…….”

“그럼 부탁할게.”

“……응?”

이제야 말이 통하네. 싸우지도 않고 별 재미도 없는 상황에 다시 침대에 드러누웠다. 그런데 예성우와 우한세가 가지 않고 서 있었다. 무시하려다 어쨌든 나가기 전까진 팀원이고 여기서 지내야 하니까……, 하는 생각에 고개만 들어 다시 말해 뒀다.

“앞으로 배웅 같은 건 안 나갈 거니까, 잘 말해 줘. 그쪽만 믿을게?”

“주호현, 너 미쳤냐? 야!!”

듣기 싫다는 듯 이불을 머리 위까지 들어 올리자 우한세가 길길이 날뛰었다. 금방이라도 안으로 달려들 것만 같은 모습에 한서진이 경고했다.

“선 넘지 말고 내려가.”

“웃기고 있네. 너 태도 똑바로 해. 지금 저게 기억 잃어서 저러는 것 같아? 네 새끼 방관하는 거야 알고는 있었다만 수윤 형 생각하면 이래선 안 되지. 주호현 계속 싸고돌면 나도 더는 못 참아.”

“나가.”

우한세는 쾅 소리가 날 정도로 세게 문을 닫고 사라졌다.

‘미친 망아지 같은 새끼. 수윤이란 놈은 또 누구야?’

시끄러움에 잠이 달아났다. 속으로 욕을 하는데 한서진이 침대에 걸터앉는 게 느껴졌다.

“우한세는 항상 저러니까 신경 쓸 거 없어요.”

한서진의 말에 이불을 걷고 위를 올려다봤다. 젖어서 평소보다 차분히 내려앉은 검은 머리칼이 한서진의 새하얀 피부와 대조되어 유난히 더 창백해 보였다.

“네가 저번에 그랬지. 팀원들 다 나 싫어한다고.”

“……그랬죠.”

“너는? 너도 주…… 나 싫어했냐?”

주호현이라고 할 뻔한 것을 급히 삼키고 고쳐 말하자 한서진의 눈이 가라앉았다.

내 생각을 읽지 못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혹시 모른다는 생각에 몸이 드러난 곳 없이 이불로 잘 덮여 있는지 확인하던 중, 머리 위로 한서진의 목소리가 떨어졌다.

“한심하다고 생각했어요.”

“……뭐?”

“견딜 수 없이 답답하고 멍청해서, 그래서 힘들어하는 거 알아도 손 안 댔어. 귀찮아질까 봐.”

말을 끝낸 한서진은 내 반응을 기다리듯 입을 다물고 빤히 나를 응시했다. 갑자기 제 속내를 고백하는 한서진에 속으로 황당한 마음이 들었다.

‘어쩌라고 갑자기 고해 성사야?’

주호현에게 한서진이 어떻게 대했든 내 알 바 아니지만 방금 발언은 꽤나 재수 없었다. 내게 한 말이 아님을 알면서도 면전에 대고 욕을 들은 기분이었다.

나쁜 새끼네. 이거? 같은 팀인데 힘든 줄 알면 도와줘야지? 한심? 하안심?

“귀찮다고 안 도와줬다는 게 무슨 개소리야?”

“…….”

“기억은 나지 않지만 네 행동에 주호현이 굉장히 상처를 많이 받았을 것 같거든? 앞으로 나한테 다 속죄하며 갚도록 해.”

선심 쓰듯 말하자 굳은 표정이 풀어진 한서진이 허탈히 웃으며 일어났다.

“숙소에 있어요. 괜히 나가지 말고.”

그 말에는 대답하지 않았다.

준비를 마친 한서진이 방을 나간 후, 문이 닫히자마자 나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창문으로 다가갔다.

밖을 내다보자 정문 앞에 대기하고 있는 새카만 밴이 보였다. 하나둘씩 그 안에 올라타는 중이었다.

팀원을 모두 채운 밴이 저택을 떠나는 모습을 본 후엔 기분 좋게 몸을 늘였다. 이 큰 저택에 나 혼자 있다고 생각하니 이렇게 자유로울 수가.

“숙소에 있긴 무슨…….”

간만에 감시역이 사라졌는데 가만히 있을 수는 없지. 일단 연승연의 연구실로 가야겠다.

제발 자기가 데리러 올 수 있게 방문 전에 미리 연락해 달라는 연승연의 말이 떠올라 전화를 걸었다.

[네! 호현 님!]

“나 연구실 간다.”

[네. 알겠습니다. 준비해 놓…… 맞다! 호, 호현 님!]

“응?”

[그게……. 제 동료에게 호현 님 업무 실적을 뽑아 달라고 부탁했는데 상세 이력을 조회하려면 가이드 카드가 필요하다고 해요. 혹시 가져와 주실 수 있나요?]

“가이드 카드? 그런 거 없는데. 꼭 필요한 거야?”

[네. 그게 없으면 이력 조회가 되지 않아 퇴사 관련 사항들을 확인하기가 어렵습니다……. 하지만 없으면……. 어쩔 수 없죠. 다시 신청하고 재발급받으면 될 거예요.]

재발급? 그런 건 그냥 비서에게 말하면 생겨나 있는 건데. 지금은 한서진이나 고운영에게 부탁하는 수밖엔 없나.

“음…….”

둘이 갑자기 내게 카드가 왜 필요하냐고 물으면 설명할 핑계가 없었다. 내가 뭘 계획하고 있는지 들켜서도 안 됐고.

‘한서진이 저번에 주호현의 방이 따로 있다고 했었지.’

“내가 한번 찾아볼게. 그거 어떻게 생겼어?”

[크기와 재질은 일반 신분증과 동일하게 생겼는데요, 안에는 칩이 삽입되어 있고 겉에는 사진과 이름, 팀과 등급이…….]

***

연승연에겐 호기롭게 내가 찾겠노라 했지만 한서진의 방을 나오자마자 문제가 발생했다.

“……주호현 방이 어디지.”

넓은 저택은 지하까지 층수만 다섯 개였다. 심지어 이 층에만도 문이 꽤 많았다.

“이걸 다 열어 볼 수도 없고…….”

일단 이 층부터 살펴볼까 하던 찰나, 첫날 한서진이 했던 말이 생각났다.

-방도 옮겨도 되죠?

-방까지?

-주호현 방까지 가기 힘들어요.

그렇게 말했으니 가까이 있진 않으려나. 복도를 걸어가 끝의 계단에 멈춰 섰다. 아래로 내려갈까 위로 올라갈까 고민하는데 나도 모르게 발이 위로 향했다.

삼 층을 지나 사 층에 들어서자 다른 층들과는 다르게 음산하고 사람 사는 흔적이 전혀 없는 공간이 눈앞에 펼쳐졌다. 심지어 복도에는 불도 들어오지 않았다.

“……다락방인가?”

온기 없는 공간을 둘러보며 천천히 발을 옮겼다. 이상한 건 주호현의 기억 때문인지 이 어두운 곳이 생각보다 익숙하게 느껴진다는 점이었다.

첫 번째 방문을 열자 창고로 쓰는 듯 방 안엔 물건들이 이것저것 쌓여 있었다. 그다음은 빈방, 창고, 빈방, 빈방…….

마지막 남은 문을 열자 주호현의 방이 나왔다.

언젠가 한서진이 내게 내준 곁방이 전의 방보다 네 배는 크다고 말했을 때 별생각 없이 흘려들었는데, 그 말이 사실이었다니.

제대로 된 침대도 아닌 매트리스 달랑 하나와 조그만 협탁과 옷장이 가구의 전부였다. 그것만으로도 여유 없이 방이 꽉 차서 사람이 누우려면 몸을 웅크려야 할 정도로 작은 방이었다.

“……미친. 방도 많은데 왜 이딴 구석에 처박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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