엑스트라 파업 선언 32.
두 손주의 대치에 협회장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는 것을 본 한서현이 속으로 한숨을 삼키며 경고했다.
“둘 다 할아버님 앞에서 뭐 하는 짓들이야. 한서노, 앉아.”
“…….”
한서진은 더 말을 섞기 싫다는 듯 고개를 돌렸고 한서노 역시 큰 소리를 내며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네 사람이 앉은 방에는 묘한 침묵이 감돌았다. 정적을 깨트린 건 협회장이었다.
“서진아.”
“예. 할아버님.”
“너도 이제 의무 복무가 끝나 가는데 슬슬 각인 준비를 해야지.”
“…….”
“내 사실 너와 잘 어울리는 아이들이 몇 있어 따로 알아 두었다. 실력도 좋고 집안도 좋은 아이들이야. 면식 있는 아이도 있다 들었고. 분명 네 마음에도 들게다.”
“할아버님.”
“곧바로는 아니더라도 각인한 가이드는 있어야 하잖느냐. 가이딩 포션도 그른 마당에 더 지체할 수는 없지. 이미 다른 집안들은 소식 듣자마자 움직이고 있어.”
무릎 위에 둔 주먹이 꽉 쥐어졌다.
협회장의 말에 틀린 건 없었다. 의무 복무 기간이 끝나면 정예 부대로 소속이 변경된다. 그땐 지금과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임무 난이도가 높아지기에 각인한 페어 가이드가 필수였다.
‘그나마 가이딩 포션만 있다면 혼자서도 괜찮았겠지만…….’
포션을 만들 수 있는 유일한 제작자인 강의진이 죽었으니 이제 다른 방법은 없었다.
제 폭주 수치를 제어할 수 있는 가이드는 적어도 A급.
‘C급으로는 한참 부족해.’
왜 이제 와 주호현이 생각나는지, 그의 등급이 낮은 게 왜 이렇게 아쉽게 느껴지는지는 모를 일이었다. 어차피 제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아주 예전부터 당연히 정해진 일.
한서진은 내키지 않는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염려하실 필요 없습니다.”
“염려라니. 처음부터 걱정하지도 않았다. 네가 누구인데. 하하핫!”
협회장이 만족스럽게 큰 웃음을 터트리자 앞에 앉은 한서노가 이를 갈며 노려봤다. 눈 하나 깜짝 안 한 한서진은 곧바로 협회장을 바라보며 말했다.
“부탁드릴 것이 있습니다. 할아버지.”
할아버님도 아닌 할아버지 소리에 협회장의 눈이 크게 뜨이더니 표정이 흐물흐물 풀어졌다. 그리곤 한껏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손주 부탁인데 뭐든 들어줘야지. 그래. 부탁이 무어냐.”
“복무 기간을 단축하고 싶습니다.”
“음……?”
뜻밖의 말에 협회장과 한서현, 한서노 모두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한서진은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반절 정도까지, 줄일 수 있겠죠.”
“그건…….”
“부탁드립니다. 할아버지.”
가장 아끼는 손주의 부탁을 거절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것도 딱딱한 녀석의 입에서 귀한 할아버지 소리까지 들은 마당에야.
협회장의 호출에 급히 비서가 불려왔다. 비서는 의무 복무 기간을 단축할 수 있겠냐는 물음에 잠시 당황하더니 곧 이리저리 전화하며 알아보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결국 방법을 찾아 왔다.
“네. 가능합니다. 하지만 다른 잡음이 생기지 않게 하기 위해선 서진 님께서 실적을 올려야 합니다만……. 지금보다 배는 일정이 바빠지실 건데 괜찮으십니까?”
“서진아. 어쩔 테냐.”
지금도 충분히 바쁜 상태였다. 주호현도 겨우 밤에나 만나는 상황에서 더 바빠진다니 머리가 지끈거렸다.
당연히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하는 수 없었다. 한서진이 마뜩잖은 낯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비서가 물러가고 한서진 역시 시간을 확인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도 이만 일어나 보겠습니다.”
“그래. 바쁜데 오래 붙잡아 미안하구나. 어서 가 보거라.”
“오시면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협회장에게 꾸벅 인사한 한서진은 한서노를 지나쳐 그대로 문을 열고 나갔다.
“야! 야, 한서진!”
닫히는 엘리베이터 문 사이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곧 다시 문이 열리더니 한서현이 쏙 몸을 던져 들어왔다.
“나 오는 거 알고 있었으면서. 내가 안 불렀으면 그냥 가려고 했지?”
침묵에 담긴 긍정에 한서현이 한서진을 흘겼다.
“이 자식이……. 대체 너 뭐야?”
“뭐가.”
“뭐긴, 각인하자는 말엔 그렇게 똥 씹은 표정으로 바라보더니 무슨 바람이 들어서 조기 수료를 하려느냐고. 마음이 바뀐 거야?”
“누나까지 왜 이래. 각인할 생각 없다는 거 알고 있잖아.”
“네 생각이 뭐가 중요해. 어쨌든 하긴 해야 하는 걸. 그사이 현실을 받아들인 줄 알았지.”
한서현의 말에 피식 웃은 한서진은 마침 일 층에 도착해 열리는 문 밖으로 발을 옮기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냥. 좀 쉬고 싶어서.”
“……겨우 그거? 그거 때문에 세 달이나 앞당긴다고?”
황당한 물음에도 한서진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외국 나갈 거야. 누나 전세기 있던가?”
“있……지? 그건 갑자기 왜. 빌려 달라고? 어디 가게?”
“바다가 보이는 쪽이 좋을 것 같아. 아니, 물을 좋아하는 건가. 그럼 베네치아…….”
살짝 핀트가 나간 주제에 가만히 듣고 있던 한서현이 제 귀를 의심하며 손을 내저었다.
“잠깐, 잠깐잠깐. 너 설마 그 가이드 얘기하는 거야? C급이라는? 같이 가려고?”
한서진은 묵비권을 행사했다. 한서현이 경악해 소리쳤지만 한서진은 답 없이 앞서 나갔다.
“야!!”
그러거나 말거나 한서진의 머릿속에선 이미 바다를 보고 신나서 뛰는 주호현만이 남아 있었다.
“삼 개월 후엔…….”
***
“당연히 도망가야지!”
주호현의 목소리가 연구실을 울렸다. 막 배달 온 재료를 정리하다 놀란 연승연은 어깨를 흠칫 떨며 고개를 들다, 곧 그게 앞으로 어떻게 할 생각이냐는 제 질문에 대한 답이라는 것을 알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조심스럽게 제 마음을 담아 말했다.
“저, 저도 함께……. 갈 준비할게요. 혹시 시일은 얼마나 예상하고 계세요?”
메인 퀘스트를 떠올리며 대강 가늠하던 주호현이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한, 삼 개월?”
완벽한 동상이몽이었다.
***
무언가가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재료 추가
►제조
두 가지 선택지가 떠올랐다. 고민도 없이 선택했다.
“제조.”
행운의 신이 고개를 돌렸습니다.
정말 (제조) 진행하시겠습니까?
“아, 한다니까!!”
짜증 내며 답하자마자 상태창이 사라지며 내 앞에서 부글부글 끓던 냄비가 큰 소리와 함께 펑 터졌다. 그리고 눈앞에 놀리는 듯한 상태창이 떠올랐다.
이루 말할 수 없이 끔찍한 것을 만들어 냈습니다!
명성이 10 깎입니다.
“아악! 씨발!!”
“호, 호현 님… 괜찮으세요?”
터진 냄비 안에서 매캐한 연기가 흘러나왔다. 급히 코를 막고 내 곁으로 다가온 연승연이 환풍기 아이템을 가동하고 흘러넘친 액체를 수습하려 애썼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냄비를 노려본 채 주먹을 꾹 쥐었다.
실패, 실패, 실패 또 실패!!
연승연에게 당당히 재료를 준비하라고 했던 것이 무색하게도 지금까지 포션 제조를 몇 번이나 실패해 냄비를 폭발시켜 버렸다. 그도 그럴 게, 어떻게 잊고 있었지 싶게도 현재 나는 겨우 하급 스킬만 보유한 상태였다. 거세 포션에 들어가는 재료들이 상급이다 보니 조절을 잘 한다 해도 하급 스킬로 다루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실패할 때마다 명성은 계속 깎이고 깎여 원래부터 두 자릿수였던 주호현의 명성은 지금 마이너스에 치닫고 있었다. 실패를 알리는 시스템창을 처음 보는 건 아니었다. 그러나 까다로운 포션도 아니고 별 같잖은 것을 만드는데 연속해서 실패하자 답답함에 열불이 났다.
‘성공 확률 30%면 세 번에 한 번은 성공해야 하는 거 아니야?’
물론 아니었다. 시스템이 말하는 30%같이 낮은 퍼센트는 될 때까지 도전해 보라는 의미가 아니라 못하니까 포기하라는 소리였으니까. 하지만 이런 초짜 같은 생각이 들 정도로 짜증이 났다. 자존심이 상하다 못해 비관적인 생각마저 들었다.
‘혹시 퀘스트를 성공 못 하면? 그럼 평생을 이렇게 하급 스킬만 가지고…….’
상상만 해도 좆같은 가정에 정신이 혼미해졌다.
“……발 ……같게…….”
고개를 푹 숙이고 욕을 짓씹는데 꾹 쥔 주먹 위로 바들바들 떨리는 손이 얹혔다. 옆을 돌아보자 연승연이 뭐 마려운 개새끼처럼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호현 님……. 잠시 휴, 휴식을 취하셨다 다시 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이러다 탈진하세요.”
“아니야. 다시 하자. 아직 재료 남았지?”
대강 정리된 실험대를 둘러보며 재료가 있는 쪽으로 향하자 눈을 질끈 감은 연승연이 두 팔을 벌리고 내 앞을 막아섰다.
“안 돼요!”
“……뭐야. 나와.”
“세 번 제작하면 삼십 분 쉬기가 원칙입니다! 그런데 호현 님은 벌써 여덟 번을…….”
한쪽을 가리키며 말하는 연승연을 따라 시선을 돌리자 벽에 안전 캠페인 포스터가 붙어 있었다.
연구실엔 손 씻고 들어가기. 세 번 제작 후엔 삼십 분 휴식. 환기를 철저히 등……. 안전한 연구 작업을 위한 수칙들 같았다. 그를 가리키는 연승연 역시 더 이상 물러날 수 없다는 듯 단호한 표정이었다.
‘연승연 성격에 여덟 번이면 많이 참긴 했지…….’
이러다 또 정제수를 주니 마니 협박할 걸 생각하니 귀찮아져서 결국 연승연이 이끄는 대로 연구실의 간이침대 위에 머리를 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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