엑스트라 파업 선언 28.
대체 ‘그런 눈’이 뭔지 옆의 유리창에 얼굴을 비쳐 보는 사이 한서진의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할아버지가 에스퍼 협회장이에요.”
“……뭐?”
“여긴 제가 서울 센터로 발령받은 후에 따로 주신 집이고. 지금까진 딱히 필요 없다고 생각해 팀 숙소에서 지냈어요.”
생각지도 못한 말에 놀라 황당하게 바라봤다. 협회장이 여기서 왜 나와?
헌터인 나와는 거리가 멀다 해도 에스퍼 협회장이 어떤 무게를 지닌 자리인 줄은 알았다.
“협회장이면 센터보다도 위에 있는 거 아니야? 센터가 결국 협회에서 관리하는 거잖아.”
“구조상은 그렇지만 그렇게 쉽게 설명되는 형태는 아니에요.”
“그럼 너는…….”
금수저? 아니, 다이아수저?
그러나 석연치 않은 점들이 많았다. 특히나 팀원들의 태도가.
협회장의 손자라기엔 그를 대하는 우한세나 팀장의 행동이 너무 막 나가는 것 아닌가? 게다가 국가의 개나 다름없는 에스퍼팀에 제 손자를 보낸다고? 자고로 모든 권력은 제 혈육을 힘든 일에서 제하는 데부터 시작하는 법인데.
“너 팀에는 왜 있냐? 할아버지가 안 빼 줘? 팀원들은 너 막 대하던데 협회장 손자인 거 몰라?”
“……의무 복무 기간은 필수로 채워야 해요. 그리고 팀원들은 당연히 모르죠.”
“왜 몰라?”
“말 안 했으니까요.”
“왜 말 안 했는, 읍, 으읍!!”
한서진이 옆에 있던 장갑을 들어 내 입을 막았다. 나도 모르게 물었다가 질깃한 감각을 느끼고 급히 뱉었다.
“퉤엣, 아, 더럽게!”
“이만 올라가요. 늦었어.”
장갑은 사라졌지만 남아 있는 개 같은 느낌에 혀를 내두르며 먼저 올라가는 한서진의 뒤를 따랐다.
넓게 트여 있는 아래와는 달리 위층은 여러 개의 방이 있었다. 한서진은 몇 개의 방을 지나쳐 가장 안쪽의 큰 방으로 들어갔다.
한서진이 서랍이며 옷장을 이리저리 헤집더니 복슬복슬한 수건과 잘 개어진 옷가지를 주고는 안의 욕실을 턱짓하며 말했다.
“저기가 욕실이에요. 씻고 나와요.”
“어. 오늘은 여기서 자고 내일 가는 거야?”
내 물음에 가만히 바라보던 한서진이 고개를 저었다.
“신연형 일 처리될 때까지는 계속 여기 있을 거예요.”
“나 휴대폰 안 들고 왔는데.”
“내가 여기 있는데 휴대폰이 왜 필요한데요.”
“연승연한테 연락해야 해.”
“……형이 걔한테 연락을 왜 하는데.”
“그걸 내가 너한테 말해 줘야 하냐?”
의아하게 묻자 한서진의 눈썹이 꿈틀하더니 곧 홱 등을 돌렸다.
“새것 아무거나 줄 테니까 일단 들어가요. 번호 모르면 어쩔 수 없는 거고.”
“번호 알아. 고맙다.”
“…….”
***
몸의 물기를 닦고 샤워 부스 바깥으로 나왔다. 속옷을 입고 조금 넉넉한 티까지 주워 입고 나자 남은 게 없었다.
“뭐야. 바지 어디 감.”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는 바지에 한서진을 부르려 문을 여는데 처음 듣는 고압적인 음성이 흘러들어 왔다.
“……다고? 너무 늦어. 새벽이라도 괜찮으니까 하나 보내. 주소는 알지?”
뭐지? 뭘 보내?
바지 달라고 부르려던 것도 잊고 호기심 가득히 밖을 내다봤다. 문에 몸을 기댄 탓에 끼이익 하고 밀리는 소리가 나 버렸다.
“……메시지로 남길게. 끊어.”
흘깃 내가 있는 쪽을 바라본 한서진이 상대에게 대충 답하곤 전화를 끊었다.
“다 씻었어요?”
“응. 누구 와?”
목만 빼꼼 내밀고 묻자 한서진의 시선이 서서히 내려가 내 목 부근에 머물렀다.
“힐러 불렀어요.”
“힐러?”
본능적인 거부감에 표정이 파삭 구겨졌다. 한서진이 대체 왜 힐러 따위를 찾지 생각하는데 내게로 뻗어진 하얗고 긴 손끝이 내 목 부근에 닿았다.
“치료해야 할 거 아냐.”
살짝 닿았던 손끝이 목선을 부드럽게 스쳐 내려왔다. 울대 아래를 덧그리는 엄지의 움직임이 간지러워 파드득 몸을 떨며 손을 쳐 냈다.
“뭐, 뭐. 나?”
“네. 멍 심하게 들었어요. 안쪽이 더 상했을 텐데.”
“무슨 이런 것 가지고 힐러를. 이럴 땐 그냥 포션 하나 딱, 마시고 푹 자면 낫는 거야!”
“포션 가지고 안 돼요. 그냥 힐러한테 힐받아요. 새벽에 도착할 거니까…….”
“싫어!”
문을 벌컥 열고 나가자 한서진이 당황해 뒷걸음질 쳤다. 한서진의 얼굴이 순식간에 분홍빛으로 달아올랐다.
“형, 왜 그런…….”
화가 나 흥분한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포션 메이커로서 평생을 힐러와 비교당하며 살았다. 심지어 내 포션이 더 효과가 좋은 증거를 보여 줘도 그냥 빛 좀 나고 신기하다는 이유만으로 힐러, 힐러, 힐러!!
그런 내게 힐을 받으라니 저런 모욕은 참을 수 없었다.
“그 말, 당장 취소해, 당장!!”
얼굴을 반대로 돌린 한서진은 손을 내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알았으니까!!”
“진짜지. 바로 취소해. 불러 봤자 난 힐러 치료 절대 안 받아.”
“제발 들어가서 옷이나 마저 입고 나와요.”
얼굴을 쓸어내리며 뱉은 한서진의 말에 그제야 처음 한서진을 찾았던 이유가 떠오른 나는 밑을 바라보며 말했다.
“맞다, 바지 안 줬어.”
“하…… 잠깐만 기다려요.”
다시 돌아온 한서진은 바지와 함께 옅은 김이 나는 머그컵을 들고 왔다. 내게 날아온 바지를 가볍게 잡아채자 한서진이 눈을 가느스름히 뜨고는 가늠하듯 바라보며 말했다.
“손님이 온 적이 없어서 제 바지밖에 없어요. 길면 접어서 입어요.”
“웃기네. 길기는? 작지나 않으면 다행이다.”
내 키가 185인데. 코웃음 친 나는 보란 듯 다리를 꿰어 넣었다. 하지만 보기와는 달리 바지가 조금, 아주 조금 길었다. 생각과는 다른 길이에 당황해 허리를 추어올렸지만 달라지는 건 없었다.
“……이씨.”
결국 발등 반절을 덮은 바짓단을 애써 모른 척하며 욕실 밖으로 나가자 한서진의 시선이 내 발치로 향했다.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길어 보이는데.”
“아니야. 딱 맞아.”
목소리에 왜인지 웃음기가 섞인 것 같아 뾰족하게 답하자 한서진이 제 손에 든 머그컵을 건넸다.
“뭐, 그런 셈 치고. 여기, 받아요.”
“뭐야? 우유?”
따듯한 머그컵 안에는 하얀 액체가 담겨 있었다. 코를 대고 킁킁대자 따듯한 김이 코를 촉촉이 적셨다.
“……나야. 힐러는 안 보내도 된다고. 어. 대신 괜찮은 포션 있으면 하나 보내 둬. 치유 계열로.”
웬 우유냐고 묻기도 전에 한서진은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었다.
원래 우유를 그냥 먹나? 빵이랑 같이 먹거나 아니면 뭘 타 먹기나 했지 그냥 먹어 본 기억은 없는 것 같은데. 의아함에 고개를 갸웃하고는 의심 가득한 표정으로 우유를 조금 홀짝였다. 혀 끝에 닿은 예상치 못한 달콤함에 눈이 번쩍 뜨였다.
“달잖아?”
나도 모르게 중얼거리자 한서진의 시선이 내게로 향했다. 내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로까지 들린 건지 곧 반대편에서 시끄러운 소리로 뭐라 소리쳤다.
귀가 아픈지 휴대폰을 제 귀에서 멀리 떨어트려 놓은 한서진이 짜증을 감추지 못하고 제 관자놀이를 매만졌다.
“잘못 들은 거야. 누구면 박무일 네가 어쩌게?”
[…! ……!!]
“시끄러워. 귀찮게 할 생각 말고 신경 꺼. 끊는다.”
반대쪽에서는 아직도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왔지만 한서진은 가차 없이 전화를 끊어 버렸다.
“누구야?”
“그냥 아는 사람이요.”
대충 답한 한서진은 우유를 마시는 날 빤히 바라보더니 말했다.
“천천히 마셔요.”
“응. 근데 이거 우유 맞아? 왜 이렇게 달지?”
“그냥 우유 주면 안 먹을 것 같아서 꿀 탔는데. 왜, 별로예요?”
꽤나 마음에 들었기에 다시 입에 가져가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맛있어. 내일도 해 줘.”
“…….”
돌아오지 않는 답에 의아하게 앞을 바라보니 얼굴을 크게 쓸어내리는 한서진의 귀 끝이 붉어져 있었다.
“야, 너…….”
“매일 해 줄 수 있어요.”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로 답한 한서진은 그대로 욕실로 직행했다.
문이 닫히고 혼자 남은 나는 그제야 한서진이 사라진 쪽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왜 저러는데……?”
곧 욕실에서 물소리가 들려왔다. 그 사이 나는 침대에 드러누워 발끝을 까딱이며 고민했다.
뭐가 되었든 지금이 기회였다. 신연형을 스리슬쩍 포션으로 조질 기회.
‘어떤 게 좋으려나…….’
내일 연승연에게 지시할 내용들을 머릿속으로 정리하는데 욕실 문이 열렸다. 다 씻었는지 머리가 젖은 채 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한서진이 밖으로 나왔다. 마침 잘됐다 싶어 한서진을 불렀다.
“한서진. 나 휴대폰 줘.”
“내일 줄게요. 창고 가서 찾아봐야 해요.”
“지금 문자해야 하는데.”
한서진이 테이블에 올려 뒀던 제 휴대폰을 휙 던졌다.
“급한 거면 일단 이걸로 보내요.”
“엉. 고맙다.”
휴대폰으로 연승연에게 문자를 보내는 날 바라보던 한서진이 비뚤게 물었다.
“제 번호는 알아요?”
“어?”
“팀원 번호는 모르면서 외부인 번호는 잘만 외우고 다니네.”
“왜 또 시비야.”
문자를 전송한 후 보낸 내역으로 들어가 곧바로 기록을 삭제하며 말했다.
“팀원이라 저장되어 있어서 안 외운 거지. 어차피 한 번 보면 외울 거, 뭐가 중요하다고……. 지금도 뒷자리만 빼고 대강 기억나. 삼이었나 사였나?”
“……삼이요.”
“어. 외울게.”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이던 나는 내 옆에 눕는 한서진을 황당하게 돌아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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