엑스트라 파업 선언 25.
그 남자를 제외하면 나머지 팀원들은 같았다. 남자와 주호현을 환영하는 우한세와 우하윤, 신연형, 팀장 놈. 예성우, 박가인……. 그리고 저 뒤에 멀찌감치 서서 뚱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는 지금보다 앳된 얼굴의 한서진까지.
신연형을 보자마자 드는 좆같은 기분에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저 씨발 새끼, 죽였어야 하는데.
‘이제 또 지랄하겠군.’
그들이 주호현을 어떻게 대하는지는 이미 내가 겪어 알고 있었기에 앞으로 보기 싫은 기억들만 이어지리라 예상했다. 하지만 내 예상과 달리 이어지는 장면 속에서 주호현은 팀원들과 이상하리만큼 잘 지냈다. 숙소에서, 임무에 나가서, 던전에서.
기억은 장면만 보여 줬기에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입 모양으로도 읽히도록 형, 형 하며 따라다니는 우한세와 말없이 주호현의 옆에 서서 옷자락을 잡고 있는 우하윤. 신연형은 주호현과 마주치는 일이 적었지만 별달리 폭력적인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 모든 순간에 주호현의 곁에는 항상 그 남자가 있었다.
뚝뚝 끊겨 이어지지 않는 짤막짤막한 기억들의 편린들이었지만 의심할 여지없이 주호현은 팀원들을 의지하고 있었다.
‘지금이랑 너무 다르잖아…….’
서서히 눈앞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펼쳐진 광경은 지금까지와 다르게 입체적인 것이었다. 화면에 존재하던 좀 전과 달리 대상들이 어둡고 불투명한, 실제 크기로 현시되었다.
-으아아아아악!
귀를 찢을 듯한 고음에 여태껏 방관자적인 태도로 관망하던 내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내게 등을 보인 채 주저앉은 주호현이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며 울부짖고 있었다. 주호현이 끌어안은 몸의 팔과 다리가 힘없이 축 늘어져 있었다.
그쪽으로 다가가 품에 안긴 사람이 누군지 확인했다. 주호현 기억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그 가이드였다. 주호현이 얼마나 그 남자를 의지하고 있었는지 알았기에, 주호현의 어깨 너머로 그의 얼굴을 본 순간 이게 현실이 아님을 알면서도 심장이 철렁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어둠 속에서 하나둘씩 달려 나온 팀원들이 나를 통과해 주호현에게 달려갔다.
-수윤 형!!
-히익……. 어, 어떡해…….
-주호현! 이 미친 새끼. 무슨 짓을 한 거야?’
-살려 내! 우리 형 살려 내란 말이야!
예성우는 심장을 부여잡고 주저앉았고 우한세는 버럭버럭 소리 질렀다. 최재희가 급히 남자의 시체를 안아 들었다.
주호현 역시 충격에 제정신이 아니었는데도 그것은 보이지 않는지 모두가 주호현에게 해명을 요구했다. 상황을 묻던 것이 책임을 묻는 것으로 변한 건 순식간이었다.
“난리 났네…….”
그 신파를 뒤로한 채 차근히 주위를 둘러봤다. 시스템이 갑자기 보여 주던 기억을 전환시킨 것에는 뭔가 이유가 있을 게 분명했다. 하지만 주호현과 놈들이 있는 곳 외에는 어둠으로 뒤덮인 상태였다.
“칫, 치사하게. 어딘지 안 알려 주겠다 이거지. 필드에는 약한데…….”
어쩔 수 없이 시끄러운 곳으로 다가갔다.
팀장에게 주먹으로 얻어맞고 옆으로 날아가 쓰러진 주호현 대신 그 자리에 있던 흔적들을 살폈다. 거친 바닥에는 주호현과 남자의 피로 흥건하게 피 웅덩이가 만들어져 있었다. 내팽개쳐진 총기들과 싸구려 포션. 인상을 쓰고 지나치려는데 난장판 사이에서 뭔가가 반짝 했다. 유심히 살피자 무너진 잔해 틈새에서 하얗게 빛나는 새끼 양이 빠져나오려 발을 버둥대고 있었다.
“양……?”
홀린 듯 그 앞으로 다가갔다. 반투명하고 실제보다 작은 것이……. 이 또한 시스템의 환영일까? 신기하게 바라보던 중 양이 번쩍 고개를 들었다. 버둥대는 모습이 불쌍하긴 했으나 쉽사리 손을 대지 못하는데 갑자기 표정이 확 바뀐 양이 내 바짓가랑이를 물었다.
“뭐. 임마.”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양을 붙잡았다. 복슬복슬해 보이는 것과 달리 손에 잡히는 느낌은 평범했다. 힘을 줘 잡아당기자 드디어 새끼 양이 잔해에서 빠져나왔다.
처음엔 다리를 부들부들 떨며 비틀대던 새끼 양은 곧 내 주위를 돌며 머리로 다리를 박아 댔다. 귀찮아서 발로 양을 밀어내자 놀이라도 하는 것처럼 그를 피해 펄쩍펄쩍 뛰놀았다.
그러던 새끼 양이 어느 순간 갑자기 허겁지겁 다리를 굽혀 내 다리 사이로 몸을 숨겼다.
“왜 그래?”
다리 사이로 빼꼼 고개를 내민 양의 시선이 향한 곳에는 예성우가 있었다. 그는 주위를 돌아다니며 뭔갈 찾고 있었다. 양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쟤가 무서워?”
콩. 새끼 양이 다리에 머리를 박았다. 이쪽으로 다가오는 예성우를 바라보다 허리를 숙여 양을 들어 올렸다.
“난 금방 가야 돼. 그래도 그 전에 다른 데라도 숨겨……. 숨을 만한 곳이 없는데. 뭐? 못 데려가, 임마. 물지 마. 먹는 거 아니야.”
가야 한다는 말을 하자마자 옷을 잡아 뜯는 새끼 양을 떼어 놓으려 두 팔을 멀리 뻗었다가 손가락까지 물릴 것 같아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러자 신나서 제 자리에서 몇 번 점프하던 새끼 양이 내게 다가와 또다시 다리에 쿵 머리를 박았다. 여태까지와는 다른 세기에 움찔하는 사이 양의 모습이 쑥 사라져 버렸다.
“어라?”
이리저리 둘러봤지만 양은 온데간데없이 자취를 감춘 채였다. 시스템의 짓이라면 이상할 것도 없었지만 방금 전까지 귀찮게 하던 게 갑자기 사라지니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지루한 신파극은 주호현이 실신해 쓰러지며 끝을 맺었다. 그와 함께 눈앞의 광경들도 서서히 흐릿해지기 시작했다. 여기서 더 궁금한 것도 없어 그대로 사라지는 이들의 모습을 바라보는데 누군가 주호현에게 속삭이는 목소리가 내게 들려왔다.
-네가 죽인 거야. 대신 죽었어야지.
‘뭐야? 좆 까.’
누가 말한 건지 자리에서 일어나 주위를 둘러봤다. 이미 거의 다 사라진 상태라 목소리마저도 흐릿해서 그 말을 한 범인은 알 수 없었다. 혼자 남은 공간을 짜증스레 둘러보던 중 띠링 하는 소리와 함께 시스템창이 떴다.
더 이상 볼 수 없습니다. 퀘스트를 진행해 주십시오.
더 볼 생각도 없었네요. 투덜거리던 사이 약이라도 먹은 듯 정신이 빠르게 아득해졌다. 눈을 감음과 동시에 나는 이공간에서 쫓겨나 침대 위에서 경련하며 눈을 떴다.
“……하.”
멍하니 누워 눈을 깜빡였다.
레시피를 획득하거나 던전에 들어갈 때 등 영상이 눈앞에 그려지는 경우는 자주 있었으나 이번처럼 내 정신이 시스템의 공간으로 이동한 적은 처음이었다. 단순히 뭔가를 본 게 아니라 강제로 머리에 집어넣어져 그런지 비교 되지 않을 정도로 정신이 피로했다.
멍하니 누워 시스템과 있었던 일을 되새기던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중얼거렸다.
“퀘스트.”
곧바로 눈앞에 반투명한 황금색 창이 떠올랐다.
{ 메인 퀘스트 }
#1. 주호현의 사인을 밝혀라.
난이도 : A
제한 시간 : 29일 3시간 56분
보상 : 중급 스킬 회복(특수/S급/SS급 제외)
실패 시 퀘스트·스킬 영구 삭제
벌써부터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쳇. 치사하게…….”
그래도 상태창과 달리 눈앞에 가시화된 시스템창이 반갑긴 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이 들어 몸을 일으키며 소리쳤다.
“상태창!”
「열람 자격이 없습니다.」
“……그럼 그렇지.”
짜증스레 침대를 쾅 치는데 철컥 하고 문고리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한서진?”
그러나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은 우하윤이었다.
뜻밖의 얼굴에 눈을 크게 뜨고 바라보자 우하윤이 바깥을 고갯짓하며 말했다.
“나와. 너 불러.”
그제야 지금 내가 신연형과의 일 이후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한 상태라는 것을 인지했다.
나를 부른다고? 그냥 넘어가지 않을 게 뻔했다. 수많은 생각들이 머리에 스쳐갔다.
‘씨발 내가 뭘 잘못했는데! 그냥 그 새끼 미친 변태 새끼라고 말…….’
‘아니야. 신연형 그 새끼가 가만히 있을 리가 없어. 팀원 놈들도 못 믿어.’
‘……그럼 한서진한테라도 말하면?’
‘방금 주호현의 기억을 봤잖아. 한서진이 도와줄 리가 없어.’
주호현의 모든 기억에서 한서진은 항상 가장 멀리서 무관심하게 서 있었다. 아니면 아예 자리를 비워 보이지 않거나. 지금은 무슨 변덕인지 몰라도 이 팀원들 중엔 믿을 놈 하나 없다는 생각만 들었다.
‘의리 없는 새끼들. 전엔 그렇게 친한 척했으면서.’
결국 시선은 저절로 창문 쪽을 향했다.
‘……튈까?’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거 알았다. 아무런 장비나 아이템도 없는데 전투에 특화된 에스퍼들에게서 도망칠 수 있을 리가.
결국 난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한서진은?”
“아직 안 왔어. 개인 임무.”
한서진이 안 왔다고? 그럼 누가 날 방에 옮긴 거지? 주위를 둘러보는데 우하윤의 얼굴에 순간 귀찮다는 감정이 스친 것을 봤다. 설마 하며 바라보자 우하윤이 짜증스레 말하며 등을 돌렸다.
“네가 내 방 앞에 쓰러졌잖아. 문도 안 열리게. 걱정해서 데려다 놓은 거 아니니까 착각하지 마.”
“…….”
“맞는 게 취향이면 더 버티다 나오던가. 난 말 전했어.”
우하윤이 그대로 등을 돌려 방을 나갔다.
우한세 동생 아니랄까 봐 말하는 싸가지 하고는…….
나가고 싶지 않아 다시 드러누우려는데 자기를 잊고 있냐는 듯 눈앞에 퀘스트창이 멋대로 떠올랐다.
{ 메인 퀘스트 }
#1. 주호현의 사인을 밝혀라.
“나랑 상관없…….”
보상 : 중급 스킬 회복(특수/S급/SS급 제외)
“천천히 할 거야.”
제한 시간 : 29일 3시간 49분
“……아이씨.”
분명 퀘스트창이 떠오를 뿐인데 왜 내게 말이라도 거는 것처럼 느껴지는지. 결국 벌떡 일어나 침대를 벗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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