엑스트라 파업 선언 16.
등급도 낮은 게 팀원들에겐 개무시당하고 이런 작은 방에서 머물다니. 내 눈에 보였다면 불쌍해서 우리 집으로 데려왔을 거다. 물론 그 집에는 태제헌이 있었기에 그게 확실히 나은 쪽이라는 확신은 하기 힘들었지만……. 어쨌든.
“불쌍한 놈.”
혀를 차며 고개를 저은 나는 원래 내 목표였던 가이드 카드를 찾기 위해 방안을 뒤지기 시작했다. 꼭 잠시 머물다 떠날 사람처럼 소지품은 최소한으로만 정리되어 있었다. 그 덕에 방을 뒤지기엔 더 편했다.
각 맞춰 깔끔히 보관된 옷가지들에서 별다른 것을 찾지 못한 나는 꾸준히 청소했는지 먼지가 얼마 쌓이지 않은 서랍장으로 시선을 돌렸다. 첫 번째 칸을 열자 검은색 가죽 지갑이 들어 있었다.
“역시!”
지갑을 열자 가장 앞쪽엔 내가 찾던 가이드 카드가 끼워져 있었다. 지갑에 박힌 로고는 나도 써 본 적 있는 유명 브랜드였다. 오래 썼는지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긴 했지만, 좋은 가죽이라 오히려 시간이 멋으로 남은.
“선물받은 건가?”
이런 구린 방에 있기엔 과분한 지갑인데.
지갑 아래의 통장과 따로 철해 놓은 계약서나 서류들까지 모조리 챙기고선 남은 서랍은 대충 열어 보며 확인만 했다. 가장 아래 칸에 이르러서는 마지막이란 생각에 귀찮아져 빼냈던 서랍을 툭툭 발로 밀어 집어넣었다. 그런데 반쯤 들어가던 서랍이 어딘가에 덜컥 걸리며 유리병이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뭐지?”
서랍장 안쪽에서 들린 소리였다. 저런 소리가 날 만한 물건은 없었는데. 혹시나 싶어 서랍을 다시 열어 확인해 봤다. 별다른 건 보이지 않았다. 별일 아닐 거라 생각하면서도 찝찝한 마음에 서랍을 완전히 당겨 빼냈다. 그때였다. 병끼리 부딪혀 덜그럭거리는 소리가 다시 들렸다.
몸을 숙여 서랍이 빠진 자리를 들여다보고 나서야 소리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서랍이 있던 바닥에 손바닥만 한 구멍이 뚫려 있었다. 마지막 서랍을 대충 밀어 넣다 구멍을 덮고 있던 판자가 걸려 열린 거였다. 손을 깊숙이 집어넣어 판자를 들어내 내부에 있는 것들을 꺼냈다.
라벨 없는 하얀색 약통과 검보랏빛 액체가 들어 있는 손가락 크기의 앰풀 여러 개. 약통은 몰라도 독특한 색의 앰풀은 겉으로 보기엔 뭔지 알아보기 힘들었다.
스킬이 있었다면 간단한 성분 분석 정도야 바로 할 수 있었겠지만, 내 스킬은 지금 모두 잠긴 상태였다.
아쉬운 마음으로 일단 옆에 내려놓은 후 라벨이 붙어 있지 않은 하얀 약통을 열었다. 안에는 동그란 흰색 알약이 반쯤 차 있었다. 열자마자 특유의 냄새가 올라왔다.
“뭐지……?”
무슨 약인지 전혀 가늠이 되지 않았다. 답답함에 인상을 찌푸렸다. 오기로라도 어떻게든 생각해 내려 머리를 붙잡고 한참을 고민하다 결국 포기하고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환기도 되지 않는 쥐구멍만 한 방 안에서 뭔지도 모를 약품 냄새를 맡는 일만큼 위험한 짓은 없었으니까.
자리에서 일어나 서랍을 원상태로 돌려놓은 나는 앰풀들과 약, 주호현의 서류와 통장까지 모조리 챙겨 한서진의 방으로 돌아왔다.
“어디 숨겨야…….”
내 방이 아니니 어디에 숨긴다 해도 불안했다. 결국 첫날 잤던 곁방으로 들어온 나는 숨길 곳을 찾다 화장실까지 들어왔다.
발을 높여 화장실 천장의 점검구를 들어 올렸다. 천장의 일부가 올라가며 드러난 공간에 주호현의 방에서 가져온 물건들을 안쪽에 숨기고 다시 단단히 홈을 맞춰 닫았다.
“여긴 모르겠지. 이제 가 볼까.”
손을 턴 나는 저택을 나섰다. 주머니에는 가이드 카드와 따로 챙긴 알약 두 알이 들어 있었다.
큰길가로 나서자 멀지 않은 곳에 <상급 에스퍼 팀 숙소 단지>라는 팻말이 붙은 빨간색 정류장이 나타났다. 잠시 후 저 멀리 숲속에서 노란색 소형 버스가 소리 내며 다가왔다.
버스가 내 앞에 멈춰 섰다. 올라타자 꽤 젊게 보이는 운전기사가 쾌활히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검진 센터 가려고 하는데.”
“타세요! 예에. 어디 보자……. 검진 센터. 순환 버스라 열 정거장 정도 거칩니다.”
버스에는 나밖에 없었다. 뒤쪽으로 가 넓은 자리에 앉자 운전기사가 흘깃 뒤를 바라보며 말했다.
“혹시 라디오 틀어도 될까요?”
“맘대로 해, ……요.”
“감사합니다. 그럼 출발하겠습니다-.”
버스가 출발했다. 열린 창문 사이로 들어오는 바람이 시원해 멍하니 바깥을 바라보던 중 어느 순간부터 운전기사가 튼 라디오 소리가 귀에 걸렸다.
[이슈 스나이퍼가 물어 온 오늘의 이슈! 오늘의 사건 사고를 알려 드립니다. 수원 행궁에 나타난 게이트의 소유권은 누구에게로? 골치를 썩이던 덕유산 해발 1000m 던전, 헌터 연합의 보조하에 드디어 클리어! 강의진의 수제자라 주장하는 제작자 5인의 정체는? 그리고 2부에서는 저희 이슈 스나이퍼가 물어 온 초대박 스테이지, 바로 아주 근래까지 일하다 녹스에서 퇴사한 익명의 제보자와의 인터뷰인데요, 사라진 녹스 길드장과 강의진의 행방부터 녹스의 현재, 내부 상황 등을 상세히! 알려 드리니 꼭 놓치지 말고 주파수 고정~.]
‘씨발 저게 무슨 소리야. 내 조수?’
고개를 번쩍 들었다. 나는 조수 같은 거 안 키웠다. 그 미친 새끼가 허락하지 않았을뿐더러 마음에 드는 놈들도 없었고.
그나마 연승연이 처음으로 한번 키워 볼까, 생각이 들게 한 놈인데.
물론 마음에 걸리는 얼굴 셋이 있기는 했다. 하지만 그중 한 놈은 배신자인 데다……. 씨발. 말을 말자.
그건 차치하고, 녹스의 내부자? 태제헌을 모르나? 얼마나 끔찍한 보복을 당하려고 그런 미친 짓을 하는 거지? 목숨을 내놓은 게 아닌 이상에야 라디오에 나가서 녹스의 내부 고발을 한다니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슈나 찌라시들로 자극적인 방송을 하는 곳임을 감안하더라도 미친 짓이다.
‘이런 B급 라디오를 듣는 놈들도 있나.’
라디오는 광고로 넘어갔지만, 어느새 나는 홀린 듯 가장 앞자리, 운전석에 바짝 붙은 의자로 다가가 앉았다. 신호 대기하는 사이 운전기사가 뒤를 돌아보며 물었다.
“녹스에 관심이 많으신가 봐요?”
“아니? 관심 없는데? 녹스 따위 알 게 뭐야. 망했으면 좋겠어.”
“아하하하! 그런가요? 녹스 얘기가 나오자마자 바로 앞으로 달려오시길래. 제가 착각했네요. 죄송합니다.”
내 답에 버스 기사는 배를 부여잡고 웃다가 신호를 놓칠 뻔했다. 호탕한 웃음소리가 싫지는 않아 빤히 바라보다 물었다.
“기사님도 여기 살아? 섬?”
“그럼요. 손님은 가이드시죠?”
“어떻게 알았어?”
“타신 곳이 숙소 단지니까요.”
“에스퍼일 수도 있잖아.”
“하하하. 에스퍼님들은 가이드님 없으면 아주 예민하시잖아요. 라디오 소리 같은 걸 참을 수 있을 리가 없죠. 게다가 애초에 순환 버스를 타지도 않고요.”
하긴 생각해 보면 살면서 피 주머니 없이 돌아다니는 노헌들을 본 적이 없긴 했다.
에스퍼가 예민하다는 말에 깊이 공감하며-다만 기사는 에스퍼의 오감을, 주호현은 한서진의 성격을 떠올렸다는 점이 달랐다- 이후로 버스 기사와 사소한 대화를 나누며 몇 정거장을 지나쳤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몇 정거장이 지나도록 타는 사람이 없었다. 또다시 아무도 타지 않고 닫히는 문을 바라보다 물었다.
“오늘 왜 사람이 없어?”
“어라? 모르셨어요? 오늘 천랑 길드장이 방문하잖아요. 죄다 그거 보러 갔죠.”
“천……랑이라고?”
천랑은 녹스와 함께 한국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영향력 있는 길드 중 하나였다.
길드에 속한 헌터들과 국가 소속 에스퍼들. 둘의 성격이 다른 만큼 국가와 길드 사이는 좋지 않았는데 천랑 길드장이 왜 센터에 방문했는지 의아했다.
심지어 천랑 길드장인 성훤은 완전 할밴데.
“센터까진 왜 왔대?”
“이번에 새로 얻게 된 던전 증축을 축하하며 친교의 의미로 방문했다는데…….”
버스 안엔 우리 둘밖에 없는데도 기사가 주위를 둘러보더니 목소리를 죽여 속삭였다.
“아는 사람들끼린 뭔가 뒷거래가 있는 거 아니냔 말이 나오고 있어요.”
“무슨 뒷거래?”
“뭔지는 몰라도 녹스에 관련된 것 아니겠어요? 녹스 길드장 태제헌과 강의진의 소식이 동시에 뚝 끊겨 버렸으니 천랑이 가만있을 리 없잖아요.”
천랑과 녹스는 가장 초기부터 활동한 대형 길드라 오랜 세월 동안 라이벌로 지내 왔다. 몇 년 전엔 내게도 몰래 스카우트 제의가 왔는데 그걸 안 태제헌이 천랑의 지부와 던전을 폭파해 버려 사흘 내내 뉴스에 대서특필된 일도 있었다. 그런 천랑이니 녹스가 휘청거리는 이 기회를 틈타는 것이 어떻게 보면 당연했다.
‘그 할아범이 여기에 있단 말이지…….’
다시 앞을 바라본 기사가 핸들을 크게 돌리며 대수롭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이 주말이기도 하고, 천랑 길드장이 어디 쉽게 나다니는 사람도 아니잖아요? 워낙 유명한 데다 잘생기기도 했고.”
“잘생겼다고?”
“그럼요! 요즘 헌터 중에 제일 화제잖아요. 인기가 얼마나 많은데요.”
황당한 눈으로 기사를 바라봤다. 물론, 물론 할아버지치고 잘생긴 얼굴에다가 중후한 미남자로, 우리나라뿐 아니라 외신에까지 얼굴이 실리며 유명하긴 했지만……. 늙었잖아!!
얼핏 봐도 이삼십대로 보이는 기사를 떨떠름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그런 게 취향이야?”
“그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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