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엑스트라 파업 선언-20화 (20/257)

엑스트라 파업 선언 20.

꺼림칙하게 말끝을 흐리자 한서진은 제 팀원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가이드에 대해 처음부터 교육 중이라 말 그대로 아직 일반인이나 다름없어요. 쓸데없는 소리 안 해 줬으면 하는데. 가이딩 강요도 물론이고.”

“야. 어차피 해야 하는 걸.”

“주호현 보조 가이드예요. 접촉까지 할 의무 없어.”

한서진의 말에 여태껏 조용히 있던 팀장이 손짓하며 말했다.

“교육은 한서진이 맡고 있으니 그 말대로 해. 기억 돌아올 때까지는 괜히 자극해서…… 일 만들지 말고.”

팀장의 시선이 잠깐 내게 머물렀다 떨어졌다. 신연형과 우한세가 마지못해 대답하고 눈치 보던 박가인이 아까부터 하려던 말을 드디어 꺼냈다.

“……측정 준비 다 됐어요.”

불이 들어온 하얀 기계의 화면에는 0이라는 숫자가 쓰여 있었다. 손가락 사이로 끈적하게 늘어지는 젤을 구경하는데 박가인이 조용히 말했다.

“처음에 전류가 흘러서 조금 껄끄러울 수 있지만 곧 사라질 거야.”

“몇 점 나와야 좋은 거야?”

“어? 으음……. 하급 가이딩은 대체로 160rp에서 300rp 정도 나와.”

“최고점이 몇인데?”

조곤조곤 대답하던 박가인은 내 질문에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S급 가이드는 이런 간이 수치계로는 측정 못 해. 검진 센터의 기계로 해야 하는데, 으음……. 아마 3000rp 넘을걸.”

“와…….”

삼천이라면 하급 가이딩과 거의 열 배 이상 차이가 나는 게 아닌가. 한서진이 내 가이딩을 받고도 단 한 번도 만족하거나 잘했다거나 하는 말을 한 적 없는 걸 보면 300rp는 기별도 가지 않아 보이던데. 역시 3000rp 정도는 되어야지 상급 에스퍼들도 쉽게 다루고 그러는 건가?

머리로 계산을 하는데 옆에서 우한세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언제까지 기다려?”

“으응, 바로 해.”

박가인이 슬쩍 눈치를 보고는 내 앞으로 기계를 돌려 줬다.

“손잡이 잡고, 가이딩 시작하면 돼.”

“응.”

손잡이를 잡으니 젤로 인해 손에 착 감기는 서늘한 금속의 감촉이 느껴졌다. 내가 잘 잡은 것을 확인한 박가인이 옆의 전원 버튼을 눌렀고 손바닥을 통해 전류가 흘렀다.

“윽.”

“금방 사라질 거야. 조금만 참아.”

박가인의 말대로 아주 약한 전류는 금세 사라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한서진의 손을 잡았을 때와 같이 내 손에서 기계로 말로 표현하기 힘든 기운이 빨려 들어가는 느낌을 받았다. 퍼센트가 서서히 올라가며 그 옆의 게이지도 한 칸씩 차오르기 시작했다.

모두의 시선이 기계에 집중된 사이 심드렁하게 지켜보던 나는 뒤의 한서진을 돌아보며 말했다.

“야, 손에 바른 거 진짜 점점 날아가. 다 날아가면 측정도 끝…….”

“집중해요.”

“…….”

속으로 투덜대며 뚱하게 다시 수치계를 바라봤다.

78%…….

86%…….

느지막이 올라가던 숫자가 100%까지 다 차고 드디어 기계가 수치를 띄웠다.

<69rp>

‘69...? 잠깐, 아까 하급 가이딩 수치가 최소 160이랬는데?’

찰칵.

바로 옆에서 들려온 소리에 돌아보자 어느새 일어난 우하윤이 휴대폰으로 수치를 찍고 있었다.

“와. 이런 말도 안 되는 수치 처음 봐.”

“……?”

그걸 시작으로 우한세가 옆의 쿠션을 집어던지며 일어났다.

“육십구우? 육십구? 저게 가이딩이야? 진짜 일반인이랑 다를 게 없잖아!”

“육십구……? 이런 수치는 들어 보지 못했는데 가이딩이 되긴 하는 걸까요?”

“접촉했는데도 수치가 이러면 방사 가이딩해 봤자…….”

“한서진, 이게 가이딩 교육시킨 거라고! 저걸 어디다 써?”

박가인은 당황해 기계를 이것저것 조작하기 시작했다.

“다, 다시 해 볼게요. 뭔가 이상…….”

“잘못 나온 거 아니에요. 가이딩 그 정도 맞아요.”

담담한 목소리에 모두 한서진을 바라봤다.

“야, 너 그게 무슨…….”

“한서진. 무슨 소리지? 분명 가이딩할 수 있게 만들겠다고 한 건 너였어.”

팀장의 서늘한 목소리가 한서진을 질책했다. 한서진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대답했다.

“할 수 있게는 만들었죠.”

“지금 말장난하자는 거 아니야.”

“이미 가이딩 조절에 익숙한 상태에서 가이딩하는 방법만 잊은 거예요. 몸은 가이딩을 제어하고 있으니 수치가 낮은 게 정상이라고 보는데.”

“……그래서 지금 주호현을 가르치는 데 성공했다고.”

한서진이 팀장을 빤히 바라봤다. 그 눈빛이 마치 ‘아니면 뭔데?’라고 묻는 것 같았다.

한서진이랑 팀장 사이의 분위기가 싸늘해졌다.

한동안 볼 일이 없어 잠시 잊고 있었다. 저기 앉은 팀장도 내가 일어나자마자 뺨을 연타로 두 대나 날린 미친놈이라는 것을. 겉보기에도 존나 융통성 없고 딱딱하고 싸가지 없고 고지식해 보이는데 눈까지 조금 돌아 있었다. 잘못 걸렸다가 또 팰 게 분명했다. 그때야 정신없어서 그냥 지나갔지, 그거 존나 아팠는데.

신연형이 웃으며 말했다.

“그냥 나한테 넘겨. 하루 만에 눈 번쩍 뜨이게 만들어 줄 수 있는데. 응? 호현아, 형 어때.”

뒤로 몸을 기대며 낄낄대는 신연형을 짜증스러운 눈으로 바라봤다. 이해하기 힘든 소리를 하는 점이나 매사에 껄렁대는 모습이 재수 없었다.

팀장 놈의 표정이 좋지 않아 대충 눈치를 보고 있었기에 망정이지 그도 아니었다면 욕이나 하고 방으로 들어갔을 거다.

한참 동안이나 한서진과 대치하던 팀장이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일단은 넘어가겠지만…….”

“…….”

“주호현 생각해서라도 빨리 회복시켜. 현장도 못 나가는 가이드는 데리고 있을 이유가 없으니까.”

팀장의 무감한 시선이 내게로 향했다.

“이번에야말로 공용 가이드로 치워 버릴 수 있다면 나쁘지만도 않겠지.”

공용 가이드 소리가 나오자 팀원들이 내 눈치를 봤다. 기억을 잃은 내가 뭔지 모를 거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으나 이미 나는 연승연에게 들어 공용 가이드에 대해 알고 있는 상태였다. 힐긋 한서진을 바라보다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

불을 끄고 침대에 누운 나는 옆을 돌아봤다. 어두워서 한서진의 이목구비도 잘 보이지 않았다.

“야, 자냐?”

한참 동안 돌아오지 않는 대답에 자는가 보다 하며 바로 눕자 그제야 답이 돌아왔다.

“……아니요. 왜요.”

“오늘 나 때문에 까여서 기분 안 좋지?”

“그런 거 아니에요.”

“아니긴. 존나 티 나는데.”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한서진이 내 쪽을 보고 돌아눕는 게 느껴졌다. 나는 그대로 천장을 바라본 채로 말했다.

“걱정 마. 내가 S급까지는 못해도 160인가 200인가……. 여하튼 그 정도는 맞출 거야. 할 수 있어.”

“…….”

내 말에 한서진은 뭔가 고민하듯 잠시 침묵했다. 다시 입을 열었을 때, 익숙하다 못해 내 것인 이름이 튀어나왔다.

“형은 기억 못 하겠지만……. 강의진이라고 있어요.”

“크흡! 큭, 콜록.”

“왜 그래. 어디 아파요?”

방심하고 있다가 사레가 들린 나는 손을 휘두르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니야. 침 잘못 삼켜서. 어, 말해.”

한서진이 천천히 다시 말을 이었다.

“강의진은 포션 메이커로, 생산계 각성자 중에서 가장 유명한 헌터예요. 센터 측에선 그 사람에게 가이딩 포션을 의뢰한 상태였어요. 그런데 얼마 전 갑자기 실종됐다는 뉴스가 뜨더니…….”

“실, 종됐대?”

“정황상 죽은 것 같아요.”

해가 동쪽에서 뜬다는 사실을 말하듯 건조한 목소리였다. 한서진이야 강의진과 면식이 없기에 당연한 일이었지만 남의 입에서 내가 죽었다는 말을 들으니 기분이 이상했다.

입술이 마르는 듯해 혀를 내어 적셨다.

“강의진이 죽은 건 갑자기 왜?”

“형도 현장에 나갈 일이 자주 생길 거예요. 가이딩도 전보다 배는 더 해야 할 테고. 이제 가이딩 포션은 만들 수 없을 테니까.”

가이딩 포션이 뭐지? 기억을 더듬어 봤다. 그러나 받은 수주와 동시에 진행하던 연구가 워낙 많아 바로 떠오르지 않았다.

“그…… 가이딩 포션이 뭔데?”

“에스퍼의 폭주 수치를 낮추는 포션이요. 그게 있다면 가이드가 없는 상황에서도 에스퍼들의 폭주를 막을 수 있어요.”

“아, 그 폭주 억…….”

나도 모르게 중얼거리던 입을 급히 다물었다. 한서진의 말을 들으니 받았던 계약서의 개요가 대강 기억났다. 의뢰한 단체는 익명으로, 아직 제대로 손대지 않았던 프로젝트였다. 국가에서 의뢰한 포션이었다니.

“그 사람의 포션으로는 사람 살리는 것 빼고는 뭐든 가능하다고 하니까, 다들 말은 안 해도 기대가 컸어요. 드디어 부작용 없는 가이딩 포션이 나오는 거냐고. 이제는 모두 물거품이 됐지만.”

에스퍼들에겐 내 생각보다 중요한 문제인가 보다. 머뭇대다 입을 열었다.

“물거품은 무슨. 뭘 벌써 포기하냐? 다른 사람이 만들어 낼 수도 있잖아. 센터에 연구원들 많던데.”

내 말에 한서진이 작게 웃었다.

“국가 소속 제작 계열 각성자들의 가장 첫 번째 임무가 가이딩 포션 만들기예요. 여태껏 그 실마리조차 찾아낸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뭐? 아무도……?”

아무도 성공한 적 없는. 불가능하다는 의뢰.

설렘에 두 볼이 상기됐다. 처음, 최고. 완벽. 모두 내가 좋아하는 단어들이었다.

그게 눈앞에서 날아갔다니 속에서 열이 확 올랐다.

‘미친, 바보들이. 성공한 사람이 아무도 없는 포션이란 걸 말해 줬어야지! 그럼 가장 우선으로 진행했을 텐데.’

※ 본 저작물의 권리는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저작물을 복사, 복제, 수정, 배포할 경우 형사상 처벌 및 민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20)============================================================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