엑스트라 파업 선언 34.
“아, 평화롭다.”
칼같이 여섯 시 오 분 전에 걸려 온 한서진의 전화에 설렁설렁 밖으로 나갔다. 하루 종일 실험하느라 진이 빠진 연승연이 다리를 후들대며 따라 나왔다.
“호현 님 오늘 고생 많으셨습니다…….”
“됐다니까 왜 나왔어? 가서 쉬어. 내일도 고생해야지.”
“네……. 그래도 정문까지만…….”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로비로 나가자 사람들의 시선이 모인 곳에 한서진이 서 있었다. 시계를 보는 한서진의 반대편 손에 분홍색 종이봉투가 들려 있었다.
“호혀…….”
“그럼 나 간다! 야, 한서진!”
이름을 부르며 달려가자 한서진이 발을 떼며 말했다.
“안 늦었네요. 가요.”
힐끔 내가 달려온 쪽에 시선을 둔 한서진이 비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이제는 익숙해진 조수석에 올라타자 한서진이 내 품에 종이봉투를 던지듯 안겼다.
“뭔데?”
“오다 주웠어요.”
“주운 걸 나한테 왜 줘? 쓰레기는 네가 직접 버…… 읍, 웁……! 뭐야?”
갑자기 입을 막는 한서진의 손을 내팽개쳤다.
“하아, ……한테 무슨 기대를…….”
한서진은 한숨 쉬며 열어 보라 턱짓했다. 리본을 풀자마자 갓 구운 빵 냄새가 흘러나와 안을 들여다보니 윤기 나는 과일들이 올라간 타르트가 몇 개나 들어 있었다.
“웬 타르트?”
“선물 받았어요.”
“나 먹으라고 주는 거야?”
한서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다 중얼거리고는 한입 크게 베어 무는데 타르트에서 가루가 바스스 떨어졌다.
“엇, 미안 엄청 흘렸어.”
“신경 쓰지 말고 먹어요. 관리 맡기면 되니까.”
전혀 개의치 않는 모습에 나 역시 편한 마음으로 마저 먹었다. 앞을 보며 운전하던 한서진이 말했다.
“그 연구원은 언제까지 만날 거예요?”
“언제까지랄 게 있나? 그냥 시간 날 때마다 보는 거지. 왜?”
이 재미없는 센터에서 그나마 포션과 관련 있는 사람이 연승연이니 당연한 일이었다. 한서진은 뭐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가이딩 연습 마저 해야죠. 이번 일 해결되면 형도 현장 임무에 합류해야 해요.”
“아, 현장…… 현장 나가야지.”
나가야지 예성우를 잡지.
주호현의 사인을 밝히란 퀘스트. 내 스킬을 돌려받기 위해선 반드시 깨야 했다. 그러나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조사는커녕 예성우를 마주치기도 어려웠다. 현장에 나가 살펴보는 수밖에. 게다가 시스템이 보여 준 환영도 현장이었으니까.
시스템도 아무 이유 없이 그 장면을 보여 준 것은 아니리란 직감이 들었다.
“현장에 신연형도 같이 나가냐?”
대수롭지 않은 물음을 뱉자마자 한서진이 급브레이크를 밟았다. 끼익하는 소리와 함께 거칠게 멈추는 차에 놀라 손잡이를 잡았다.
“야!!”
“신연형 만나는 일 없게 할 거니까, 너무 불안해하지 마요.”
“뭐……? 내가?”
누굴 불안해해? 오히려 만나고 싶은데.
황당히 되물었지만, 핸들 잡은 손을 몇 번 쥐었다 펴며 머뭇대던 한서진은 진지한 표정으로 마저 말했다.
“형, 이번 가이딩 사건 관련해 불려 갈 일 몇 번 있을 거예요. 이번 일은 최소로 쳐도 센터 이동이에요. 저는 개인 임무 때문에 같이 못 가도, 다른 사람 부를 테니까 그 사람이랑 꼭 같이 가요.”
“뭘, 귀찮게. 그냥 혼자 가도 돼.”
“말도 안 되는 소리 마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슬쩍 떠보니 곧바로 차가운 비난이 돌아왔다. 입을 삐죽대며 의자에 등을 푹 기댔다.
한서진의 말대로라면 재판이 끝난 후 신연형을 마주칠 일은 없단 소리였다. 그럼 내 복수는?
‘하루빨리 포션 제작을 성공해야 하는데…….’
실패한다는 가능성을 생각해 본 적조차 없었기에 오늘 일이 더욱 당황스럽게 다가왔다. 갑자기 생겨난 시간제한에 절로 표정이 굳는데 그를 본 한서진이 걱정스레 말했다.
“표정이 왜 그래. 무서워요? 가서 상황 설명만 하면 되니까 너무 부담 갖지 말고…….”
“아니? 난 무서워하는 거 없는데.”
뚱하니 대답하자 한서진은 믿지 않는 표정으로 대강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러겠죠. 어쨌든 절차상 일정일 뿐이니까. 걱정하는 일 없을 거야.”
“걱정 안 해. 그런데 너는 왜 같이 못 가?”
“일이 더 바빠질 것 같아서요.”
“지금도 바쁘다며. 더?”
“네.”
“힘들면 할아버지한테 빼 달라고 해.”
“안 힘들어요. 시간 금방 갈 텐데, 뭐.”
조금 웃으며 고갤 저은 한서진이 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오늘 집 가서는 함께 가이딩 연습해요.”
***
마주 보고 앉은 한서진이 제 허벅지 위에 손을 펼치고 툭툭 쳤다. 그 위에 손을 얹자 자연스럽게 손을 꼭 쥐고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어쩔 수 없이 몸을 당겨 앉자 가까워진 거리가 새삼스러웠다.
시선을 들어 날 바라보는 한서진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걸려 있었다.
“이제 조절은 할 줄 아네요.”
“당연하지.”
“감만 잡으면 방사 가이딩이 훨씬 쉬울 거예요. 위험성도 덜하고.”
“근데 꼭 방사 가이딩을 배워야 해? 현장이라 가이드들한테 위험해서 그런가?”
내 물음에 예상하지 못했다는 듯 잠시 빤히 바라보던 한서진이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반은 맞고 반은 틀려요. 현장이 위험하긴 하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접촉 가이딩은 필수 불가결해요. 방사 가이딩은 불특정 다수를 가이딩할 수 있는 만큼 가이딩 농도가 질적으로 떨어지거든. 방사 가이딩을 배워야 하는 건 형을 위해서예요.”
“나?”
“현장은 에스퍼의 폭주 위험성이 가장 높은 장소예요. 가이딩이 부족한 에스퍼들이 과하게 가이딩을 빼앗아 가는 일도 빈번하게 일어나고. ……접촉한 채로 버틸 수 있겠어요?”
한서진이 잡은 손을 꼭 쥐며 말했다.
하긴, 현장에선 한서진 외에 다른 놈들도 가이딩해야 한단 소리잖아? 위험하기도 위험한 거였지만 그는 차치하고 우한세나 팀장의 손을 잡고 가이딩할 생각만 해도 좆같았다. 우웩.
“빨리 해 보자, 가이딩! 근데 방사인데 왜 손잡고 해?”
아직도 꽉 잡고 놓지 않는 손을 바라보며 묻자 한서진이 뻔뻔한 낯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형이 한 번에 성공할 리가 없잖아요. 접촉 가이딩으로 가이딩 감각을 더 익…….”
“꺼져.”
잡은 손을 내팽개치고 한서진을 매섭게 노려봤다.
“내가 단번에 성공한다.”
“그래요. 그럼.”
어디 한번 해 보라는 듯 한서진이 뒤로 물러났다. 방금 전까지 잡고 있던 한서진의 손만 빤히 바라봤다.
호기롭게 말하긴 했지만……. 뭐 어떻게 하라는 건지.
신연형과의 사건 이후 처음 해 보는 가이딩이었다. 내가 가이딩을 빼앗기다 기절까지 했다는 게 꽤나 마음에 걸렸는지 한서진은 내게 단 한 번도 가이딩을 요구하지 않았으니까.
‘한서진의 말대로 일단 접촉부터 한다고 할 걸 그랬나.’
하지만 이미 뱉어 버린 말이 있으니 무를 순 없었다. 어떻게든 혼자 해 보려 눈을 감고 접촉할 때의 감각을 살리려는 순간 띠링 하는 청량한 소리가 귓가에 들렸다.
[강의진] ⇄ [주호현]
동기화된 상태입니다.
(진행률 20%)
‘뭐야?’
눈앞에 떠 있는 창을 놀란 눈으로 바라보는데 곧 시스템창이 제멋대로 바뀌기 시작했다.
스킬트리 적합화 중….
˚
[주호현]의 스킬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가이딩 가이드를 펼치시겠습니까?
►Y
►N
가이딩할 때 이런 게 뜬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는데. 이 또한 주호현과 동기화가 되어서일까? 고민 없이 예스를 누르자 이번엔 접촉 가이딩과 방사 가이딩 중 하나를 선택하라기에 방사 가이딩을 택했다.
<방사 가이딩>
►튜토리얼을 재생합니다.
►망하는 지름길! 넘기기?
말없이 시스템 창을 읽는 내가 한서진에게는 허공만 바라보는 것처럼 보였는지 의아한 표정으로 내게 다가왔다.
“형, 뭐 해요?”
“어어어?”
튜토리얼 따위나 보고 있을 시간이 없어 서둘러 넘기기를 눌렀다.
대상을 선택해 주세요. (다중 선택 가능)
-근처 에스퍼
►한서진
“한서진!”
“네. 여기 있어요. 형 정말 어디 아픈 건 아니죠?”
걱정스럽게 손을 뻗는 한서진의 머리 위로 타겟팅되었다는 표식이 반짝이며 둥둥 떠 있었다.
가이딩 총량 (194rp)
타겟 [한서진]에게 [___]rp로 가이딩한다.
‘전부.’
답하자마자 내 몸에서부터 좁쌀만 한 옅은 빛들이 몽글몽글 새어 나와 한서진을 향해 날아갔다. 그 빛이 한서진의 몸에 닿는 순간 한서진의 눈이 크게 뜨였다. 표정을 보자마자 내가 성공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형, 지금…… 어떻게…….”
“됐지! 가이딩되고 있지!!”
“……네. 되고 있어요.”
“내가 뭐랬어! 할 수 있다고 했잖아!”
일어나 펄쩍펄쩍 뛰었다. 가이딩 기운이 눈에 보인다. 게다가 패시브 스킬인데도 액티브 스킬처럼 시스템창으로 설정할 수 있게 되었다.
느낌, 감, 기운…… 등 두루뭉술한 추상적인 개념으로 가이딩을 배우던 전보다 몇 배는 편리했다. 가시적이고 확실한 시스템이 딱 내 취향이었다.
“가이딩 별거 아니네.”
팔짱 낀 채로 거들먹거리며 한서진을 내려다봤다. 뭐가 마음에 안 드는지 불만스러운 시선과 눈이 마주쳤다.
“……왜 축하 안 해 줘?”
예상과 다른 반응에 의아하게 묻자 결국 한서진의 표정이 허물어졌다. 자리에서 일어난 한서진이 웃으며 머리를 쓰다듬었다.
“잘했어요.”
“내가 누군데. 나 강……. 주호현이야.”
말실수할 뻔한 것을 급히 추스르며 우쭐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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