엑스트라 파업 선언 38.
“뭐 하는 거야!!”
“비싼 얼굴이라.”
성산하가 한쪽 눈을 찡긋했다. 어두운 와중에도 빛나는, 그림 같은 움직임을 멍하니 바라보던 나는 뒤늦게 성산하가 윙크했다는 것을 깨닫고 온 몸에 소름이 끼쳐 펄쩍 뛰었다.
“미, 미친 새끼야!”
“멍멍아. 예쁜 말 써야지.”
“씨발! 아니…, 그게 아니라……. 그, 그러니까 애초에 따라 들어오길 왜 따라 들어오냐고!”
또 이상한 명령을 시킬까봐 뒷걸음질 치며 말을 돌렸다. 성산하는 태연한 낯짝으로 어깨를 으쓱했다.
“……됐다. 말을 말자.”
신연형이 절망하는 모습을 볼 생각에 부풀었던 가슴이 푸시식 하고 꺼져 버렸다.
이번만 참자. 이번만……. 고개를 저으며 신연형에게 다가갔다.
대체 무슨 스킬을 쓴 건지 신연형은 얼굴에 미소를 지은 채 잠들어 있었다.
볼을 꽉 쥐어 입을 벌리게 한 뒤 포션을 거꾸로 뒤집어 쑤셔 넣었다. 신연형의 몸이 크게 꿈틀하더니 곧 포션이 들어 있던 병도 원래 비어 있었던 것처럼 투명해졌다.
모두 흡수됐지만 정신을 잃은 상태라 세 가지 중 어떤 효과가 나타났을지는 모르게 됐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잡았던 얼굴을 놓는데 뒤에서 성산하가 내 이름을 불렀다.
“멍멍아.”
부르지 마. 새끼야. 부르지 마.
귀찮음을 무릅쓰고 천천히 뒤를 돌아봤다. 역시나 예상했던 질문이 나왔다.
“포션은 어디서 구했지?”
“샀는데?”
“샀……다고?”
성산하의 목소리에 의심이 섞여 있음을 알았지만 대강 손을 흔들며 답했다.
“어. 어디서 샀는지 물어봐도 안 알려 줄 거니까 신경 꺼라.”
“…….”
빈 포션병을 바라보며 잠시 상념에 잠겼던 성산하는 금세 표정을 갈무리하고 다시 여유로운 가면을 썼다.
“끝났으면 이만 나가자. 이제 시간이 많지 않거든.”
병실을 나와 일 층으로 올라오기까지 나와 성산하는 별다른 말을 나누지 않았다. 차단봉을 바로 앞에 두고 우린 거의 동시에 발을 멈췄다. 앞의 모퉁이만 돌면 사람들이 많이 돌아다니는 곳이었다. 먼저 입을 연 건 성산하였다. 나를 돌아본 성산하가 상냥하게 물었다.
“입조심하란 말도 따로 해 줘야 할까?”
“꺼져.”
“우리 멍멍이가 내 생각보단 똑똑한 것 같아 다행이야.”
웃는 낯이 쓸데없게 아름다워 표정을 팍삭 구겼다. 성산하따위에게 저런 외형은 과분했다. 피부 질환을 일으키는 포션을 성산하에게 냅다 뿌리는 상상을 하며 홱 고개를 돌렸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이야. 좆같은 목줄도 차 줬으니까 네놈이나 아는 척 말고 머릿속에서 아주 지워 버리라고.”
“…….”
“간다. 다신 만나지 말자.”
가운데 손가락을 치켜올리고 그대로 등을 돌렸다.
***
떠나는 주호현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성산하의 옆으로 이초가 기척 없이 다가왔다.
“정말 이대로 보내도 되는 겁니까?”
“당장 납치, 감금할 수는 없잖아? 라이라프스의 목줄을 채워 뒀으니 한동안은 괜찮겠지.”
“진짜 닮긴 했던데…….”
“얼굴을 스캔할 때 다른 아이템 반응은 없었어. 토트의 눈이 파괴된 것이 조금 걸리긴 하지만.”
“그래도 영 찜찜합니다. 우연이라면 좋겠지만…… 혹시 성형은 아닐까요?”
“가슴이랑 허리 사이즈는 어떻게 설명할 건데. 오늘 보니까 하체랑 힙…….”
“아, 산하 님! 제가 잘못 했습니다.”
질겁하는 이초를 두고 성산하는 태연한 낯으로 주호현이 사라진 쪽을 바라봤다.
그래, 제가 순간 혹할 정도로 닮은 건 부정할 수 없었다. 그래서 더 거슬리고 불쾌했다. 강의진을 닮은 얼굴로, 닮은 행동을 할 때마다 멈칫하는 제 자신까지도.
-여기서 뭐 해? 우냐?
세상에 유일한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또 있을 리가 없었다.
‘만약 정말 의도하고 꾸며 낸 것이었다면…….’
성산하의 입꼬리가 비뚜름하게 올라갔다. 괜히 귀찮게 그의 목에 목줄을 건 게 아니었으니.
“다시 보는 일은 없는 편이 좋을텐데.”
마침 눈앞에 상태창이 떠올랐다.
「종속자 멍멍이(주호현)가 인지 범위를 벗어났습니다. 목줄의 효과가 사라집니다.」
***
내가 탄 셔틀이 센터 본부에서 어느 정도 멀어졌을 때, 눈앞에 시스템창이 떠올랐다.
「주인님이 보이지 않습니다. 목줄의 효과가 사라집니다.」
“꺼져. 재수없는 새끼. 천랑 망해라. 다시 보이기만 해 봐. 그땐 내가 아주……!”
시스템창을 향해 주먹질을 하자 셔틀에 타 있던 직원 몇이 이상하게 쳐다봤다. 어쩔 수 없이 입을 다물고 씩씩대며 화를 삭였다.
놈은 1km 제한 운운하며 내가 손해 보는 게 없다 말했지만 사실 그건 귓등으로 듣지도 않았다. 이미 두 번이나 내 앞에 나타나 헤집고 간 또라이를 믿으면 등신이지. 내가 믿는 구석은 따로 있었다.
‘퀘스트만 해결하고 바로 튄다. 센터 밖으로 도망치면 아무리 천랑 길드장이래도 어쩔 수 있겠어. 1km는 무슨, 그 사이 태제헌도 나오겠지. ……작업실 위치는 어디로 하지? 재료 수급이랑 판매가 원활하려면 역시 월계나루겠지. 주호현 통장은 추적당할 수도 있으니 미리 현금화해야겠고…….’
그렇게 내 작업실을 차리는 행복한 상상을 하며 집으로 갔다.
꼭대기 층에 도착해 한서진의 집 문을 여는데 평소와는 달리 내부가 밝았다.
“한서진?”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지만 안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집 안으로 들어가자 두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 자리 이미 비워 뒀어.”
“급할 거 없잖아. 아직 미궁 공략 중이면서.”
“거의 끝났지. 게다가 요즘 그 사이비 때문에 난리잖아…….”
다른 사람도 함께 있는 거였나. 어지간히 바쁜가 보네.
문까지 다가갔다가 다시 슬쩍 닫고 나오려는데 옆에 걸려 있던 액자가 어깨에 부딪히며 덜컹였다.
“……누구야!”
“잠깐.”
모르는 남자가 소리쳤고 뒤이어 한서진이 그의 어깨를 잡고 일어났다. 문이 완전히 열리며 한서진이 모습을 드러냈다.
“형. 언제 왔어요?”
“방금. 바쁘면 일 마저 해.”
한서진 뒤로 머리를 빼꼼 내밀자 안에 있는 사람과 눈이 마주쳤다. 놀란 얼굴로 입을 뻐끔대는 남자를 의아하게 바라보는데 한서진의 단호한 손길이 날 뒤로 잡아끌었다.
“아니요. 다 끝났어. 저 사람 이제 갈 거예요.”
“그래?”
“무슨 소리야! 아직……!”
뒤에서 들리는 소리를 무시한 한서진이 문을 닫았다.
“밥 안 먹었죠? 오늘은 밑에 레스토랑으로 내려가서 먹어요.”
“별로 배 안 고픈데.”
“그래도 먹긴 해야지. 또 밤에 배고프다고…….”
한서진의 말을 끊고 문이 쾅 소리를 내며 열렸다. 안에서 다급히 나온 남자가 사람 좋게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안녕하세요. 저는 서진이 친구 박무일입니다.”
“안녕. 난 가……. 주호현.”
한서진이 서늘한 눈으로 박무일을 노려봤지만 박무일은 허허 웃는 낯으로 우리에게 한 발짝 더 가까이 다가왔다.
“저녁 드시러 가나 봅니다. 마침 딱 저녁 먹기 좋을 시간이죠.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저도 함께 가도 될까요?”
“야. 박무…….”
“그러든가.”
“형!!”
날 부르는 한서진의 눈빛에 어린 서운함에 무슨 일 있냐고 물으려던 차에 박무일의 웃음소리가 우리 둘 사이를 갈랐다.
“으하하! 역시 쿨하시네요. 형님. 사실 처음 봤을 때 너무 잘생겨서 놀랐는데, 성격까지 좋으면 반칙 아닙니까?”
“그런 소리 자주 들어.”
“당연하죠. 오히려 실제보다 적게 들으실 걸요. 당연한 사실을 굳이 말로 꺼낼 필요는 없으니까.”
입꼬리가 씰룩댔다. 한서진은 꽤나 좋은 친구를 갖고 있는 것 같았다. 옆에서 맞는 말만 하는 박무일과 대화를 하며 뒤를 돌아봤다. 황당하게 바라보는 한서진의 모습에 고개를 기울이며 손을 까닥였다.
“뭐 해? 가자.”
“…….”
***
“와, 저는 이놈이 맨날 집에서 나오지도 않고 일 끝나고 어디 가냐고 물으면 집, 집, 집 거리길래 무슨 집에 꿀을 발라 놨나 했어요.”
“한서진 요즘 일 바빠지긴 했어.”
“에이, 그래도요. 얘 그 일 저랑 같이해요. 맞다, 그런데 형님. 생각보다 굉장히…….”
슬쩍 한서진의 눈치를 본 박무일이 웃으며 말했다.
“익숙해 보이네요. 사실 조금 놀랐어요.”
“익숙?”
“하하, 다른 의도가 있어서 하는 말은 아니고요. 정말 자연스러워서요. 약간 하급 가이드답지 않다고 해야 하나? 상석에 앉는 것도 그렇고 곱게 자라셨나 보…….”
박무일의 시선이 와인 잔을 쥔 내 손에 닿아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아.”
테이블 매너 말하는 건가. 이런 데에 쓸데없이 예민한 태제헌과 같이 다니다 보니 절로 몸에 익었다. 의식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몸이 움직이는 게 꼭 태제헌의 흔적이라도 되는 것 같아 기분이 더러웠다.
나도 모르게 표정을 구긴 채 톡톡 잔을 두드리는데 앞에서 한서진이 서늘한 목소리로 박무일을 질타했다.
“박무일. 그딴 헛소리할 거면 돌아가.”
“아, 그게 저는…….”
뭐야. 둘이 갑자기 왜 싸워?
의아하게 시선을 들자 낭패라는 표정으로 안절부절못하던 박무일이 푹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형님. 제가 실언했습니다.”
“뭐가? 왜?”
갑자기 바뀐 분위기에 의아한 눈으로 둘을 번갈아 봤다. 한서진이 꺼지라는 티를 숨기지 않으며 말했다.
“슬슬 가야 할 시간 아닌가. 센터에서 잘 게 아니라면.”
“너 방도 많던데……. 아니다. 아, 알겠다고.”
한서진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는데도 혼자 이리저리 대답하던 박무일은 결국 자리에서 일어나 꾸벅 고개를 숙였다.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형님. 다음에 또 뵈어요.”
“어. 언제 볼지 모르지만. 조심히 가고.”
“설마요. 저희 왠지 자주 볼 것 같은 예감이 듭니다.”
무슨 자신감인지 씩 웃으며 말한 박무일은 마지막까지 사람 좋게 웃으며 등을 돌렸다. 그가 사라지는 걸 보다 입을 열었다.
“요즘 시대에 보기 드문 건실한 놈이네.”
“……진심이에요?”
“그럼?”
한서진이 질린 눈으로 고개를 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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