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엑스트라 파업 선언-43화 (43/257)

엑스트라 파업 선언 43.

그래 봤자 하위 길드라 나를 아는 놈들은 없겠지만 혹시나 해서 신발 끈을 묶는 척 무릎을 굽혀 앉았다. 나란히 걷던 한서진이 의아하게 돌아봤다.

“형?”

“어어. 먼저 가.”

한서진이 내 옆에 멈춰 섰다. 뒤따라오던 다른 에스퍼, 가이드들이 우리를 앞지르며 시야를 가리고 나서야 몸을 일으켜 군중 사이에 숨어들어 갔다.

게이트에 가까워지자 우릴 발견한 헌터들이 슬슬 거리를 벌렸다. 흔하지 않은 에스퍼들의 모습에 관심 가득한 시선과 웅성거림이 이쪽을 향했다. 대체로 그저 신기하단 눈빛이었지만 그 사이에 적개심이나 무시 또한 함께였다.

“에잇, 퉤! 노헌 새끼들 아니야?”

테란은 역시나 녹스 따까리라 그런지 대놓고 비아냥댔다. 그동안 녹스에서 에스퍼를 마주친 헌터들이 대놓고 욕을 하거나 조롱하는 모습을 봐도 별생각이 없었는데 막상 내가 여기 소속되어 저 욕을 듣고 있으니 묘한 기분이 들었다.

“또 무슨 훼방을 놓으려고 우르르 몰려왔냐?”

“어이! 피 주머니 맛있냐? 나도 한번 빨아 보면 안 될까?”

“푸하학, 미친놈아!”

힐긋 주위의 에스퍼들을 둘러봤다. 신입으로 보이는 몇몇을 제외하곤 대부분이 동요하지 않고 그를 무시했다.

‘이걸 참네.’

아무래도 국가 기관이라 잔챙이 길드의 도발쯤은 참아 넘기는 듯했다.

소란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게이트 입구에선 관계자가 몇몇의 헌터 무리와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저기요. 들여보내 달라고요.”

“이러시면 안 됩니다. 여긴 국가 소유의 던전으로…….”

“그러니까 국가 소유라는 걸 증명해 보시라고요. 국가에서 미등록 게이트 먼저 점거하고 국유화시키는 거 모를 줄 압니까?”

“맞아! 그걸 우리가 어떻게 믿어! 등기부 등본 가져와! 등기!”

“아니, 당장 어디서 등본을 떼 옵니까? 이미 국가 소유인 던전을 갑자기 증명하라 하시면……. 일단 입장해야 하니 비켜 주세요!”

“지금 국민에게 이래도 됩니까? 어어, 저 만지지 마세요. 신고합니다?”

또 테란이다. 저기와 조금이나마 연관되어 있었다는 것이 창피해 얼굴이 붉어졌다.

이미 게이트에 들어갔어야 했을 시간인데 실랑이는 잦아들지 않았다. 소란이 날 걸 미리 알고 있던 건지 아니면 벌써 소식을 들은 건지 한둘이지만 카메라를 든 기자들도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에스퍼님. 죄송하지만 던전 오픈은 조금 기다려야 할 것 같습니다. 이러다 멋대로 같이 들어가기라도 하면 문제가 커져서…….”

결국 관계자까지 다가와 말하자 팀장의 무뚝뚝한 얼굴에도 짜증이 감돌았다. 팀장이 깊게 한숨 쉬며 우릴 돌아봤다.

“기자들 눈에 띄지 않게 흩어져서 잠시 대기해. 삼십 분 후에 헬리포트 앞에서 다시 집합한다. 알타의 김지연과 레이븐의 한서진은 나를 따라오도록.”

팀장의 말에 한서진이 곧바로 날 바라봤다. 그 이유를 알 것 같아 팀장을 턱짓하며 말했다.

“너 필요한가 보다.”

“……다른 데 새지 말고 헬리포트 앞에 미리 가 있어요.”

“내가 애새끼냐? 알았어.”

한서진이 먼저 떠난 후 툴툴대며 헬리포트가 있는 건물로 향했다. 하지만 몇 걸음 가기도 전에 그쪽 건물에서 테란 문양을 가진 헌터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

곧바로 반대로 발을 돌렸다. 한서진도 이건 이해해야 한다. 혹시 녹스 길드원이 한 명이라도 껴 있어서 마주친다면 그땐 진짜 좆 되는 거니까.

오른쪽으로 가자니 헌터투성이고 왼쪽으로 가자니 날 향한 에스퍼들의 시선이 부담스러웠다. 정처 없이 떠돌다, 결국 게이트에서 조금 멀리 떨어진 곳으로 와 버렸다. 컨테이너 창고들 뒤로 보이는 작은 공원의 벤치에 앉아 쉴 생각으로 터덜터덜 걷는데 어디선가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잖아요!”

‘이건 예성우?’

요즘 내 최대 관심사를 그냥 지나칠 수가 있나. 기척을 죽이고 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향했다.

예성우는 여러 컨테이너가 교차하는 깊숙한 구석에 있었다. 그의 맞은편엔 서 있는 여자는 뒷모습만 보였지만 오늘 헬기를 같이 타고 와 곧바로 누군지 알아볼 수 있었다. 다른 팀 에스퍼로, 오며 가며 한두 번 본 적 있는 얼굴이었다. 예성우랑은 전혀 면식이 없어 보였는데?

“그건 변명이 되지 않는다. 하말의 조각이 옮겨 간 것이 그 가이드일 거라고 말했던 건 너이지 않나.”

여자의 싸늘한 목소리에 예성우가 겁먹은 듯한 목소리로 더듬더듬 변명했다.

“하지만 전과 상황이 다릅니다. 워낙 그 가이드에게 이목이 많이 쏠려 있고 팀원들의 태도도 변해서 작은 가능성 하나 가지고 움직이기에는 제가 위험…….”

“겨우 그딴 이유로 미적거리는 중이라니. 네 신심이 겨우 그 정도였나. 정말 믿고 바라는 게 맞는지 의심되는군.”

“그게 무슨 소리세요! 당연하죠! 그분을 향한 마음만은 그 누구보다……!”

“목소리 줄여.”

여자의 면박에 예성우가 입을 꾹 다물었다. 둘 사이에 찾아온 정적에 나도 숨을 멈춰야 했다.

‘뭐야. 저 둘이 말하는 가이드가…… 설마 나?’

긴장한 채 눈만 굴리는데 여자의 목소리가 정적을 깨트렸다.

“우리가 이곳에 온 이유를 잊지 마라. 그분의 완벽한 강림을 위해서야. 정말 그 가이드가 하말과 연관되어 있다면 설령 우리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죽여 없애야 해.”

“……네. 알겠습니다.”

에스퍼가 먼저 떠난 후 조금 시간 차를 두고 예성우도 반대편으로 사라졌다.

컨테이너 박스에 등을 기댄 나는 천천히 방금 들은 말을 되짚어 봤다. 하지만 무슨 소린지 도통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말이 누구야?”

듣기로는 주호현을 노리는 것 같은데 뭘 어떻게 하겠다는 건지……. 대화 자체를 알아듣지를 못하니 도통 짐작이 가질 않았다.

역시 예성우, 존나 수상한 놈 맞다니까.

***

오늘도 한서진의 방에서 뒹굴다 잘 시간이 되어 느릿느릿 침대 아래로 다리를 떨궜다. 싫은 티 팍팍 내며 몸을 일으키는 내게 한서진이 이만 제 방으로 돌아오라 말했다.

“그냥 다시 들어와요. 무슨 고생인데, 이게.”

‘나도 존나 그러고 싶다…….’

속마음을 감추며 애써 입꼬리를 올렸다.

“고생은 무슨……. 괜찮다니까.”

마주 앉아 있던 한서진이 내게 손을 뻗었다. 가까워지는 손에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다.

눈가에 내려앉은 따듯한 온기에 슬며시 다시 눈을 뜨자 시야엔 한서진의 걱정스러운 표정이 가득했다.

“뭐야…….”

“이동할 때 맨날 자는 거 보면 요즘 잠도 제대로 못 자는 것 같고……. 그걸 떠나서 안색이 썩었어요.”

“…….”

떨떠름한 낯으로 바라보다 손을 툭 쳐 냈다.

“생각 좀 해 보고. 일단 오늘은 가서 잘 거야.”

“그냥 오늘부터 와서 자지.”

“싫어. 안색 썩은 놈이랑 같이 자서 뭐 하게.”

사실 당장이라도 한서진의 침대에 눕고 싶은 생각이 가득했다. 하지만 오늘 예성우가 다른 에스퍼와 밀담을 나누는 것을 보기도 했으니…….

‘일단 조금만 더 참자.’

떨어지지 않는 발을 옮겨 다락방으로 돌아갔다. 몸을 누이는 순간 불협화음처럼 딩댕댕 울리는 매트리스 스프링 소리에 곧바로 후회했지만.

“그냥 오늘만 한서진 방에서 자고 내일부터 다시 시작한다고 할 걸 그랬나. 아니, 매트리스만 잠깐 바꾸……. 하, 아니다.”

후회해 봤자 이미 늦었다. 눈을 질끈 감고 잠에 들려고 노력했다.

한참이 지나고 깊은 밤, 설핏 선잠에 빠져들었을 때 계단을 올라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옅게 잠들었던 정신이 천천히 건져 올려졌다.

‘……온다.’

발소리가 활짝 열어 둔 문 앞까지 다다랐을 땐 거의 잠에서 깬 상태였지만 그대로 눈을 감고 열심히 자는 척했다. 자는 척은 어릴 때부터 자신 있었다.

감은 눈 대신 온몸의 감각이 침입자의 움직임을 쫓았다. 걸어 들어온 발소리가 발끝을 지나 천천히 위로 올라오다 머리 바로 옆에서 멈췄다.

차르르 하며 약통을 들어 올리는 소리가 방안을 울렸다.

“……많이 줄었네.”

예성우의 목소리였다.

‘역시!’

흥분해 뛰는 심장 소리가 바깥까지 들릴까 겁났다. 몰래 혀끝을 씹었다.

다시 조용히 약통을 내려놓은 예성우가 머리맡에 조심스럽게 무릎을 꿇고 앉는 게 느껴졌다. 그 이후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뭐지? 뭐야?’

귀를 쫑긋하는 사이 작은 한숨과 함께 내 머리칼에 예성우의 두 손이 닿았다. 순간 존나 놀라 나의 완벽한 자는 척이 깨질 뻔했다.

“……이제 그만 끝내자.”

드림 인베이더.

예성우가 속삭였다. 동시에 내 몸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이불 위에 올려져 있던 손이 옆으로 털썩 떨어졌다.

걷잡을 수 없이 흐느적거리는 몸에 당황해 자는 척하던 중이라는 것도 잊고 벌떡 일어났다.

“뭐야……. 여긴.”

난 주호현의 다락방이 아닌 완전히 다른 공간에 서 있었다.

‘호현아!’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돌아봤다. 누군가 날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손을 흔들며 다정히 웃는 얼굴.

‘류수윤…….’

살아 움직이는 모습을 본 게 처음이라 그런지 낯설게 느껴졌다.

다락방에 들어온 예성우가 무언가 속삭이던 기억을 마지막으로 눈을 떠 보니 지금이다. 한 번도 본 적 없던 류수윤의 얼굴이 이렇게 생생한 것을 보면 이건 주호현의 꿈인 건가?

“엇, 어엇.”

가까워진다 싶던 류수윤이 곧바로 날 끌어안았다.

‘왜 이제 와. 걱정했잖아.’

애정이 담뿍 담긴 목소리에 조금 놀랐다. 류수윤의 포옹에 심장이 빠르게 뛰는 건 내 감정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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