엑스트라 파업 선언 48.
한참을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 다른 팀 가이드들이 편하게 주위를 돌아다니는 모습에 나도 슬쩍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등을 돌리자마자 곧바로 우한세의 면박이 떨어졌다.
“야! 주호현!! 어디가?”
씨발. 눈치 존나 빠르네.
속으로 욕을 짓씹고는 금방이라도 토할 것 같은 표정으로 우한세를 바라봤다.
“어……. 속이 좀 안 좋아서. 잠깐 뒤쪽 좀 갔다 올게.”
여기까지 말했으면 대충 알아들을 것이지 우한세는 되려 눈을 세모꼴로 떴다.
“웃기고 있네. 너 던전이 장난이냐? 아프다고 징징대면 봐줄 줄 알아? 여기 네 응석 받아 줄 사람 없어.”
“…….”
“한 발짝만 움직여 봐. 다리를 부러트려서라도 앉혀놓을 테니까. 임무 중 개인행동으로 팀에 위험을 끼쳤다고 한 달간 근신 처분해 버릴 거야.”
평소보다 더 공격적인 우한세의 태도에 황당히 입을 뻐끔댔다.
‘왜 이래 미친놈아…….’
다른 팀들의 시선까지 우릴 향해 있었기에 다시 그 자리에 털썩 앉을 수밖에 없었다.
우한세를 무시하고 지금 뛰쳐나갔다가 죽어 버리면 사고사나 자살로 처리될 수도 있었다.
‘그럼 안 되지. 내가 한 일들이 다 뻘짓이 되는 거 아니야. 기껏 SS급 스킬도 포기하고 선택한 스킬인데.’
시간이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임무 장소가 이곳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땐 곧바로 튈 수 있을 것처럼 자신 있었는데 막바지에 이렇게 꼬일 줄이야.
최악의 경우 B안을 선택해야 했다. 예성우고 뭐고 일단 냅다 튀기.
혹시 에스퍼들이 이른 복귀라도 할까 초조하게 발을 구르며 상황을 지켜보는데 갑자기 주위의 나무들이 일제히 흔들리기 시작했다. 새 떼들이 하늘로 날아오르고 나뭇잎들이 비벼지며 흘러드는 스산한 소리에 다들 위를 올려다봤다. 안전지대 전체를 감쌀 정도로 거대한 그림자가 머리 위로 드리웠다.
누군가 겁에 질려 소리쳤다.
“모, 몬스터다!!”
소름 끼치는 울음소리와 함께 몬스터가 우리를 향해 쇄도했다.
“뭉쳐 있으면 위험하다! 다들 흩어져!!”
나무가 무너지고 나뭇잎이 흩날려 시야를 가렸다. 다른 팀 에스퍼의 외침을 듣고 일단 자리를 피하려다 나무뿌리를 보지 못하고 발이 걸렸다. 몸이 휘청이다 우당탕 넘어졌다.
“크윽.”
서둘러 몸을 일으키던 중 눈앞에 보인 광경에 잠시 말을 잃었다. 흩어지라 외친 것과 달리 다른 팀 에스퍼들은 제 가이드들을 하나씩 챙기고 있었다. 그리고 그 뒤로는 박가인과 예성우를 데리고 피신하는 우한세의 뒷모습이 보였다. 아무도 주호현을 신경 쓰는 사람은 없었다.
다른 팀 가이드와 눈이 마주쳤다. 완전히 반대편에 동떨어진 날 보고 놀란 표정으로 입을 뻐끔댔다. 하지만 두 마리로 늘어 버린 몬스터에 그 역시 등을 돌리고 제 에스퍼가 있는 반대 방향으로 도망쳤다.
새삼스럽게 상처받지는 않았다. 다만 이곳이 주호현이 있을 곳이 아니란 확신이 더해졌을 뿐.
‘오히려 지금이 기회야.’
나는 그대로 안전지대 바깥으로 몸을 던졌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무작정 아래를 향해 뛰었다. 강 하류로 가야 했다.
탕! 탕!
“허윽, 헉…….”
에스퍼들을 따라간 건지, 다행히 정체 모를 비행형 마수들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혼자 온 숲을 헤치며 내려오다 보니 몬스터들을 자극해 내 뒤로 자잘한 몬스터들이 따라붙은 상태였다.
달리 공격 스킬이 없는 나는 가이드들에게 지급된 특수 총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탕! 덜컥, 덜컥.
“하, 씨발. 이러다 먼저 뒈지겠네.”
인벤토리라도 있었다면 뭐라도 더 챙겨 왔을 텐데…….
아직 주호현의 몸은 센터와의 계약에 묶여 상태창과 인벤토리를 제한당한 상태였다. 공식적으로 사망 처리되어야 계약이 해지될 테니 그때까진 그림의 떡이었다.
다리를 붙잡고 죽은 몬스터들을 발길질해 떼어 내며 마지막 탄창을 갈아 끼웠다. 이 총알이 다 떨어지기 전에 워프 장소에 도착해야 한다.
주머니 안쪽 깊숙이 넣어 놓은 유리 단지를 꺼냈다. 빈 탄창과 너덜너덜한 조끼는 벗어 던지고 단지를 열자 버석버석 마른 해초가 보였다.
“아이템 감정.”
<말린 잠수초>
섭취하면 물속에서 일정 시간 동안 숨을 쉴 수 있다.
잠수초를 먹고 바다 아래로 깊이 들어가면 미지의 문명을 마주할 수 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신선도가 떨어질수록 효능이 줄어든다.
해초를 한 번에 입에 털어 넣자 비린 향이 진하게 올라왔다.
“우웩, 맛없어.”
넌더리를 치다 꿀꺽 삼키자 눈앞에 시스템창이 떴다.
<말린 잠수초>를 사용했습니다.
효과 지속 시간
[3:00:00]
세 시간이라니. 여유 있는 정도는 아니었다. 잠수초는 신선할수록 효과가 더 오래간다던데 말리지 않으면 또 유통이 어려워 어쩔 수 없었다.
잠시 주위를 둘러보며 가야 할 길을 가늠하는 사이 뒤에서 또 크르르 하는 소리가 들렸다.
탕탕!
총을 쏴 견제한 후 돌아보지도 않고 도망쳤다. 얼마나 달렸을까, 다행히 몬스터에게 물려 죽기 전에 강 하류에 다다를 수 있었다. 물이 시원하게 부서지는 소리가 아래서부터 올라왔다. 강의 하류는 절벽과 이어져 있었다.
빼꼼 고개를 내밀어 아래를 바라봤다. 깎아지를 듯한 절벽에 세차게 흐르는 폭포수. 거센 물안개로 인해 끝도 보이질 않았다.
“별짓 다 한다. 진짜…….”
전엔 스킬이 있는 놈과 함께 움직였는데도 조금 떨렸건만 지금은 맨몸이라고 생각하니 삐질삐질 땀이 났다. 죽진 않는다는 것을 알았지만…….
“크와앙!”
“큭, 씨발!”
탕!
뒤에서 달려든 몬스터에 몸이 뒤로 넘어갔다. 급히 총을 쐈지만 너무 가까워 빗맞고 몬스터의 몸부림에 저 멀리 날아갔다. 신발이 벗겨지고 옷이 찢어발겨졌다. 거세게 반항했지만 팔을 물고 버티는 몬스터를 도무지 떼어 낼 수가 없었다. 비전투계인 내가 맨몸으로 몬스터를 죽일 수 있는 방법은 단 한 가지였다.
“으아아악!”
두 팔로 몬스터를 감싸 안고 그대로 몸을 굴렸다. 데굴데굴 구르자 등을 지지하고 있던 땅이 사라지며 몸이 아래로 훅 꺼졌다.
거센 바람에 머리칼이 휘날렸다. 정신이 쏙 빠질 만큼 아찔했다. 한참을 아래로 떨어지던 몸이 수면에 부딪히며 곧 엄청난 충격이 전해졌다.
나뿐 아니라 내 팔을 물고 있던 몬스터도 거칠게 날뛰기 시작했다. 턱 아귀 힘이 장난 아니라 그대로 두면 팔이 무사하지 못할 것 같아 결국 몬스터의 목을 조르고 아래로 잠수해 내려갔다.
깊이 들어가자 그제야 발버둥 치며 반항하던 몬스터의 몸이 축 늘어지며 팔을 물고 있던 힘이 풀렸다.
‘하……. 질긴 새끼.’
한숨을 쉬자 입에서 보글보글 공기 방울이 새어 나갔다. 잠수초를 처음 먹어 적응이 어려울까 걱정했던 게 무색하게 어느새 나는 물속에서 수월히 호흡하고 있었다. 몬스터와 대치하느라 나도 모르게 서둘러 적응한 건가.
보호구도 거의 남아나질 않은 데다 한쪽 팔은 완전히 너덜너덜해져 몸 상태가 말이 아니었다. 서둘러 입구를 찾으러 아래로 헤엄쳐 내려갔다.
세간엔 아직 알려지지 않았지만, 아주 드물게 두 개의 던전이 서로 연결된 특이한 경우가 발견되곤 했다. 둘의 파장이 같아서 생기는 일이라는데 이 던전이 바로 그런 유였다.
희귀한 정보라 녹스에서도 소수만 알고 있기에 센터 측에서는 주호현이 살아 있을 가능성을 차마 고려하지 못할 것이다.
기억을 더듬어 암벽 틈새들을 살펴보다 드디어 들어가는 입구를 발견했다.
‘찾았다!!’
동굴로 통하는 기나긴 길을 지나자 드디어 끝이 보였다. 물에서 빠져나가면 이제 앞에는 다른 던전으로 가는 워프가…….
기대감에 가득 차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눈앞의 게이트는 내 기억 속의 것과 달랐다. 푸른색으로 잔잔하게 빛나던 전과 달리 붉고 검은빛이 이리저리 뒤섞여 보기만 해도 위험해 보였다. 심지어 기운이 밖으로 틱틱 튀기까지 했다. ‘들어오면 죽는다’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들어가지 않아도 좆 되는 나로서는 달리 방도가 없었다.
한 발 내딛는 순간, 경고하듯 화르륵 불타던 게이트는 갑자기 픽 꺼져 버렸다.
“뭐, 뭐야. 어디 갔어?”
다급히 달려가 손을 뻗었다. 그러나 손바닥엔 차가운 암벽만이 만져졌다. 몸을 던지고 머리를 집어넣어도 사라진 게이트가 다시 생겨나는 일은 없었다. 게이트의 빛이 사라져 어두운 동굴에 간간히 박힌 야광석들만이 시야를 밝혀 주었다. 황당한 표정으로 게이트가 사라진 암벽을 바라봤다. 차마 말로 꺼내고 싶지도 않은 가정이 들었다.
“지금 나……. 갇힌… 거?”
확인 사살로 눈앞에 시스템창이 떠올랐다.
<말린 잠수초>의 효과가 사라집니다.
효과 지속 시간
[00:00:00]
***
몸 안에서 거대한 힘이 꿈틀거렸다. 잠시라도 가이딩 좀 받고 가라는 말을 거절한 한서진은 제게 세뇌를 걸어 요동치는 힘을 억누르곤 서둘러 던전 입구로 향했다.
진압 중 갑자기 던전 내부의 파장이 크게 비틀리는 바람에 빠져나오는데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렸다. 오늘따라 이상한 주호현의 태도가 마음에 걸려 서둘러 나오고 싶었는데……. 먼저 놀러 가자고 해 놓고선 기다리게 해 면목이 없었다.
‘기다리는 거 싫어하는데. 또 어떻게 달래야 하나.’
생각과는 달리 얼굴엔 웃음이 감돌았다.
게이트 밖으로 나와 모인 인파를 둘러봤을 때 곧바로 이상함을 느끼지 못한 것은 주호현을 찾느라 여념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는 주호현의 모습에 한서진은 팀원들이 있는 곳으로 발길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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