엑스트라 파업 선언 54.
씻고 옷을 갈아입고 나오자 맛있는 냄새가 온 집 안을 채우고 있었다. 홀린 듯 부엌으로 걸어갔다. 짧은 시간에 식탁을 가득 채운 음식들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와. 이게 다 뭐야?”
“아, 아직 완성되지 않은 건데…….”
식탁을 보고 감탄하는 날 돌아본 연승연이 더듬더듬 답했다. 그러면서도 조리 기구를 다루는 손은 쉬지 않고 움직였다. 연승연이 들고 있는 둥근 프라이팬에서 파도처럼 날아갔다가 다시 안으로 쏙 안착하는 밥알들이 신기해 눈을 크게 떴다.
더 구경하고 싶은 마음에 기웃대다 연승연의 동선에 걸릴까 뒤로 다가갔다.
“이건 뭐 하는 건데?”
집중한 얼굴 옆으로 불쑥 고개를 내밀며 묻자 소스라치게 놀란 연승연이 그 자리에서 펄쩍 뛰었다.
“으아아아! 호, 호현 님!!”
“왜 이렇게 놀라?”
“다, 다치실까 봐요!”
얼굴이 온통 붉어진 연승연이 어쩔 줄 몰라 하다 하나하나 손을 뻗어 설명했다.
“이건 보, 보볶음밥……이고, 스테이크는 잠시 레스팅하는 중…….”
“요리 원래 잘해?”
“조, 조금요. 아무래도 혼자 해 먹어야 하다 보니까……. 거의 다 됐으니 앉아 계세요!”
몸을 돌린 연승연이 날 식탁까지 밀어냈다. 거의 다 됐다는 말이 진짜인지 금세 준비된 음식들을 순식간에 비워 내고는 부른 배를 두드렸다. 제가 차렸으면서 별로 먹지도 않고 앞에 앉아 내가 먹는 모습을 지켜보기만 한 연승연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호현 님과 이렇게 나오게 되어서 해, 행복한 것 같아요.”
“나도. 이제야 좀 살 것 같다.”
한서진이랑 따로 먹을 때에야 괜찮았지만 팀원들로 가득 찬 숙소는……. 다시 생각해도 영 아니었다.
“마침 내일이 작업실 매물 보기로 한 날이에요. 거의 확정이라 호현 님께서 허락만 하신다면 바로 계약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내가 딱 맞춰서 왔네. 재료랑 제작 도구들도 우리가 다 새로 사야 하는 거지?”
“우리……. 네, 네. 맞아요.”
연승연이 크게 고개를 주억였다. 지금까진 말하면 알아서 준비되어 있었기에 포션에 필요한 재료를 직접 사는 경험은 처음이었다.
“재밌겠네.”
“저도 기대됩니다!”
***
장인의 거리라 하면 대한민국 국민 모두가 달섬과 월계나루를 떠올릴 것이다. 명장들에게만 허락된 달섬과 그로 들어가는 배가 정박하는 월계나루는 대장장이, 포션 메이커, 재단사, 연금술사들 등 모든 제작자들이 모인 제작의 성지였다. 자연히 몬스터들의 부속물이나 제작의 재료가 되는 아이템들을 판매하는 시장도 월계나루 근처에 크게 밀집되어 있었다.
“자아, 도착! 우리 젊은 사장님들! 내리자고.”
중개인의 차를 타고 멈춘 곳은 제작자들의 공방이 밀집된 곳과는 조금 거리가 있는 한산한 구역이었다. 차에서 내려 주위를 크게 둘러봤다. 월계나루 거리의 가장 끝에서도 조금 더 떨어진, 오히려 일반인들의 주거지와 더 가까운 곳이었다. 중개인은 바로 옆의 아담한 저택을 가리키며 말했다.
“바로 이 건물일세. 신축인 데다 작업장이나 펜트리로 쓸 만한 이공간이 안에 세 개나 내장된 곳이지. 작고 귀여운 동물을 키우거나 조그만 텃밭을 가꿀 수 있는 앞마당도 있고, 또 안전 등급 4등급으로 혹시 주변에서 게이트가 터지더라도 이렇게 안전할 수가 없어. 하급에는 끄떡도 하지 않을 정도고 그 이상의 던전이어도 우리 중개소에서 들어 놓은 보험으로 충분히 보상받을 수 있으니까 걱정 붙들어 매시고! 하하하, 애초에 이 달섬 부근은 그 어떤 게이트도 발생한 적 없는 청정 구역이지만.”
“너, 너무, 외딸아 있지 않나요?”
중개인의 기에 눌려 쭈그러든 연승연이 말했다.
“저, 저희 직종이 직종이니만큼 월계나루와 접근성이 꼭 좋아야 하는데 이렇게 멀면……. 여, 여기는 아닌 것 같습니다. 저는 다른 집을 보고 싶은데요.”
용기 낸 연승연이 불만스러운 낯으로 조곤조곤 열심히 항변했다. 그러나 노련한 중개인을 이길 수는 없었다.
“핫핫핫! 조오금 한적하긴 하지?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신축 건물에 텃밭까지 가질 수 있는 거야. 월계나루 근처는 건물들이 말이 아니야. 수리비가 더 나와. 그리고 머니까 오히려 운동 겸 오며 가며 건강도 챙기고! 응? 여기, 여기에 텃밭 하나 만들어서 가드닝을 즐기면 그게 힐링이고, 뜯어 먹으면 그게 바로 웰빙이야! 워라벨을 챙기면서 살아가야지. 그리고 인근 주택들도 다들 은퇴하고 집을 산 일반인들이라 조용하니 작업에 딱이야. 내가 일부러 젊은 사장님들 창창한 앞날 응원하려고 아껴 둔 매물 빼 준 건데? 이러면 서운해.”
아직 모습을 바꿀 수 있는 아이템을 구하지 못한 상태라 로브를 뒤집어쓰고 뒤에 서 있던 나도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멀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중개인의 말이 합리적으로 들린 탓이었다.
‘하긴. 포션만 만들 게 아니니까. 새 인생엔 새 건물이 어울리지.’
정체를 숨겨야 하니 너무 번화가도 좋지 않았다. 여러모로 여건이 좋은 것 같아 고개를 끄덕이는데 연승연이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작업실의 가장 기보, 기본적인 요건을 충족하지 못하는데 그게 다 무슨 소용인가요? 재료를 사러 갈 일도 많고 또 판매하는 업장에서는 헌터들의 접근성이 좋아야 한다는 거 아, 아시잖아요. 제게 처음 보내 주신 자료에는 분명히 여기 말고 다른 곳이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그건…….”
“지금 보, 보여 드릴까요? 사본 가져왔습니다.”
더듬대면서도 피하지 않는 연승연의 대처에 당황했는지 말끝을 흐리던 중개인이 결국 한발 물러서서 말했다.
“그게 말이지. 원래 딱 정해진 대금에 맞는 곳이 있었어요. 유서 깊은 공방촌이었지.”
“월계나루 서쪽이잖아요. 처음 보여 주신 곳.”
“아이쿠, 잘 아시네……. 여하튼, 거기가 값이 좀 저렴하면서도 제작 시설들이 잘 갖춰져 있어서 인기가 좋아. 근데 얼마 전부터 누가 그 근방 건물들을 싹 사들이기 시작했어.”
“누가? 한 사람이란 소리야?”
궁금한 걸 참지 못하고 끼어들었다. 여태껏 조용하던 내가 말을 꺼내 놀랐는지 움찔한 중개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냥 우리 추측. 루틴이 똑같거든. 바로 입금은 한 번에! 대신 사 놓기만 하고 사람은 안 들어오는 식으로. 웃돈까지 주고 사들여서 그 근방 매물은 지금 싹 나갔어. 집값도 싹 올라서 재계약 앞둔 신인 제작자들이 다 이쪽으로 옮기는 추세라니까.”
“어, 어떻게……. 그래도, 계약금도 드렸는데 제게 소개시켜 주셨을 땐 반 확정이라고 말씀하셨잖아요. 매물은 있던 것 아닌가요?”
연승연의 말에 중개인이 당황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를 보던 나는 발로 땅을 툭툭 치며 중얼거렸다.
“팔았네.”
“네?”
“그, 그게…….”
“그쪽에서 돈 더 얹어 줬지? 그래서 거기에 냅다 팔았지, 그치?”
“아니, 그렇게 단순한 일이 아니라…….”
중개인이 부정하지 못하자 연승연이 배신당한 표정으로 눈을 크게 떴다.
“이, 이건 계약 위반입니다! 헌터 부동산 협회에 신고를…….”
“아이고, 젊은 친구들. 총각, 사장님들. 한 번만 봐줘. 어? 사정이 있어서 그랬어. 내가 대신, 어휴. 여기 수수료, 5 퍼센트로 낮춰 줄게. 진짜 크게 손해 보는 거거든?”
“5 퍼센트?”
월계나루와 가까운 작업실들은 일반적인 집과는 조금 달랐다. 제작자들에게 필요한 이공간이나 안전 보안 등이 미리부터 갖춰져 있는 대신 임대료뿐 아니라 버는 돈에서 수수료도 내야 한다.
‘기본이 10 퍼센트랬나. 반이나 깎아 주다니…….’
나는 돈을 많이 벌 생각이니 내는 돈도 많아질 게 당연했다. 좋은 제안 같아 연승연에게 괜찮지 않냐고 말하려는 순간 연승연이 홱 고개를 돌렸다.
“아니요……! 저는 주, 중개인님께 신뢰를 잃었습니다. 솔직히 저희 같은 신입 제작자들은 버는 돈이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수수료는 크게 차이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허비되는 시간이나 제작 초반 기틀을 다질 수 있는 경험과 자원들은 돈을 주고도 구할 수 없는 것들입니다. 중개인님은 저희에게 그걸 빼앗아 간 겁니다.”
연승연의 말을 듣자 또 그 말이 맞는 것 같았다. 중개인을 돌아보자 그는 깊은 한숨을 뱉더니 머리를 짚었다.
“……알겠네. 그럼, 내가 특별히 이 집을 거래한다면 수수료를 면제해 주지. 대신 미리 보낸 자료들은 다 내게 반납하는 조건으로. 또 절대 신고도 없는 거네.”
파격적인 제안에 놀라 물었다.
“와, 계약 기간 동안 면제해 주는 거야? 아저씨 진짜 좋은 사람이구나!”
“그, 건 아니고 일 년……. 에휴. 그래. 첫 계약 기간 동안은 면제해 줄게, 내가.”
이놈들이 벌어 봤자 얼마나 벌겠어, 하는 생각을 하는 게 빤히 보였다. 어쨌거나 우리에겐 이득인 거래로, 연승연과 나는 집에서 미리 받은 계약서 원본을 찾아 들고 중개소로 향했다.
생각보다 큰 회사였는지 건물 한 층에도 중개인만 여럿이었다. 지방까지 맡아보는지 옆의 화면엔 광역시들의 지도들이 흘러 지나갔다.
전화를 받으러 간 중개인 대신 그 동료로 보이는 여자가 대신 우리의 절차를 맡아 준다고 다가왔다.
“연승연 님?”
“네!”
협회에서 특수하게 제작한 계약서가 꺼내졌고 연승연이 헌터 인감을 꺼내 들었다.
“이게 계약서인데요, 저희 쪽에서 채울 부분은 다 채워 뒀고 승연 님이 여기 공란들만 다 채운 후 인감 찍으시면 됩니다. 한 사장님이 받을 서류가 있다고 하던데요?”
“네. 여기…….”
계약서 원본을 내밀며 연승연과 난 시선을 교환했다.
‘사장이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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