엑스트라 파업 선언 41.
얼마 지나지 않아 섬의 각 지역에서 이상이 없다는 신호탄이 터져 나갔다. 어찌 됐건 주호현으로서의 첫 임무가 성공적으로 막을 내렸다.
게이트 밖으로 나오자 연안에 대기하고 있는 보트들이 보였다. 돌아가려면 다시 그 역겨운 뱃멀미를 겪어야 한다는 생각에 기분이 가라앉아 발에 걸리는 자갈들을 툭툭 발로 차며 걷다 한서진한테 혼났다.
보트를 타고 쾌속선 위에 올라타자마자 멀미를 방지하기 위해 곧바로 갑판으로 향하는데 뒤에서 날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현아. 호현아!”
“왜?”
보폭이 큰 나와 한서진을 따라잡느라 급히 달렸는지 예성우가 가쁜 숨을 고르며 말했다.
“호현아 너 가이딩, 가이딩할 수 있……. 언제부터?”
“그냥 되던데.”
시큰둥하게 답하자 생각과는 다른 대답이었는지 예성우의 표정이 얼핏 굳었다. 눈을 가늘게 뜨고 바라보다 덧붙였다.
“아, 맞다. 그리고 그것도 도움 많이 됐어.”
“응?”
“그쪽이 준 보조제.”
예성우의 표정이 미묘하게나마 환해졌다. 그것을 보며 내가 말한 것이 정답임을 알아챘다.
옆에서 한서진만이 의아하게 물었다.
“보조제라니. 그게 무슨 말이에요?”
“그게…….”
“호현이 먹던 약 있거든. 마나량 조금 늘려 보고 싶다고.”
내 말을 끊고 돌아온 예성우의 말에 한서진의 시선이 그를 향했다.
“형이 먹던 약이라고요? 뭔데요.”
“영양제 같은 거래. 호현이가 나한테 맡긴 거라 나도 잘은 모르겠네. 다시 돌려줬을 뿐이야. 호현아, 그럼 기억은 많이 돌아온 거야?”
“조금? 그것도 뭐, 오락가락해.”
“그럼 혹시 수윤……. 아니다. 호현아, 오늘 정말 고생 많았어.”
뭔가 더 물으려던 예성우는 슬쩍 한서진의 눈치를 보더니 급히 말을 마치고는 다시 팀장이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는데 한서진의 삐딱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영양젠데요? 아무거나 주워 먹고 다니지 말랬죠. 위험한 거면 어쩌려고 그래요. 또 말 안 하고 언제 뭘 먹은 거야, 대체.”
“예성우가 줬어.”
“기억도 없으면서 남이 주는 걸 그렇게 덥석덥석 받아먹어요? 적어도 보호자인 나한테 말할 수는 있었잖아. 형 그 연구원 때도 마찬가지야. 오늘도 그렇고. 제발 자기 몸 좀 아끼고…….”
한마디 변명했다고 귀가 따갑게 쏟아지는 질책에 머리가 다 아찔했다.
“아아, 멀미 난다. 나 멀미 나, 서진아.”
“헛소리 마요. 아직 출발도 안 했어.”
“……씨발.”
***
일주일도 지나지 않았는데 다시 보는 한서진의 방이 굉장히 낯설게 느껴졌다.
“오랜만이네.”
“짐은 다 가져다 놨어요.”
“내 방에?”
작은 방으로 들어가려 하자 한서진이 팔을 잡아 세웠다.
“어딜 가요. 어차피 여기서 잘 거잖아.”
“그치. 근데 어쨌거나 내 방은 저기인 거잖아.”
놓으라고 팔을 흔들자 한서진이 당황한 낯으로 입만 뻐끔댔다.
“그건, 그땐…….”
“놔.”
“……그냥 쭉 여기서 지내요. 작은 방 말고. 짐도 다 저쪽에 있으니까.”
“뭐……. 네가 그렇게 부탁까지 한다면야.”
힘이 풀린 한서진의 손에서 스르르 팔이 빠져 나왔다.
한서진에게서 등을 돌리며 흘깃 노려봤다.
‘이상한 데서 눈치 빠른 새끼.’
옷 갈아입으면서 겸사겸사 전에 숨겨 놨던 주호현의 물건들이 잘 있나 확인하려고 했는데. 지금은 감시가 삼엄하니 나중에 봐야겠다.
씻고 나오자 한서진이 보이질 않았다. 혹시나 하고 휴대폰을 드니 급히 회의가 잡혀 잠시 나갔다 온다는 메시지가 남아 있었다.
곧바로 작은 방으로 들어가 화장실 천장에 숨겨 놓은 물건들이 잘 있는지 확인했다. 다행히 모두 안전했다. 다만 앰풀의 수가 현저히 적었다.
“둘, 셋……. 이거밖에 안 남았나?”
내가 성분 분석하느라 몇 개를 날려 버리긴 했지만 이렇게 적게 남았을 줄이야.
한숨이 절로 나왔다. 처음 이것들을 찾아냈을 땐 단번에 알아낼 수 있을 거라 생각했었건만.
내게는 쓸모도 없는 보조제는 모조리 버려 버릴까 하다 멈칫했다.
‘그런데 오늘 예성우 엄청 수상했단 말이지.’
정식으로 성분 검증까지 끝나고 제조사까지 알아냈는데도 찜찜했다.
이 꺼림칙한 느낌을 그냥 지나칠 수는 없어 벌떡 일어났다. 주호현의 방으로 가 뭐라도 단서를 찾아볼 생각이었다.
호기롭게 꼭대기 층으로 올라간 나는 주호현의 방문을 벌컥 열자마자 보이는 인영에 놀라 흠칫 떨며 한 발 뒷걸음질 쳤다.
“씨발, 뭐야.”
“깜짝아! ……호현아?”
“그……쪽이 왜 여깄어. 미친 개놀랐네.”
터질 듯 뛰는 심장을 쓸어내리자 예성우가 난감하다는 듯 웃었다.
“여긴 어쩐 일이야?”
“내가 묻고 싶은 말인데. 여기 내 방이잖아.”
“이번에도 오자마자 서진이 방으로 가길래 이젠 여길 안 쓰는 줄 알았어. 보다시피 조금 외지고 작잖아. 정리한 후에 짐만 가져다줄 생각이었는데……. 내가 너무 앞서 나갔나 봐. 기분 나빴다면 사과할게.”
한 점 거짓 없이 보이는 예성우의 얼굴을 쳐다보다 고개를 가로저었다.
“사과는 무슨. 나야 고맙지.”
“그런데 호현이는 이 방에 어쩐 일로? 혹시 기억이 돌아온 거야?”
“조금씩 돌아오는 것 같아. 이상한 꿈도 자꾸 꾸고.”
대충 둘러대던 중 꿈 소리에 예성우의 눈이 빛나는 것을 목격했다.
‘뭐지?’
이상하게 예성우의 얼굴을 바라봤다. 예성우가 넌지시 내게 물었다.
“이상한 꿈이라니?”
“그게……. 아니다.”
한숨을 쉬며 고개를 내젓자 기대감에 부풀었던 예성우의 표정도 함께 어그러졌다.
“하, 하하……. 편히 말해 봐, 호현아. 내가 도움 될 수 있는 부분이라면 꼭 돕고 싶어.”
“그래? 형이 그렇게까지 돕고 싶다는데 그냥 말할까?”
“응. 기억을 찾는데 중요한 단서일지도 모르잖아. 같이 알아보자.”
“사실 그게…….”
“응. 천천히.”
“꿈을 꿨는데…….”
“꿈에서? 누가 나왔어?”
“……아냐. 아무래도 이런 걸로 투덜대는 거 남자답지 못하잖아.”
“호현아!!”
결국 참다 못한 예성우가 소리를 질렀다. 과장되게 놀란 표정으로 바라보자 눈을 꾹 감았다 뜬 예성우가 평정을 잃은 얼굴로 애써 웃어 보였다.
“형이, 형이 꼭 듣고 싶어서 그러는데 알려 줄 수 있어?”
“그렇게 듣고 싶어?”
“물……론이지. 호현아. 몇 번이나 말했잖아.”
“그냥 별거 아닌 것 같아서. 류…수엉…….”
순간 수연이었나 수윤이었나 혼동돼 대충 얼버무렸다. 다행히도 예성우는 잘 알아들었는지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수윤이? 수윤이가 꿈에 나온 거야?”
“응. 우린 참 친했지…….”
“맞아. 너희 친했어……. 그럼 혹시 수윤이가 어떻게 됐는지도 기억 난 거야?”
“당연하지. 정말 안타까운 일이야…….”
중얼거리자 예성우도 입을 다물고 고개를 숙였다. 예성우가 동요한 틈을 놓치지 않으려 서둘러 입을 열었다.
“근데 그 꿈에 그쪽도 나왔어.”
“뭐?”
“잘 기억은 안 나는데 내가 쓰러진 수윤이를 안고 있고 다들 슬퍼하는데 그쪽은 어딜 막 뒤지고 돌아다니더라.”
잘 기억이 안 나는 것치고는 상세한 광경을 묘사하자 예성우의 얼굴에서 핏기가 싹 가셨다.
“내가 뭘, 뭘 찾았는데?”
“……모르겠어. 뭔가 하얀 야….”
“하얀 양?”
돌연 소리를 지르는 예성우의 모습에 흠칫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예성우의 눈에 광기가 돌았다.
“너 꿈에서 양을 봤어? 그런 거야?”
‘아니 양이 뭐라고…….’
도발할 생각이긴 했지만 예상보다 훨씬 격렬한 반응에 급히 발을 뺐다.
“갑자기 무슨 소리야. 하얀 약통.”
“뭐……?”
“하얀 약통이었다고. 그쪽이 찾던 거. 아마 나한테 가이딩 보조제 챙겨 주던 모습이 기억에 남았나 봐. 웃기지?”
예성우는 전혀 웃지 않았다.
표정 관리 할 생각도 들지 않는지 싸늘히 굳은 얼굴로 입술을 깨물었다.
“피곤하다. 난 먼저 내려가 볼게.”
“형도 보조제 필요하면 말해. 그거 잠 잘 오더라.”
“괜찮아.”
등을 돌린 예성우가 계단 아래로 내려가는 것을 확인하고 방으로 들어온 나는 곧바로 문을 닫고 등을 기댔다.
“씨발. 존나 놀랐네.”
양 소리를 듣자마자 눈이 홱 돌아 버리는 것을 보니. 시스템이 보여 줬던 환영에서 예성우가 찾던 건 역시 그 새끼 양이 맞았나 보다.
‘양이 있을지 알고 있었단 소리인가?’
숨을 고르며 시야에 한 번에 들어올 정도로 조그만 방 안을 둘러봤다.
내가 그날 정리한 물건들의 위치가 약간씩 달라져 있었다. 정리는 개뿔. 예성우 역시 나처럼 뭔가를 찾으러 온 게 분명했다.
오늘은 일단 그냥 돌아가자 생각하며 다시 등을 돌리는데 발밑에 부스럭하고 뭔가 밟혔다. 구깃구깃 구겨진 종이였다. 꼭 누군가 일부러 발견하기 쉬운 곳에 두고 간 것 같이.
허리를 숙여 종이를 집었다. 구겨진 종이를 펴자 그것이 영수증임을 알 수 있었다.
영수증엔 주호현의 카드로 이름 모를 물약을 구매한 내역이 적혀 있었다. 아마도 이 물약이 바로 그 독이 든 앰풀이겠지.
“주호현은 이걸 왜 산 거지……?”
***
다음 날 팀장이 팀원들을 소집했다. 용건은 내일 있을 현장에 대한 사전 브리핑이었지만 막상 팀장 입에서 나온 말은 다른 것이었다.
“주호현. 이만 네 방으로 돌아가지.”
“팀장님!!”
곧바로 한서진이 벌떡 일어났다.
※ 본 저작물의 권리는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저작물을 복사, 복제, 수정, 배포할 경우 형사상 처벌 및 민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