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엑스트라 파업 선언-18화 (18/257)

엑스트라 파업 선언 18.

화려한 얼굴의 미인과 눈이 마주쳐 잠시 멈칫했다. 곧 그가 방금 전까지 구경하던 머리칼의 남자라는 것을 알고 심드렁한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당신 혹시…….”

“왜, 할 말 있어?”

피할 생각을 않는 옅은 색의 눈동자에 눈썹을 치켜올렸다. 다분히 시비조로 뱉은 말에 떨리는 목소리가 돌아왔다.

“……강의진.”

남자의 입에서 뱉어진 말에 눈도 깜빡이지 못하고 그대로 얼어붙었다. 당황한 것이 티 나지 않게 표정 관리를 하느라 무진 애를 써야 했다.

‘날 어떻게 아는 거지?’

물론 주호현이 내 잘생긴 얼굴을 닮기야 했다만, 아니 닮은 수준이 아니라 거의 똑같았지만……. 태제헌의 통제하에 내 모습은 바깥으로 공개된 적 없었다. 공식 석상에 모습을 드러낼 때도 아이템으로 얼굴을 가렸기에 ‘강의진’이 어떻게 생겼는지 아는 사람은 가까운 측근 몇뿐이었다. 그중 이 남자는 없었다.

뭐가 됐든 달갑지 않은 상황임은 분명했다. 혹시 태제헌의 귀에 들어간다면…….

상상만 해도 소름이 끼쳐 몸을 부르르 떨었다. 마침 일 층에 도착한 엘리베이터에 나는 문이 채 다 열리기도 전에 사람들을 밀치고 빠져나갔다.

“……진! 잠깐!!”

“사람 잘못 봤는데요!”

남자를 무시하고 곧장 달렸다. 하지만 검진 센터를 빠져나오기가 무섭게 거친 손길로 팔이 잡혔다. 천사와 닮은 생김새와는 달리 괴물 같은 힘에 놀라 뒤를 돌아봤다.

“왜 이래? 나 바쁜 사람이야.”

“강의진!!”

이 미친놈이?

돌연 외치는 내 이름에 누가 듣기라도 할까 봐 서둘러 팔을 잡고 한쪽으로 끌어냈다.

“뭐 하는 짓이야?”

“잠시면 됩니다. 수상한 사람 아니니…….”

“지금 하는 짓이 존나 수상한데 무슨. 사람 잘못 봤다니까 왜 이러세요.”

존댓말까지 쓰며 꺼지라 진저리 쳐도 꿈쩍 않은 남자가 품에서 명함 하나를 꺼내 내게 내밀었다.

“천랑 길드장 성산하입니다.”

“성산하?”

귀를 의심했다. 바로 몇 시간 전에 연승연에 게서 들은 이름이 앞의 놈에게서 나올 줄이야.

-몇 달 전에 천랑 길드장 바뀌었어요. 성훤에서 성산하라는 남자로.

가슴까지 내밀어지는 명함을 얼떨결에 받아 냈다. 빳빳한 고급 재질의 종이에 박힌 금박이 반짝였다.

「천랑 길드장 성산하」

천랑 길드장이라니, 태제헌과 가까워도 너무 가까웠다. 녹스와 천랑이 원수보다 못한 사이긴 해도 이건…….

멈칫한 사이 한발 가까이 다가온 성산하가 두 손으로 어깰 붙잡았다. 그의 시선이 내 입술부터 하관까지를 집요하게 훑었다.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겁니까? 어째서 센터에…….”

“놔, 무슨 소리야?”

할아범이면 모를까, 성산하라는 남자는 내 기억에 전혀 없었다. 왜 이러는지 이유를 알 수 없어 경계심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자 성산하는 날카로운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며 내 팔을 잡아끌었다.

“일단 여기서 나가서 얘기하죠.”

“무슨 소리 하는지 모르겠고, 사람 잘못 봤어. 난 당신이 찾는 사람이 아니야. 센터 가이드라고.”

성산하의 입이 다물렸다. 하지만 내리깐 속눈썹 뒤로 모습을 감춘 금빛 두 눈을 마주 보자 알 수 있었다.

‘이 새끼 안 믿네.’

나는 외려 더 뻔뻔한 표정을 가장하며 날 잡은 손을 내쳤다.

“누구 말하나 했더니……. 강의진? 걔 죽었잖아.”

무슨 말을 해도 흔들리지 않던 남자의 표정이 흔들렸다.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갑자기 나한테 왜 이러나 했더니, 내가 강의진이랑 닮기라도 했나 봐?”

“……정말 아니란 말입니까.”

“이미 장례식도 끝난 죽은 사람을 왜 찾는 거야? 둘이 무슨 사이인지 모르겠지만 현실 부정은 그만하고 죽은 거 받아들여.”

“……죽지 않았어.”

“안 죽긴, 무슨. 이미 화장도 끝나서 영혼도 안 남고 가루 됐겠지.”

“그만.”

성산하의 표정이 순식간에 딱딱하게 굳었다.

그만은 무슨 그만. 다신 강의진 소리 입 밖에 내지 못하게 이참에 아주 정을 떨어트려 놔야 한다.

“이번엔 그냥 넘어가 주지만, 다른 데 가서 이러지 마. 나한테 죽은 사람 투영하는 거 기분 좆같거든. 천랑 길드장이 죽은 사람 뒤꽁무니나 따라다닌다는 거 알면 사람들이 얼마나…….”

말하던 중 이상하게 성산하가 가까워진다 싶더니 한순간 강한 힘을 실은 주먹이 얼굴을 강타했다. 그대로 날아간 몸이 뒤의 나무에 부딪혔다.

“큭.”

땅을 짚고 일어나기가 무섭게 흰 장갑을 낀 손이 내 멱살을 잡아 올렸다. 분노를 꾹 눌러 담은 목소리가 비꼬듯 중얼거렸다.

“크윽, 이거 놓…….”

“확실히 내가 잘못 봤군. 너 따위가 ……리가 없는데.”

“죽은 사람 붙잡아 봤자 강의진이 살아 돌아오진…….”

“더러운 입에 그 이름 함부로 올리지 않는 게 좋을걸.”

눈을 휘며 웃은 성산하가 쓰레기 버리듯 잡고 있던 손을 놓았다. 내팽개치는 손길에 몸이 땅으로 털썩 떨어졌다. 성산하가 고개를 기울이며 중얼거렸다.

“강의진이 아니라고…… 그런데 왜 강의진 행세를 하는 거지?”

“내가, 언……제. 씨발.”

“지금도 그러고 있잖아?”

몸을 숙인 성산하가 손을 뻗어 내 볼을 감쌌다. 입 안쪽이 찢어졌는지 볼을 꾹 누르는 손길에 고통이 느껴졌다. 입도 못 열게 꽉 틀어쥔 손아귀에 입 밖으로는 억눌린 신음밖에 새어 나오지 않았다.

“우으…….”

어느 순간부터 여유로운 태도를 되찾았지만 난폭한 눈빛만큼은 미처 숨기지 못한 성산하가 내 얼굴을 샅샅이 훑으며 중얼거렸다.

“애초에 날 노리고 온 건가. 닮은 얼굴을 하고서……. 그럼 이건, 아이템? 스킬?”

황당해 말이 나오질 않았다. 이거 완전히 미친놈이네. 이런 또라이가 길드장이라고? 천랑도 다 뒤졌다. 성훤이 죽어서도 눈 못 감을 게 분명했다! 아직 살아있지만, 여하튼.

얼굴을 잡은 채 이리저리 돌리는 거친 손길에 결국 고인 피가 입술 사이로 내비쳤다.

“미……친놈아. 네, 가 따라왔…잖아. 이미 뒈진 강의진이랑 착각해서.”

“하하, 끝까지……. 너는 안 되겠다.”

돌아 버린 눈으로 중얼거린 성산하는 날 완전히 땅에 눕혀 반항하지 못하게 위로 올라타고서는 주위를 둘러보며 뭔가를 찾기 시작했다.

“이 얼굴론 다신 설치지 못하게 해 주지.”

“으읍, 으우웁!!”

내가 발버둥 칠수록 오히려 놈을 자극하는 꼴이 되는 것 같았다.

성스러운 흰 장갑에 들린 주먹만 한 돌이 지독히도 어울리지 않았다. 생리적으로 고인 눈물에 눈꼬리가 젖어 들어 갔다.

‘씨발. 포션으로 성형은 못하는데…….’

머리 위로 드리운 그림자에 눈을 질끈 감았다. 고였던 눈물이 관자놀이를 타고 주룩 흐르고 내 얼굴에는 결국…….

‘응?’

고통은 찾아오지 않았다. 그러나 나를 위에서부터 압박한 몸체는 아직 그대로였다.

언제 닥칠지 모르는 고통에 쪼들려서 더 견딜 수가 없었다. 슬며시 눈을 뜨자 시야엔 돌이 아닌 성산하의 얼굴이 있었다.

그는 눈살을 찌푸린 채 충격을 받은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젖어 흐려진 시선으로 바라보자 입술을 달싹이던 성산하가 무언가를 참아 내듯 눈을 꾹 감았다. 그의 눈이 다시 뜨인 순간, 하얀 장갑이 내 눈을 가렸고 동시에 환한 빛이 내 얼굴을 뒤덮었다. 편안하고 따듯한 감각과 동시에 터진 상처가 순식간에 아물었다.

반항할 수도 없는 찰나였다. 힐을 당해 버린 나는 충격에 멍하니 눈만 깜빡였다. 몸 위에서 묵직한 무게감이 사라졌다.

“강의진에게 감사해.”

더러운 것이라도 묻었다는 듯 나와 닿았던 곳을 털어 낸 성산하가 서늘한 눈으로 날 내려다보며 말했다.

“또다시 강의진 행세를 하다 내 눈에 띄면……. 그땐 반드시 그 역겨운 낯짝, 갈아주겠다고 약속하지.”

성산하가 떠나고 좆같은 힐의 느낌에 몸부림치던 나는 하늘을 바라본 채 손에 남은 성산하의 명함만 세게 쥐었다.

“씨발.”

***

내가 급히 올라탄 버스의 기사는 오나연은 아니었다. 센터에서 다들 화술 교육이라도 받는 건지 이번의 버스 기사도 굉장히 말이 많았다. 버스 안에는 센터 공무원이라는 일반인도 한 명 타고 있었는데 그 사람 역시 스스럼없어 편하게 떠들며 버스를 타고 올 수 있었다. 덕분에 성산하 때문에 잡친 기분도 조금 나아졌고.

센터에 대한 얘기를 나누다 내가 기억 상실증이라고 한 말을 듣고는 잠시 정적이 찾아오긴 했지만, 뭐.

“네에? 기억 상실증이라고요?”

“응.”

“아……. 죄송합니다.”

“뭐가 죄송해? 내가 그쪽 때문에 기억 상실증 걸린 것도 아닌데.”

대수롭지 않게 답했지만 공무원은 머뭇대기만 했다. 버스 기사가 거울로 눈치를 보더니 밝은 목소리로 제안했다.

“이번 종점까지 가면 저는 퇴근인데, 어떻게 내가 우리 손님 두 분 드라이브라도 시켜 드릴까?”

“정말? 난 좋아! 바다 보이는 길로!”

“저도 어차피 퇴근하던 길이었으니 상관없네요. 그럼 제가 기사님이랑 가이드님께 커피 한 잔씩 쏠게요.”

“으하하. 그럼 가 보자고!”

역시 버스 기사라 그런지 경치 좋은 곳들로 우리를 안내했다.

“저기 너머 펜트하우스는 높은 분들이 사는 곳들이고요. 요 바로 앞의 다리가 우리 센터의 상징인 이도교입니다.”

“이도교? 이름 구려.”

“아무래도 그렇죠? 대체 누가 지은 건지…….”

“하하하. 저는 마음에 드는걸요.”

“기사님! 저기 카페 앞에 세워 주세요. 저기 커피가 맛있어요.”

“알겠습니다.”

※ 본 저작물의 권리는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저작물을 복사, 복제, 수정, 배포할 경우 형사상 처벌 및 민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18)============================================================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